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Load Image preLoad Image
검색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주요 기사 바로가기
다른 기사, 광고영역 바로가기
중앙일보 사이트맵 바로가기

장메이 미모에 말까지 더듬은 청년장군 린뱌오

1943년 가을, 옌안의 항일군정대학에서 강의하는 덩샤오핑. 작은 의자에 무관심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교장 린뱌오의 모습이 이채롭다. [사진 김명호]
하늘은 공평하다. 산시(陝西)성 북부 산베이(陝北), 황토고원지대의 중심부에 위치한 미즈(米脂)현은 수천 년간 내세울 게 없었다. 대신 미인들이 많았다. 류신민(劉新民·유신민)은 미즈가 배출한 대표적인 미녀였다.

린뱌오(林彪·임표)와 류신민 사이에서 태어난 린샤오린(林曉霖·임효림)도 어릴 때부터 엄마가 미인이라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 “엄마는 옌안(延安)의 꽃이었다. 여자 팔로군(八路軍)에서 제일 예뻤다. 산베이이즈화(陝北一枝花)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공인된 미녀였다. 아버지는 그저 그랬다. 작은 키에 생긴 것도 평범했다. 특별한 매력도 없었다. 거대한 명성 덕에 엄마와 결혼할 수 있었다. 중학생 시절, 친구들이 나보고 린뱌오를 닮았다고 할 때마다 싫었다. 그 애들은 내가 누구 딸인지 몰랐다.”

류신민의 아버지는 공산당 지하당원이었다. 마을사람들과 조세저항 운동을 벌이다 8년 형을 선고받았다. 의지할 곳이 없어진 류신민은 친구 두 명과 함께 소비에트 구역을 찾아갔다. 1935년 가을, 만으로 열다섯 살 때였다.

장메이는 사진을 몇 장 남기지 않았다. 린뱌오와 결혼할 무렵의 장메이.
이듬해 6월, 중공은 류신민의 입당 신청을 받아들였다. 공부를 하고 싶다고 하자 중앙당교(中央黨校)에 입학까지 시켜줬다. 당교 학생 중 나이가 제일 어렸던 류신민은 교장 둥비우(董必武·동필무)의 관심을 끌었다. “총명하고 활달했다. 모르는 건 끝까지 파고들었다. 나이를 먹을수록 용모가 빛이 났다.” 청(淸) 말 과거 급제자에서 무산계급 혁명가로 변신한 둥비우는 류신민이 개명을 원하자 장메이(張梅·장매)라는 예쁜 이름을 지어줬다.

1937년 봄, 홍군군정대학(항일군정대학의 전신) 교장 린뱌오가 중앙당교를 방문했다. 둥비우는 린뱌오를 교실로 안내했다. 필기에 열중하던 장메이는 교장과 함께 들어온 청년이 누군지 관심도 없었다. 린뱌오는 장메이의 미모에 눈이 번쩍했다. 교실을 나오자마자 둥비우에게 황급히 물었다. “나를 쳐다보지도 않던 여학생이 누구냐.” 둥비우는 짐작이 갔다.

린뱌오는 둥비우에게 중매를 서 달라고 정식으로 요청했다. 워낙 늙은이 행세를 하는 사람이라 안심이 안 됐던지 청년단 서기와 장메이가 잘 따른다는 작가에게까지 찾아가 매달렸다. 세 사람의 주선은 주효했다.

이튿날 해질 무렵, 강가에서 서성이던 린뱌오는 장메이가 나타나자 온몸이 얼어 붙었다. 동행했던 작가 청팡위(成仿吾·성방오)가 기록을 남겼다. “린뱌오는 평소에도 말수가 적었지만 이날 따라 말까지 더듬거렸다. 장메이는 평소처럼 명랑했다. 린뱌오는 뭐가 좋은지 웃기만 했다. 노을 덕분에 얼굴이 빨개진 것은 들키지 않았다. 장정 시절 수많은 신화를 남긴 30대 초반의 청년 장군을 거절할 여인은 없었다. 두 사람의 결혼이 전격적으로 성사됐다. 한동안 옌안이 떠들썩했다.”

