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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에서 3·1, 2·8 선언보다 앞선 ‘무오독립선언’ 있었다

31일 중국 선양에서 열린 ‘무오독립선언’ 기념식에서 교민 대표들이 96년 전 독립운동 지도자 39명의 명의로 발표된 대한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고 있다. 이날 기념식은 당시 선언서의 발표현장인 중국 동북지역 교민들이 참석한 첫 공개행사다. 300여 명의 교민과 재중동포들이 행사장을 가득 메웠다. [선양=예영준 특파원]
대한독립선언서는 지린성 지린시에서 발표된 것으로 추정되지만 구체적인 장소에 대해서는 아직 정확한 고증이 이뤄지지 않았다. 지린성 허룽시에서 발표됐다는 설도 있다.
기미년(1919년) 3·1 운동을 모르는 한국인은 없다. 그에 앞서 일본 도쿄에서 있었던 2·8 독립선언도 널리 알려져 있다. 춘원 이광수를 비롯한 일본 거주 유학생들이 발표해 3·1 운동에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역사교과서에 수록돼 있기 때문이다.

잊혀진 2·1 독립선언 재조명 목소리

 이와 별도로 해외의 독립운동가 39명이 중국 만주에서 발표한 독립선언문이 있다. 일명 ‘무오독립선언’이라고도 불리는 대한독립선언서다. 시기적으론 3·1과 2·8에 앞선다. 1919년 2월 1일 발표된 이 독립선언문은 당시 해외 독립운동의 거점이던 만주와 연해주, 국내와 일본은 물론 멀리 미국에까지 배포됐다. 독립기념관엔 당시 배포된 선언문 원본이 소장돼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사실을 아는 일반인은 극히 드물다. 교과서는커녕 학계에서도 본격적으로 연구한 결과물을 찾기 어렵다. 취재 과정에서 만난 대부분의 일반인은 “처음 듣는다”는 반응을 보였고, 국회도서관이나 각종 학술자료 데이터베이스를 검색해도 관련 논문이 손가락으로 헤아릴 정도다. 그러니 ‘잊혀진 독립선언’이나 마찬가지다.

96년 전 중국 만주에서 발표된 무오독립선언서. [사진 독립기념관]
중국 교민들 96년 만에 모여 만세삼창
이런 상황을 안타까이 여긴 옛 만주지역인 중국 동북 3성의 교민들이 31일 선양(瀋陽)에서 기념행사를 열었다. 당시의 독립선언 현장을 삶의 터전으로 삼고 있는 교민 300여 명이 다시 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삼창을 하며 선열들의 뜻을 기린 것이다. 빼앗긴 나라를 되찾은 지 70년, 선언서가 발표된 지 96년 만의 일이었다.

 국한문 혼용체로 35행 1723자로 이뤄진 대한독립선언서는 당대의 문장가로 이름 높던 조소앙(趙素昻·본명 조용은·1887∼1958) 선생이 작성한 것으로 전해진다. 조소앙은 임시정부 창설에 관여한 뒤 외무부장을 지냈으며, 삼균주의를 주창한 독립운동가다. 대종교 2대 교주를 지낸 김교헌이 작성했다는 설도 있지만 학계에선 조소앙 기초설을 정설로 본다. 그가 남긴 자서전과 선언서 배포 책임자였던 정원택이 남긴 기록에 따른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이 막을 내리던 1918년, 조소앙은 한국 독립에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다고 판단한 독립운동가 중 한 사람이었다.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이 주창한 민족자결주의의 기운이 무르익는 것을 비롯, 국제 정세에 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만주로 가 흩어져 있던 독립운동가들을 규합했다. 조소앙은 1917년에도 독립운동 진영의 단결을 호소하는 ‘대동단결선언’을 발표한 적이 있다. 그의 노력이 맺은 결실이 1919년 1월에 창설된 무장투쟁단체인 대한독립의군부였다. 몽양 여운형의 숙부인 여준(呂準)이 주석을 맡고 자신은 부주석을 맡았다. 그 뒤 의군부 간부들이 역할을 분담해 만들고 배포한 문서가 바로 대한독립선언서다. 박용만은 이를 영문으로 번역해 하와이에까지 배포했다. 오늘날 영문본이 하버드대 옌칭연구소 등에 전해 내려오는 이유다.

