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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정근의 시대공감] 보고서를 던져버려야 하는 이유

2005년 9월 이용훈 대법원장이 던진 취임 화두는 공판중심주의였다. 판사는 공개 법정에서 구두 변론을 통해 유·무죄의 심증(心證)을 형성해야 한다는 원칙이다. 수사기관이 만든 조서에 의존하는 종래의 ‘조서재판’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2006년 9월 일선 법원에 가서 거칠게 말했다. “수사기록을 던져버려야 한다” “변호사들이 만든 서류는 대개 사람을 속여먹으려고 장난치는 것이다”라는 게 요지였다. 검찰과 재야법조계 반발을 샀지만 맥은 제대로 짚었다. 공판중심주의의 정착은 이용훈 사법부의 업적이다.

법정에서는 증인의 표정·눈빛·태도를 직접 보면서 들어봐야 진실을 캘 수 있다. 수사기관의 조서에는 그런 숨소리가 없다. 진정성과 현장성은 글이 아니라 말에서 나온다. 문서는 각자가 구미에 맞게 써내는 것이라는 지적은 정도의 문제이지 대체로 맞는 말이다.

요즘 법정 풍경은 예전과 다르다. 중요하거나 복잡한 사건에서 검사와 변호사가 프레젠테이션(PT) 방식으로 변론하는 장면을 쉽게 볼 수 있다. 예전에 법조인은 공소장, 논고문, 변론요지서, 의견서, 소장, 준비서면, 판결문과 같은 서면(書面)을 잘 쓰는 것이 미덕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법정에서 변론을 잘하는 것이 더 중요해졌다. 법조계가 서면 중심에서 구술 중심으로 옮겨간 것이다. 법정에서 대립 당사자를 설득하면서 원만하게 변론을 이끌어가는 판사의 재판 능력 핵심도 이제는 말하기 실력이다. 판사가 활약하는 주 무대는 고독한 판사실이 아니라 말로 대화하고 소통하는 법정이 되었다. 사회가 글의 시대에서 말의 시대로 바뀌어 갔다. 국어교육도 글쓰기에서 말하기로 중심이 이동했다. 기업체의 입사 면접에서도 PT가 등장했다.

1997년부터 영장실질심사제가 시행됐다. 수사기관의 논리가 적혀 있는 수사기록에만 의존하지 말고 구속영장이 청구된 피의자를 영장 판사가 직접 만나서 그 해명을 들어보고 구속 여부를 결정하자는 것이다. 피의자가 판사를 대면해 직접 소명할 수 있어야 한다는 법관 대면권(對面權)은 피의자가 당연히 누려야 할 헌법적 권리다.

서면이라는 것은 아무리 글자 크기와 글꼴을 달리하고 음영을 넣고 밑줄을 치고 색깔을 바꾼들 어디까지나 글자 모음에 불과하다. 심하게 말하면 속이거나 숨기거나 분식·왜곡·과장·윤색할 수도 있다. 윗사람에게 써서 제출하는 보고서도 결코 다르지 않다. 문서에 적힌 글자와 현란한 보고서의 허상(虛像)만 보고 판단하고 결재하는 것은 그래서 위험하다.

수사기록의 단점을 보완하는 것이 구두 변론이라면, 보고서의 결함을 메워주는 것이 대면보고다. 대면은 보고서가 따라올 수 없는 장점이 있다. 중요 포인트를 강조해 설명하고, 그에 따라 질의응답을 하고, 때로는 하소연도 듣고, 깊이 있는 대화를 하고, 경우에 따라선 설득도 하고, 함께 고민하고 상의하는 그야말로 쌍방향 소통 방식이다. 소신을 펼치는 기회이자 힘을 실어주는 자리, 상호 이해와 공감과 공명(共鳴)의 자리가 되기도 한다. 이리저리 대화를 나누다 보면 묘안이 떠오르기도 한다. 서로에게 피드백이 가능해진다. 토론으로 이어져 브레인스토밍을 하면서 놀라운 해답을 찾기도 한다. 소통과 대화는 힘이 있다.

대면은 반대 논리를 듣고 설득하는 기회이기도 하다. 세종은 어전회의에서 특정 안건이 만장일치가 되면 시행을 보류시켰다. 반드시 간관으로 하여금 반대 논리를 개진토록 했다. 어떤 정책이든 장단점을 면밀히 재본 뒤 시행토록 한 것이다. 대통령도 찬반양론을 듣고 반대자를 설득하는 대면 기회를 많이 가져야 한다. 직언을 들을 자신감이 없는 지도자는 대면을 피한다. 대통령 리더십의 핵심은 설득력이다. 대면하지 않고 설득할 방법은 없다. 찬성 논리만이 아니라 반대 측 논리와 의견을 듣고 설득해야 올바른 결론이 나오고 정책이 실행력을 갖는다.

대통령이 있어야 할 곳은 보고서를 읽고 전화하고 결재하는 외로운 집무실이나 관저가 아니라 누군가를 대면하는 접견실·회의실·안가여야 한다. 대통령직(職)은 집무 중이든, 식사 중이든, 퇴근 후이든 누군가를 대면하고 있어야 할 운명의 자리다. 피의자의 판사 대면권처럼 국민과 여당, 특히 야당·반대자에게는 대통령 대면권이 보장돼야 한다. 권리는 의무와 짝을 이룬다. 피의자 대면이 판사의 의무이듯, 대통령의 국민·반대자 대면은 의무다. 이용훈 식으로 거칠게 말하면 “이제 보고서를 던져버려야 한다.”


황정근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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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