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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영준의 사람과 세상]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뒤 그는 나눔의 길로 들어섰다

전통차 차이를 나눠 마시며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는 파키스탄의 한 가정을 찍은 자신의 사진 앞에 선 박노해 시인. 그는 티베트·파키스탄·인도·라오스 등 분쟁 및 빈곤 지역에서 촬영한 사진 중 120여 컷을 모아 2014년 세종문화회관에서 사진전 ‘다른 길’을 개최했다. [사진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함영준의 사람과 세상 <19> 박노해의 ‘다른 길’
분노의 언어로 선동하는 투사에서
감사와 사랑 말하는 휴머니스트로
전세계 분쟁지역 돌아다니며
희망과 평화 전도하는 역 자처



지금은 사실상 폐지된 상태지만 우리나라에서는 1997년까지 사형이 집행됐었다. 24년 전 나는 감옥과 사형장을 둘러보고 사형수 이야기들을 취재해 보도했다. 기사가 나간 지 얼마 뒤(91년 12월)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



“박노해 누난데요. 서울구치소에서 기자님의 기사를 읽고 한번 뵙고 싶다고 하네요.”



순간 깜짝 놀랐다. 박노해가 누구인가. 현장 노동자로 일하면서 『노동의 새벽』이란 시집을 통해 80년대 한국 민주화와 노동운동을 주도한 상징적 인물. ‘얼굴 없는 시인’으로 불리며 7년간 수배를 받아오면서 사노맹(남한사회주의 노동자동맹)을 결성, 우리 사회의 터부였던 ‘사회주의 혁명’을 꾀하다 검거돼 국가보안법위반죄(반국가단체 수괴)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골수 빨갱이’ 아닌가.



놀라움 반, 호기심 반으로 약속한 서울구치소 면회실로 갔다. 그러나 하필 주민등록증을 집에 두고 오다니…. 나는 평소 아는 구치소장에게 연락해 면회를 부탁했으나 도리어 화근이 됐다. 전 국민의 관심이 걸린 ‘특급’ 공안사범과 기자의 면회 자체에 비상이 걸린 것이었다. 나는 쓸쓸히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이듬해(92년) 봄 박노해는 대법원에서 무기수로 확정됐고 나는 해외 근무를 하면서 한동안 그를 잊었다.



달라진 박노해 “와인 마시러 가요”

김대중 정권이 들어선 98년 박노해는 8·15 광복절 특사로 7년간 수형생활을 마치고 풀려나왔다. 그는 물 만난 물고기처럼 활발한 대외 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그는 더 이상 절망·분노·증오의 언어로 이념과 투쟁을 선동하는 과거의 혁명가가 아니었다. 이미 감옥에서부터 “정신으로서의 사회주의는 지켜가야 하지만 현실체제로서의 사회주의는 잘못됐다”고 공언해 운동권·진보세력의 큰 반발을 불러일으켰었다.



대신 그는 자기 내면에 대한 성찰과 쇄신을 통해 희망·감사·사랑을 이야기하는 휴머니스트가 돼 있었다.



“현실을 긍정하고 세상을 배우세요.

그러나 세상을 닮거나 따르지는 마세요.

현실 속에 이미 와 있는,

좋은 세상을 앞서 사는 희망이 되십시오.”



그는 자신의 욕망도 솔직하게 드러냈다. “나는 진귀하고 맛있는 음식이 좋았고, 고급스럽고 세련된 옷이 좋았고, 기품 있고 우아한 여자가 좋았다. 남들이 나를 알아주고 유명해지고 힘있는 게 좋았다. 왜 나는 그 욕망을 떳떳이 긍정하지 못했을까.”



당시 홍콩에 있던 나는 박노해의 변신을 보면서 ‘저 사람의 실체는 과연 무엇일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귀국한 나는 2002년 봄 그에게 전화를 했다. 우리는 인사동 선술집에서 만났다. 그의 얼굴에서는 20년 넘는 거친 삶이나 투쟁의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고 오히려 맑은 평화가 느껴졌다. 세속을 떠난 수도자 같았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헤어지려는 순간 박노해가 말했다.



“와인 마시러 가지 않겠어요?”



와인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그 말을 박노해로부터 듣는 게 신기했다. 당시 와인은 대부분의 사람에게 생소하고 사치스럽게 느껴지는 술이었다. 문득 박노해를 만천하에 알려 준 ‘노동의 새벽’이란 시의 첫 구절이 떠올랐다.



