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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뱌오의 결혼 소식에 고향선 “넌 사람도 아니다”

징강산 시절의 전우들과 함께한 린뱌오(앞줄 왼쪽 여섯째)와 마오쩌둥(앞줄 왼쪽 일곱째). 맨 위 ‘징강산의 동지들’은 마오쩌둥이 직접 썼다. 1938년 봄, 옌안. [사진 김명호]
1942년 10월, 전시 수도 충칭에서 시작된 린뱌오(林彪·임표)와 장제스(蔣介石·장개석)의 담판은 하루 이틀에 끝나지 않았다. 9개월간 계속됐다. 아무 결과 없이 옌안으로 돌아온 린뱌오는 항일전쟁이 끝나는 날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마오쩌둥(毛澤東·모택동)이 찾아도 안 갈 때가 많았다. 한동안 죽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린뱌오는 건재했다. 방안에 틀어박혀 군사문제 연구에 매달렸다. 고급간부회에서 ‘신병 훈련과 포로의 활용’에 관한 논문을 발표해 주목을 끌었다. 마오쩌둥이 “역시 린뱌오다. 뭘 하든 확실한 결과물이 있다”며 싱글벙글할 정도였다. 예췬(葉群·엽군)과의 결혼도 자기 일처럼 좋아했다.

린뱌오와 예징이(葉靜宜·예정의, 예췬의 본명)가 언제, 어떻게 만났는지는 아는 사람이 없다. 린뱌오의 성격상 예췬이 먼저 접근했다고들 하지만 추측에 불과하다. 딸 도우도우(豆豆, 본명:林立衡)가 1944년생인 것을 보면 충칭에서 장제스와 담판을 마친 후 옌안에서 처음 만난 것은 확실하다.

예췬은 린뱌오의 둘째 부인이었지만 린씨 집안 족보(林氏宗譜)에는 린뱌오의 이름 밑에 왕징이(汪靜宜·왕정의), 류신민(劉新民·유신민), 예췬 등 세 명의 여인이 등장한다.

문혁 시절, 천안문 성루의 예췬(오른쪽 첫째). 왼쪽 끝이 마오의 딸 리나(李納), 한 사람 건너 린뱌오와 예췬의 딸 도우도우(林立衡).
첫 번째 이름을 올린 왕징이 옆에는 ‘빙처(聘妻)’ 두 자가 붙어 있다. 聘은 정혼은 했지만 정식으로 식은 올리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이런 경우 이름을 올리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린뱌오는 왕징이를 배려했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왕징이는 1907년 12월 6일, 린뱌오와 같은 마을에서 거의 같은 시간에 태어났다. 왕징이의 집안은 대지주였다. 지금도 떠도는 얘기가 있다. “왕징이의 집은 쑤저우(蘇州)의 정원들이 무색할 정도로 고대광실이었다. 워낙 커서 관리가 불가능했다. 도둑놈 두 명이 한 달간 별짓 다하며 숨어 있어도 발견하지 못할 정도였다. 왕징이는 오관이 단정하고 피부가 백설 같았다. 몸가짐도 우아했다. 문맹인 게 흠이었다.”

두 집안은 세교(世交)가 있었다. 하루는 왕징이의 부친이 술 취한 김에 사돈을 맺자고 제의했다. 1914년 정월 초사흗날 린뱌오의 집에 어른들끼리 모여 정혼잔치를 열었다. 린뱌오와 왕징이가 여덟 살 때였다. 양가의 부모들은 애들끼리 만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정혼 10년 후, 황푸군관학교에 입학한 린뱌오는 안목이 넓어졌다. 얼굴 한 번 못 본 여자가 부인이라는 생각이 들 때마다 황당하고 웃음이 나왔다. 교관이나 동기생들이 결혼 얘기를 나누면 자리를 피했다.

군관학교 졸업 후, 우한(武漢)에 주둔하던 린뱌오는 집 생각이 났다. 아버지에게 잠시 들르겠다는 편지를 보냈다. 부모들은 이참에 신방을 차려주자며 마음이 급했다. 왕징이의 아버지는 잔치에 쓸 돼지 99마리를 목욕시켰다.

고향에 온 린뱌오는 부모가 시키는 대로 했다. 예물과 왕징이에게 줄 비단을 싸 들고 장인을 찾아갔다. 환대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잘 왔다. 혼일 날짜를 정했느냐?” 린뱌오는 준비했던 대답을 했다. “4일 후 돌아가야 합니다. 혼사를 치를 겨를이 없습니다.” 한동안 침묵하던 장인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네 부친은 어릴 때부터 나와 친분이 두터웠다. 그래서 너희들의 혼인도 수락했다. 너는 책을 많이 읽은 사람이다. 절대로 부모들을 난처하게 만들지 마라. 간절히 부탁한다. 내 딸의 청춘을 엉망으로 만들지 마라.” 린뱌오는 장인을 안심시켰다. “북벌전쟁이 끝나면 식을 올리겠습니다.”

남자가 혼례품 싸 들고 여자 집을 찾으면 결혼을 한 거나 다름없었다. 왕징이는 문틈으로 몰래 린뱌오를 훔쳐봤다. 멋진 군복에 생김새도 그럴듯했다.

군문으로 돌아온 린뱌오는 폭동에 참가했다. 실패한 폭동이었다. 패잔병들과 함께 징강산(井岡山)에 들어갔다. 후난(湖南)에서 폭동을 일으키고 도망 왔다는 마오쩌둥을 처음 만났다. 마오쩌둥은 린뱌오를 좋아했다. 멀리서 보면 먼저 달려와 손을 잡았다.

장정 시절 린뱌오는 마오쩌둥을 끝까지 추종했다. 워낙 개성이 강한 사람들이다 보니 충돌도 잦았다. 보기 싫다며 안 볼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결정적인 순간에는 서로를 두둔했다. 마오쩌둥은 위기에 처했을 때마다 린뱌오를 그리워했고, 린뱌오는 부르지 않아도 달려왔다.

장정을 마친 린뱌오는 2차 국공합작에 성공하자 항일군정대학 학생 류신민과 결혼했다. 고향에 결혼소식을 알렸다. “너는 사람도 아니다”는 답장을 받았다. 장인은 화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옌안 최고의 미인이었던 류신민은 린뱌오와 성격이 판이했다. 노래도 잘하고 춤도 잘 췄다. 린뱌오의 총상 치료를 위한 소련행도 함께했다. 린뱌오는 소련 측의 만찬 초청이나 댄스파티에 한 번도 응하지 않았다. 류신민의 외부 출입도 금지시켰다.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가 그러지 말라고 말려도 막무가내였다. 류신민이 “너 같은 괴물과는 도저히 못 살겠다”고 하자 린뱌오는 이혼을 선언하고 혼자 귀국했다. 소련에 남은 류신민은 린뱌오의 군관학교 후배와 가정을 꾸렸다.

린뱌오와 결혼한 예징이는 왕징이의 얘기를 들었다. 이름이 같아서 기분 나쁘다며 예췬으로 개명해 버렸다. 왕징이는 한 번 문틈으로 본 린뱌오를 평생 잊지 못했다. 다른 사람과 결혼을 권해도 절대 듣지 않았다. 많은 일화를 남겼다. (계속)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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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연구원 전력발전연구부ㆍ군비통제센터를 거쳐 1994년 중앙일보에 입사한 국내 첫 군사전문기자다. 국방부를 출입한 뒤 최장수 국방부 대변인(2010~2016년)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군사안보전문기자 겸 논설위원으로 한반도 군사와 안보문제를 깊게 파헤치는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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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