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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희 칼럼] 품격 잃은 전직 대통령의 회고록

김영희
국제문제 대기자
“해도 너무한다.”

 이명박 회고록 『대통령의 시간』에 대한 고위 정책당국자의 강도 높은 비판이다. 고위 관리의 이 말은 이명박 회고록에 대한 박근혜 정부의 경계심을 표현할 뿐 아니라 남북관계가 길고 어두운 터널에서 빠져나오기를 바라는 사람들의 걱정을 대변한다.

 『대통령의 시간』은 이명박 정부 5년 동안 남북한이 벌인 비밀협상의 내용을 무용담처럼 나열하고 있다. 회고록의 북한 부분은 비핵·개방·3000을 기조로 한 이명박 정부 대북정책의 자기합리화,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을 포함한 남북관계 악화에 대한 변명으로만 들린다.

 2009년 10월 임태희 노동부 장관과 북한 통일전선부 부장 김양건이 싱가포르에서 만나 비밀협상을 벌인 부분의 묘사는 특히 “사려 깊지 못한 이명박”의 면모를 보여주는 사례다. 회고록에는 북한이 정상회담의 조건으로 옥수수 10만t, 쌀 40t, 비료 30만t과 국가개발은행 설립 자본금 100억 달러를 요구해 협상이 결렬됐다고 나와 있다. 앞뒤 맥락 없이 북한이 무리한 요구를 한 것처럼 썼다. 그러나 실상 북한의 그런 요구는 우리 측에서 바라던 납북자와 국군포로의 고향방문 간의 교환조건으로 제시된 것이었다. 100억 달러도 정상회담이 성사되고 남북관계가 개선될 경우 한국이 북한의 개발은행 설립에 필요한 외자유치를 돕겠다는 취지였다.

 김양건에 관한 언급은 특히 위태롭다. 김양건은 북한 권력층 내부의 대표적인 대화파다. 『대통령의 시간』은 그가 임태희 장관에게 “합의문 없이 돌아가면 나는 죽는다”고 하소연했다고 썼다. 김정은의 생각 하나에 따라서는 김양건을 벼랑 끝에 몰 수도 있는 내용이다. 김양건이 건재해도 앞으로 물밑이든 물 위든 남한과의 대화에 나오는 북한 대표들이 제2, 제3의 이명박 회고록 같은 사태에 대비해 얼마나 강경한 자세를 취할 것인가는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북한이 연평도를 포격한 것이 2010년 11월 23일이다. 놀랍게도 그로부터 한 달이 채 안 되는 12월 5일 북한의 국정원 격인 국가안전보위부 부부장 류경이 극비리에 서울을 방문했다. 류경은 대통령 면담을 요청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평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는 2011년 초 전 가족과 함께 처형되었다. 『대통령의 시간』은 류경이 처형된 이유가 대통령 면담 실패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류경은 권력투쟁의 최대 라이벌이었던 장성택의 덫에 걸려 처형되었다는 것이 많은 북한 전문가들이 동의하는 가장 유력한 해석이다. 전직 대통령 회고록의 설명이 이렇게 첩보 수준인 것이 실망스럽다.

 『대통령의 시간』에서 가장 비상식적인 부분은 아마도 2012년 1월 10일 베이징 댜오위타이(釣魚臺)에서 원자바오 중국 총리와 가진 만찬대화일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북한에서 젊은 김정은이 권력을 승계해 앞으로 50~60년은 집권할 것이 걱정된다고 말했다. 원자바오는 “그렇지만 역사의 이치가 그렇게 되겠습니까”라고 응수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원자바오의 대답을 이렇게 평가했다. “중국 지도자가 북한의 장래를 두고 그리 오래 참지 않아도 될 것이라는 의미의 발언을 한 것으로 나는 이해했다.” 중국 총리가 김정은 체제가 오래가지 않을 것이라고 예견한 것은 큰 사건이다. 원자바오가 『대통령의 시간』을 읽는다면 반응이 궁금하다. 이건 외교관례에 어긋나는 차원을 넘어 한 나라 최고 지도자에 대한 신뢰와 국격의 문제다.

 2011년 ‘아랍의 봄’을 본 이명박 대통령은 북한체제의 붕괴는 시간문제라고 말하고, 김정일이 정상회담 하자고 애걸한다는 말도 자주 했다. 그러면서도 임기 내내 이명박 정부는 제3차 남북정상회담을 위한 비밀접촉을 계속했다. 이 모순을 어떻게 이해하면 좋은가.

 대통령급의 정치인은 자신의 말 한마디, 글 한 줄이 갖는 무게를 잊지 말고 그 파장을 개념적·전략적으로 고려해야 한다. 이명박 회고록은 그런 고려 없이 썼다는 비판을 받을 만하다. 북한 부분 서술이 객관적인 사실이냐 아니냐를 떠나 박근혜 정부의 대북정책에 부정적으로 작용할까 걱정된다. “해도 너무한다”는 고위 당국자의 한탄도 그런 걱정에서 나왔다. 미국에서는 오바마가 인터넷 보급으로 북한 정권을 무너뜨리겠다고 공언했다. 김정은 권력이 당 중심 온건파와 군 중심 강경파의 균형 위에 유지되는 것이라면 오바마의 강경노선과 이명박 회고록의 북한 관련 ‘폭로’는 평양의 대남 강경파에 힘을 실어주기에 충분하다. OMB(오바마·이명박) 반북동맹이라도 형성된 것인가. 박근혜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이 새해 초에 밝힌 남북관계 개선의 의지가 이런 OMB 공세 앞에 꺾이지 않기를 바란다.

김영희 국제문제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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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