전쟁 같은 밤일을 마치고 난

새벽 쓰린 가슴 위로

차가운 소주를 붓는다



이러다간 오래 못 가지

이러다간 끝내 못 가지



그를 따라간 곳은 당시 월드컵 축구대표팀의 히딩크 감독이 자주 간다는 삼청동 ‘콩두’라는 집이었다(이 집은 이후 단골이 되었다).



“좋은 세상 만들려면 내가 좋은 사람 돼야”

박노해는 여순반란사건에 연루된 판소리꾼 아버지와 가톨릭 수녀를 꿈꾸었던 어머니 사이 5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그런 집안 환경 탓인지 형(박기호)은 정의구현사제단을 대표하는 신부가, 여동생은 수녀가 됐다.



6세 때 찾아온 아버지의 죽음, 그리고 가난과 이산가족…. 숱한 고생 끝에 선린상고 야간부를 간신히 졸업한 그는 건설·섬유·화학·금속·운수 현장에서 가혹한 노동조건과 싸우며 노동 운동가의 길을 걸었다.



이때 그는 ‘평화의 기틀이 되라’는 의미인 박기평(朴基平)이란 본명을 버리고 ‘박해받는 노동자의 해방을 위하여’를 줄인 박노해란 이름으로 활동했다.



드디어 87년 군사독재가 종식되고 민주화가 됐지만 그는 도리어 국가반란 수괴가 돼 91년 여름 사형을 구형받는 신세가 됐다. 게다가 절대 진리라고 믿었던 사회주의마저 몰락했다는 소식(소련 붕괴)을 옥중에서 듣고 심한 좌절감을 느꼈다.



재판으로 법정을 드나들던 어느 날 호송차 옆에 앉은 여인이 ‘아이 둘 가진 노동자’라며 말을 걸어 왔다.



“선생님. 저도 노조에 참여하고 가진 자들 욕도 하고 잘못된 세상 확 바꿔야 한다고 했는데 그게 다 도둑놈 마음이었어요…. 제 자신이 먼저 착하고 정의롭지 않고서 어떻게 세상 평화와 정의를 바랄 수 있겠어요. 가진 자들의 이기심과 부정부패는 비판하면서 왜 제 자신의 탐욕과 작은 부정들은 함께 보지 않았을까요….”



그 말에 박노해는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경주교도소로 이감된 후 그의 심신은 급격히 허물어져 갔다. 온몸에 마비가 오고 눈은 실명됐으며 음식도 먹지 못한 채 차디찬 독방에서 누워 몇 달을 보냈다. 그의 귓전에는 그녀가 던진 물음이 계속 메아리쳐 들렸다.



“꼭 묻고 싶은 말이 있어요. 사회주의가 정말 좋은 세상이요, 정의로운 사회라면 누가 힘들게 일하고, 무슨 재미로 살까요? 그런 좋은 사회가 언제 이뤄질까요? 언제쯤 이기적인 우리 노동자와 서민들이 그런 성인(聖人)으로 변화될까요?”



그는 스스로 ‘영원한 패배자’란 절망 속에 빠져 있었지만 마음 한구석에선 “굳은 이념의 틀에 갇혀 이대로 죽기는 싫다”는 아우성이 솟구치고 있었다. ‘모두가 내게 돌팔매를 던질지라도 정직하자.’ ‘좋은 세상을 만들려면 내가 먼저 좋은 사람이 돼야 한다.’



박노해는 이후 7년 동안 무너지고 깨어지는 게 자신의 일이었고 남은 희망이었다고 했다. 그런 과정을 통한 철저한 자기부정과 깨달음….



외부의 적과 투쟁하는 삶을 넘어서 바로 자기 자신과 치열하게 싸우는 것이 진정한 혁명적 삶이요, 스스로도 너무 많은 죄를 지었다는 것을 깨닫는 겸손한 사람으로 변화됐다.



출소한 그는 2000년 어느 날 “과거를 팔아 오늘을 살지 않겠다”고 스스로에게 다짐한 뒤 언론 접촉 등 사회적 발언은 물론 과거 운동권 인사들과의 교류도 일절 끊었다. 대신 그는 사회운동단체 ‘나눔문화’를 설립하고 21세기 글로벌 시대에 인류가 직면한 생태·전쟁·양극화·영혼 등 네 가지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새로운 형태의 운동에 나섰다.



카메라와 만년필로 전하는 평화

박노해를 만난 이후 나는 그가 운영하는 나눔문화에 자주 찾아가 어울리곤 했다. 이곳에선 자급·자립하는 삶의 공동체인 ‘나눔마을’, 빈민촌 아이들과 직접 농사 짓고 좋은 일을 하는 ‘나누는 학교’, 전쟁과 가난으로 고통받는 제3세계 사람들을 돕는 ‘글로벌 평화나눔’ 등 여러 사업을 전개하고 있었는데 나는 ‘나눔문화포럼’에 참여했다.



