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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를 노래로 배웠네]<5>남자의 눈물 뒤에 감춰진 것은-멍멍이도 진심은 알아본다


▶ 재생 버튼을 누르면 노래를 감상할 수 있습니다. [출처 유튜브]

BGM:
더 클래식, ‘마법의 성’
일기예보, ‘인형의 꿈’

마음에 드는 너


믿을 수 있나요 나의 꿈 속에서
너는 마법에 빠진 공주란 걸
언제나 너를 향한 몸짓에
수많은 어려움 뿐이지만


여기서 퀴즈 하나. 이 노래에서 주인공이 구해야 할 공주가 갇혀 있는 곳은 어디일까? “당연히 마법의 성이지”라고 생각한 당신, 인생 그렇게 단순하게 살면 안 된다. 그게 이 노래의 첫번째 함정이다.

마법의 성을 지나 늪을 건너
어둠의 동굴 속 멀리 그대가 보여
이제 나의 손을 잡아 보아요
우리의 몸이 떠오르는 것을 느끼죠


이제 알았나? 이 가사 속에서 마법의 성은 그냥 주인공이 지나가는 길에 있는 경유지일 뿐이다. 공주가 잡혀 있는 곳도, 공주를 감금하고 있는 용이나 마물이 사는 곳도 아니다. 그런데 왜 노래 제목은 ‘어둠의 동굴’이 아니라 ‘마법의 성’인가? 내 말이 그 말이다.

이 노래의 폐해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이 노래는 감수성 예민한 많은 사내들에게 사랑이라는 것을 하기 위해서는
①쉽게 성취되어서는 안되고
②사랑의 대상은 공주라야 하고
③그 공주는 누군가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있어야 한다는
매우 까다로운 조건을 암암리에 요구하고 있다. 다시 말해 저 노래가 유행하던 시절, 많은 10대 후반, 20대 초반의 젊은이들이 이 노래로부터 ‘아무 위협도 없이, 평탄하게 성장해, 교회 후배나 동네 친구 여동생과 사귀게 되는 것’는 ‘당최 사랑으로서의 로망 따 따위 없는 아무 쓸모 없는 짓거리‘라는 생각을 주입당했다는 말이다.
그 결과 수많은 순진한 젊은 양들은 넘치는 애정을 쏟아 부을 상대로 저 멀리에 있는 흰 살결의 가녀린 공주들(최소한 공주라고 했을 때 일본의 사야코 공주를 상상하지는 않는다)을 꿈꾸게 되었다.

네 옆에는 야수가


꿈꾸는거야 나쁠게 없지만 그 공주들은 내가 구원해 줘야 하는 대상이어야 하므로(공주들 곁에 남자가 없을 리 없잖은가), 자기가 찍은 공주 곁에 있는 남자는 제멋대로 괴물로 만들어 버리고 만다. 형상이 괴물이 아니라면 사악한 주술(스펙?)이나 마법의 반지(돈?)로 공주의 눈을 가리고 있는 존재들일 뿐이다. 뭐 자기 눈엔 그렇게 보일 지 모르지만 공주가 보기엔 그냥 멀쩡한 자기 남자 친구다. 많은 주인공들이 어떤 식으로든 공주에게 자신을 어필해 ‘구원의 손길’을 뻗어 보지만, 객관적으로 보면 이미 공주 곁에 있는 남자친구들은 어떤 면에서든 소위 주인공보다 나으면 나았지 못할 데가 없기 때문에, 이 구원의 손길은 쉽게 무시되곤 한다. 그래서 노래는 자연스럽게 그 다음 곡으로 넘어간다.

그대 먼 곳만 보네요 내가 바로 여기 있는데
조금만 고개를 돌려도 날 볼 수 있을 텐데
처음엔 그대로 좋았죠 그저 볼 수만 있다면
하지만 끝없는 기다림에 이제 난 지쳐 가나 봐


네 뒤에 나 있다


그렇다. 이 노래는 그래도 ’마법의 성‘보다 솔직하다. 왜 ’인형의 꿈‘일까. 소리쳐 자신을 알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왜 알리지 못하나. 입이 안 떨어져서.