중상을 입은 린뱌오의 소련길에도 장메이는 동행했다. 모스크바에 도착한 린뱌오 부부는 코민테른 동방부 책임자 쉬제판(徐介藩·서개번)의 영접을 받았다. 쉬제판도 황푸군관학교 출신이었다. 스탈린은 항일영웅 린뱌오의 안전과 요양을 쉬제판에게 일임했다. 장메이는 쉬제판이 미래의 남편이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

쉬제판의 배려 덕에 린뱌오는 하루가 다르게 원기를 회복했다. 1941년 5월, 딸 샤오린이 태어났다.

린뱌오의 소련 생활은 규칙적이고 단조로웠다. 독서와 묵상, 수면 외에는 한눈을 팔지 않았다. 유일한 취미가 지도 보기였다. 세계지도를 펼쳐놓고 밤 새우는 날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운동도 싫어했다. 외출도 거의 안 했지만, 가끔 사냥은 나갔다. 사냥 방법도 특이했다. 허공에 대고 방아쇠를 당길 뿐 산 짐승을 겨누는 법은 없었다. 부권사상(夫權思想)의 추종자였던 린뱌오는 부창부수(夫唱婦隨)라며 장메이에게도 따라 할 것을 요구했다. 젊고 활달한 장메이는 3년간 연일 반복되는 생활에 염증을 느꼈다.

샤오린 출생 1개월 후, 독일이 소련을 침공했다. 코민테른은 모스크바에 체류 중인 중공 간부들의 귀국을 결정했다. 린뱌오도 귀국길에 올랐다.

2007년 가을, 87세의 노인 장메이는 60여 년 전을 담담하게 회상했다. “린뱌오는 당의 고급간부였다. 코민테른의 명령에 복종해야 했다. 당시 중국 공산당은 코민테른의 지부(支部)에 불과했다.” 린뱌오와의 이별 장면도 빼놓지 않았다. “모스크바를 떠나는 날 린뱌오는 내게 신신당부했다. 이곳에 남아서 마오 주석의 부인 허즈쩐(賀子珍·하자진)과 함께 애들을 돌봐라. 내 딸도 부탁한다. 러시아어를 열심히 공부해라. 귀국하면 내 러시아어 통역은 네가 맡아라. 네가 귀국하는 날, 말을 타고 달려가 너를 맞이하겠다.”

옌안에 돌아온 린뱌오는 마오쩌둥(毛澤東·모택동)이 상하이의 영화배우 출신 장칭(江靑·강청)과 결혼한 것을 알았다. 우습게 알던 덩샤오핑(鄧小平·등소평)이 세 번째 결혼에 성공했다는 말을 듣자 생각이 많아졌다. 린뱌오도 항일군정대학 교장에 취임하자 아나운서 출신 예췬(葉群·엽군)과 결혼했다. 귀국 6개월 후였다. 만리 밖에 있던 장메이는 알 턱이 없었다. 모르기는 허즈쩐도 마찬가지였다. <계속>


김명호

구독신청

AD
온라인 구독신청 지면 구독신청

중앙일보 핫 클릭

PHOTO & VIDEO

shpping&life

뉴스레터 보기

김민석의 Mr. 밀리터리 군사안보연구소

군사안보연구소는 중앙일보의 군사안보분야 전문 연구기관입니다.
군사안보연구소는 2016년 10월 1일 중앙일보 홈페이지 조인스(https://news.joins.com)에 문을 연 ‘김민석의 Mr. 밀리터리’(https://news.joins.com/mm)를 운영하며 디지털 환경에 특화된 군사ㆍ안보ㆍ무기에 관한 콘텐트를 만들고 있습니다.

연구소 사람들
김민석 소장 : kimseok@joongang.co.kr (02-751-5511)
국방연구원 전력발전연구부ㆍ군비통제센터를 거쳐 1994년 중앙일보에 입사한 국내 첫 군사전문기자다. 국방부를 출입한 뒤 최장수 국방부 대변인(2010~2016년)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군사안보전문기자 겸 논설위원으로 한반도 군사와 안보문제를 깊게 파헤치는 글을 쓰고 있다.

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