한 달에 한 번씩 저녁 때 모여 잡곡밥을 함께 먹고 각계 전문가들의 강연을 듣는 슬로 라이프(slow life)의 시간이었다. 강사로는 신해철(가수)·승효상(건축인)·임옥상(화가)·유홍준(미술평론가)·박원순(변호사)·송호근(사회학자)·김재철(기업인)·황병기(국악인)·김진현(언론인)·안철수(IT 기업인) 등이 나왔다. 재원은 회원들의 회비와 박노해 개인의 출판 인세 등으로 충당됐다.



당시는 노무현 정권하에서 우리 현대사에 대한 비판이 심할 때였다. 2005년 신문사를 나온 나는 사무실을 얻어 『한강의 기적』 등 우리 현대사를 긍정하는 내용의 책을 썼다. 출판기념회를 열 때 박노해와 나눔문화 친구들은 초대장을 만들고 음악 영상을 만들어주는 등 도움을 아끼지 않았다.



세월이 다시 흘렀다. 나는 사는 일에 바빠 최근 수년간 박노해를 만나지 못했다. 그동안 박노해는 낡은 카메라와 오래된 만년필을 들고 아프리카·중동·아시아·중남미 등 세계 빈곤 지역과 분쟁 현장을 돌며 그들과 함께 지내며 나눈 이야기를 사진과 글로 전하고, 돕는 운동을 꾸준히 전개해 왔다.



지난 1월 초 나는 인왕산 등산을 마친 후 부암동 길을 지나가다 우연히 박노해의 나눔문화 건물을 발견했다. 신문로에서 이사온 것이었다.



안에 들어가 보니 박노해의 페루 사진전이 열리고 있었다. 해발 3000m 산속에서 잉카제국의 후예들이 살아가는 모습이 박노해의 탁월한 예술적 감성과 영성(靈性)과 어우러져 생생히 나타나 있었다.



박노해의 근황을 물어 보니 최근 산속에 들어가 책을 집필 중이라고 했다. 시나 에세이가 아니라 그동안 고민하고 사유해온 지구 평화와 나눔, 사랑에 대해 집약한 사상서를 준비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마치 오래된 친구 집에 온 편안함을 느꼈다. 전시장 옆 카페에 앉아 차를 마시면서 나는 박노해의 살아온 길을 더듬어 보았다.



어진 천성과 용기·열정 갖춘 박노해

그는 이제 더 이상 진보도 보수도 아닌, 제 3의 길을 뚜벅뚜벅 걸어가고 있다. “인간의 기본을 건너뛰고 나라 경영에는 무능한 채 절대이념에만 목청 높이는 진보 지식인”이나 “자기 먹고살 것은 물론 온갖 기득권·특권 다 누리며 도덕과 법 질서를 떠드는 보수 지식인”들을 경계하라고 말한다. 이 때문에 그는 한쪽에선 변절자요 전향자로, 다른 한쪽에선 위선자요 기회주의자로 배척당하기도 하지만 흔들리지 않고 자기만의 길을 가고 있다.



그에게는 일관된 모습이 있다. 예나 지금이나 약자 편이라는 사실이다. 가난하고 억압받고 불행한 사람들의 편에 서는 것은 아마도 그의 천성(天性)인 듯싶다.



“우리는 위대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위대한 사랑으로 작은 일을 하는 것, 작지만 끝까지 밀어가는 것. 그것이야말로 내가 아는 가장 위대한 삶의 길이다.”



그는 그런 ‘사랑’의 마음으로 이라크·팔레스타인·레바논·쿠르디스탄·다르푸르·아체·인도·파키스탄·라오스·티베트·페루의 오지를 찾아가 때로는 목숨도 위협받는 극한 상황에서도 그들을 도와주는 평화·나눔 운동을 펼치고 있다.



나는 그와 동시대를 살아왔지만 참으로 다른 길을 걸어왔다. 하지만 나는 그의 어진 천성과 정직함, 용기와 열정을 좋아한다. 그가 최근 출간한 사진에세이 『다른 길』을 들춰보다 한눈에 들어오는 구절이 있었다.



“우리 인생에는 각자가

진짜로 원하는 무언가가 있다.

분명 나만의 다른 길이 있다.”






함영준 조선일보 사회부장·국제부장 등을 역임하고 청와대 문화체육관광비서관을 거쳐 평창동계올림픽유치위 부위원장, 한국방송광고진흥공사 전무를 지냈다. 저서로 『나의 심장은 코리아로 벅차오른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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