서명인 중 친일 시비 논란 한 명도 없어
대한독립선언서는 3·1 독립선언이나 2·8 독립선언과 뚜렷이 구별되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우선 3·1 독립선언이 국내에 있던 민족 대표 33명에 의해 이뤄진 것인 데 반해 해외 독립운동가들에 의해 이뤄졌다는 점에서 주목을 끈다. 선언서에 서명한 39명의 면면을 보면 당시 해외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 지도자로 이름 높은 명망가들이 모두 망라돼 있다. 김규식·김좌진·박은식·신채호·안창호·이동녕·이승만·이시영 등 쟁쟁한 인사들이 참여했다. 이들 가운데 의군부에 관여하거나 만주지역에서 활동하던 사람들은 직접 독립선언서 작성에 참여했고 나머지 인사들은 간접적으로 참여했을 가능성이 크다. 조소앙 선생의 조카인 조만제 삼균학회장은 “당시 상황으로 볼 때 39명이 모두 한곳에 모이는 건 불가능했다”며 “미주에서 활동하던 안창호·이승만 등 일부 서명자는 사전·사후 연락을 통해 서명에 동의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특히 주목할 만한 사실은 39명 가운데 친일파 시비에 오르내린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는 점이다. 2·8 독립선언문을 작성한 이광수나 민족 대표 33인 가운데 최린·최남선 등 일부 인사가 훗날 친일 행적으로 문제된 것과는 대조적이다. 이번 교민 기념식의 기획에 참가한 김영식 한중문화교류원장은 “무오독립선언 참가자 일부는 독립운동에 투신하다 순국했고 나머지 분들 중에서도 단 한 분 변절한 사람이 없다”고 말했다.

 독립운동사 연구자들이 특히 가치를 두는 건 선언서의 내용이다. 3·1 독립선언이나 2·8 독립선언에 비해 훨씬 신랄하게 일제의 침략을 비판하고 더 선명하게 독립의지를 표출했으며,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방안으로 무장투쟁 노선을 명확하게 제시했기 때문이다. 내용의 일부를 소개하면 이렇다. “궐기하라 독립군! 한번 죽음은 사람의 면할 수 없는 바인즉, 개·돼지와도 같은 일생을 누가 원하는 바이리오, 살신성인하면 2000만 동포와 동체로 부활할 것이니 일신을 어찌 아낄 것이며 집안이 기울어도 나라를 회복하면 삼천리 옥토가 자가의 소유이니 일가를 희생하라.”

 일제 침략 이전의 원상회복을 촉구한 “섬은 섬으로 돌아가고, 반도는 반도로 돌아오고, 대륙은 대륙으로 회복할지어다”란 부분은 안중근 의사의 동양평화론과 맥이 닿는다. 선언서의 압권은 맨 마지막 문장이다. “육탄혈전으로 독립을 완성할지어다.” 곧이어 창설되는 상하이 임시정부와 미주의 일부 독립운동가가 외교에 의한 독립과 실력 양성론을 주장한 것과 분명한 차이를 보인다.

항일 무장독립투쟁의 시발점 평가
서굉일 한신대 명예교수는 “대한독립선언서는 시기가 앞섰다는 점도 중요하지만 그 참된 가치는 내용에 있다”며 “청산리 전쟁이나 봉오동 전투 등 훗날 동북지역 무장독립투쟁의 빛나는 성과로 이어지는 그 출발점이 바로 이 선언서”라고 평가했다. 그는 수없이 많은 독립운동 관련 문서 중에서 단재 신채호가 쓴 ‘의열단 선언문’과 함께 이 대한독립선언서를 가장 가치 있는 문서로 꼽았다.