꽤 오래 전, 필자에겐 의성이라는 친구가 있었다(당연히 가명이다). 지금은 아니지만 대학생 시절의 의성군은 제법 수려한 풍모에다 유머감각과 상당한 운동 실력까지 갖춘 고급 자원이었다. 어느날 그에게 동아리 후배 A군이 술 한잔을 청해왔다.
A군은 용모며 학벌이며 빠질 데 없는, 장차 한국 과학계를 이끌어 갈 인재였지만 자신의 모든 행동을 일관된 이론으로 설명하지 못하면 납득하지 못하는 약간 답답한 면이 있었다(‘빅뱅 이론’의 셸든으로 가는 초기 상태라고 볼 수 있다). 당연히 20대 여성들에겐 이런 타입이 큰 매력을 갖지 못한다.
A군이 같은 동아리의 B양을 사모하고 있는 사실과, B양이 A군에게 큰 매력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단연 그 동아리의 공주였던 B양은 많은 남자들의 선망의 대상이었으나 예쁜 얼굴과는 전혀 다른 선머슴아 같은 성격으로 주위의 공격을 조기 차단하는 희한한 공력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A군의 내공으로는 쉽지 않은 상대였다.

술 몇 잔이 들어가자 A군은 의성이에게 이런 저런 고민을 털어놓다 마침내 본 의제에 도달했다. 자기는 B를 너무나 너무나 사랑하는데 B는 자신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으며, 자신이 B에게 그 흔한 동아리 동기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게 너무나 너무나 가슴 아프다는, 진정 흔해빠진 연애 상담 내지 한탄이었다. 평소 같으면 좋은 말로 다독거렸을지도 몰랐지만, 마침 날이면 날마다 누군가로부터 이런 상담에 진력이 나 있던 의성이는 그냥 A에게 진짜 인생을 가르쳐주기로 마음먹었다.

“A야, 너 ‘인형의 꿈’이란 노래 아니?”
“그럼요.”
“그 노래 가수 후렴구가 어떻게 되지?”
“한 걸음 뒤엔 항상 내가 있었는데 그댄
영원히 내 모습 볼 수 없나요 워워~~
나를 바라보며 내게 손짓하면
언제나 사랑 할텐데…”
“그래. 바로 그 가사야. 그런데 그 노래에서 ’그대‘가 왜 뒤를 안 돌아보는지 아니?”
“글쎄요…?”
“그건 말이지, 니가 바로 한 걸음 뒤에 있는걸 알기 때문이야.”

심한 충격을 받은 A군은 몸을 부르르 떨었지만 의성이는 그냥 진실을 얘기하기 시작했다. 할아버지, 할머니, 아빠, 엄마, 동구, 동식이, 말순이가 사는 집에 개새끼 한 마리가 있다고 치자. 그 개새끼도 집안 식구 중에서 누구에게 꼬리를 쳐야 할지, 누구를 피해야 할지 다 안다. 그러니까 누가 진심으로 나를 사랑하고, 누가 건성인지는 멍멍이도 안다는 거다. 압축해서, 진심은 강아지도 알아본다. 하물며 사람임에랴.

일부러 안 보는 거 아니지


“…그러니까 어떤 남자가 어떤 여자한테 고백을 하면 여자들은 백이면 백 다 그래. ’어머, 힌트라도 주지. 난 니가 날 좋아할 거라곤 상상도 못 했어‘. 너 그게 가능할 거라고 보냐?”
“가능할 수도 있지 않아요? 뭐 눈치가 없다든가…”
“천만에. 그거 다 개뻥이야. 있을 수 없는 얘기야. 여자들은 산부인과 신생아실에서부터 누가 나한테 눈길을 주는지, 어느 신생아랑 어느 신생아가 썸을 타는지(물론 그 시절엔 없던 말이지만 이해해 주기 바란다) 다 알아. 그게 여자야. 뭐 니가 날 좋아하는지 몰라? 모르는 이유는 딱 하나야. 뭘까? 제발 모르고 싶기 때문이야. 그럼 왜 모르고 싶을까?”
“…그만, 그만 하세요.”

자기 설명에 자기가 도취되어 있던 의성이는 A군이 IQ 160의 수재라는 사실을 잊고 너무 심도 있는 설명을 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바로 입을 다물었지만, 이미 늦었다. 눈물이 그렁그렁하던 A군의 울음보가 터져 버린 거다.