 이 같은 평가에도 불구하고 대한독립선언서에 대한 학계의 연구는 일천한 편이다. 기초적인 사료가 많이 남아 있지 않다는 게 1차적인 원인이다. 조소앙 자전이나 정원택의 일지 등을 제외하면 1차 사료가 거의 없다. 당시 국내외 신문에도 일절 보도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연구자들은 의군부를 중심으로 독립선언서를 작성·인쇄해 배포한 것 이외에 별도의 군중 집회를 하거나 만세운동으로는 연결되지 않은 것으로 보기도 한다. 의군부가 비밀결사의 성격을 갖고 있기에 공개행사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 독립선언 장소가 중국 영토이다 보니 한·중 수교전에는 현지조사를 통한 자료 발굴이나 연구가 이뤄지기 어려웠다.

 독립운동사를 보는 관점의 차이를 지적하는 견해도 있다. 서 교수는 “역사교육 현장에서는 상하이 임시정부를 중시하고 동북에서의 항일투쟁은 소홀히 다뤄지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우리 역사교과서가 항일무장투쟁을 소홀히 취급하게 된 배경에는 김일성 등 북한 정권을 건국한 세력이 무장투쟁을 강조한 데 대한 반작용 성격이 있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다.

 상황이 이러하다 보니 앞으로 학계가 풀어야 할 숙제로 남아 있는 부분이 적지 않다. 기본적인 사실관계가 아직 명확하지 않거나 학계에서 의견 일치가 이뤄지지 않은 부분이 있다. 선언서 작성 혹은 발표 장소에 대한 고증이 아직 이뤄지지 않았다. 학계에선 ‘길림성성(吉林省城)’이란 지명이 조소앙 자전에 기술된 것을 근거로 지린성 지린시로 보는 시각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지린성 허룽(和龍)현의 대종교 총본사를 발표 장소로 보는 연구자도 있다.

 실제로는 기미년인 1919년에 발표됐지만 그 명칭이 ‘무오독립선언’으로 알려진 데 대해서도 충분한 검증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있다. 1919년 2월 1일이 음력으로는 1918년 무오년이어서 무오독립선언으로 불려 왔다고 하나 실은 이날을 양력으로 환산하면 1919년 1월 1일이 된다. 이에 대해 조만제 회장은 “무오년인 1918년에 동지 규합 등 준비작업을 거쳐 1919년에 발표된 것으로 보면 무오독립선언으로 불러도 문제가 없다”고 말했다.

 더 나아가 선언서에 기재된 1919년 2월은 음력으로 봐야 하며, 따라서 실제 날짜는 1919년 3월 11일이란 연구논문이 나와 논쟁을 일으킨 적도 있다. 하지만 조소앙이 남긴 글 가운데 “나는 당시 길림에서 김좌진·황상규 등 동지와 대한독립의군부를 조직하고 독립선언서를 발표하는 등 독립운동에 몰두하고 있었는데 연락원으로 나경석씨가 국내 독립선언서의 기초를 가지고 와서 국내 정세를 알게 되었다”는 표현에 따라 학계에서는 3·1 운동보다 앞서는 양력 2월로 보는 게 일반적이다. 보훈처도 양력 2월 1일을 발표일로 삼고 있다.

 39명 중엔 널리 알려진 명망가들이 대부분이지만 당시의 활동 내용이나 행적에 대한 조사 연구가 미흡한 인사도 있다. 심지어 이름만 남아 있고 얼굴 사진조차 남아 있지 않은 경우도 있다. 김영식 원장은 “기념식 준비 과정에서 보훈처를 비롯, 백방으로 조사를 했지만 아직 열 분의 사진을 찾지 못했다”고 말했다.

 동북지역 교민들이 본격적인 기념식을 하게 된 배경에는 잊혀져 가는 독립선언을 재조명하고 학계의 관심을 촉구하는 측면도 있다. 김성웅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선양협의회장은 “광복 70년을 맞아 개최한 이번 기념식이 보다 많은 연구가 이뤄지고 그 의미가 제대로 평가받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며 “앞으로 동북지역에서 무오독립선언 기념식을 정례화하겠다”고 밝혔다.


선양(중국)=예영준 특파원 yyjune@joongang.co.kr

포함의 아픔을 아직도 그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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