“그래도… 그럼… 그런… 왜… 흐히… 이건… 흐이이흥 흥 흐륵”

남자가 눈물을 억지로 참을 때 내는 기기묘묘한 의성어와 함께 A군은 고개를 숙였고, 닭똥 같은 눈물이 바닥에 뚝뚝 떨어졌다. 닭갈비는 다 타들어갔고, 둘은 그때부터 말없이 소줏잔을 비웠다. 더 있다간 A가 큰 사고를 칠 것 같아 불안해진 의성이는 재빨리 A군을 일으켜 세우고, 얼른 술값을 계산했다. 하지만 돈을 내고 나와 보니 A는 괴성을 지르며 슬레이트로 된 앞집 연통을 부수고 있었다. 의성이는 진땀을 흘리며 “형, 한잔만 더 해요. 나 정말 집에 가기 싫어요. 형 나 돈 많아요. 오늘 알바비 받았어요”하고 외쳐대는 A를 질질 끌고 큰길로 나와, 강제로 택시를 잡아 태우고 나서야 긴 한숨을 내쉬었다.

가수 `일기예보` 입니다.


사실 이날의 술자리는 의성이에게 제법 영향을 미쳤다. 그 동아리의 다른 남자들과 마찬가지로 의성이도 B에게 어느 정도 마음이 있었던 거다. 하지만, A의 그 참상을 보고 난 의성이에게선 B에 대한 마음이 싹 달아났다. 세상에 여자가 어디 하나냐. 만약 그와 B가 커플이라도 되는 날엔… 상상하기도 싫었다. 세상에 어디 여자가 하나냐.

그로부터 꽤 긴 시간이 흐른 뒤, B는 훌륭한 배필을 만나 결혼했다. 누구도 구해낼 수 없을 대괴수 용가리의 품에 안겨 어둠의 동굴 속에 안착한 것이다. A도 ‘한 걸음 뒤에서 늘 A를 바라보던’ 후배와 결혼했다. 그리고 또 꽤 시간이 지난 뒤, 의성이는 몰랐던 진실을 하나 알게 됐다. B가 애당초 그 동아리에 들어온 것이 바로 자신 때문이었고, 몇몇 친한 여자 선배들에게 그걸 상담했으며, 자신만 빼고 꽤 많은 사람들이 - A를 포함해서 -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거였다.

의성이는 비로소 깨달았다. A가 그날 자신을 상담 상대로 선택한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니었음을, 그리고 그것이 바로 잠재적인 ‘어둠의 동굴 속 괴물’이 될 수 있는 자신과 B 사이를 갈라 놓기 위한 선택이었음을. A는 비록 세상 무엇보다 여자를 좋아하지만, 후배 앞에서 안면 깎이는 선배가 되는 것만은 반드시 피하려 할 것이라는 의성이의 특징을 너무나 정확하게 간파하고, 냉철하게 계산된 전략적 행동에 나선 것이었다. 비록 A와 B가 연결되지는 못했지만, STEP 1은 매우 효과적인 성공으로 끝났던 것이다.

그러나 언제나 굳은 다짐 뿐이죠
다시 너를 구하고 말거라고
두손을 모아 기도 했죠
끝없는 용기와 지혜달라고


이 이야기를 들은 날, 그 날은 바로 의성이가 인생을 배운 날이라고 전해진다.

Mahobyungmot@joongang.co.k*r

※필자 이름과 e메일 주소는 글 내용에 맞춰 허구로 만든 것입니다. 이 칼럼은 익명으로 게재됩니다. 필자는 JMNET 가족 중 한명입니다. 연애를 각종 문화 콘텐트로 배운 실화 '연애를 땡땡으로 배웠네'는 매주 금요일 업데이트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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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연구원 전력발전연구부ㆍ군비통제센터를 거쳐 1994년 중앙일보에 입사한 국내 첫 군사전문기자다. 국방부를 출입한 뒤 최장수 국방부 대변인(2010~2016년)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군사안보전문기자 겸 논설위원으로 한반도 군사와 안보문제를 깊게 파헤치는 글을 쓰고 있다.

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