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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기의 ‘바이오 토크’] ‘수퍼 확산자’ 구제역이 에볼라보다 무서운 이유

돼지를 밀집 사육하는 양돈장의 축사. 가축을 너무 비좁게 키우는 게 구제역 확산의 한 원인이다. 구제역 바이러스에 대한 면역력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영화 ‘양들의 침묵’(1991)은 아카데미 5개 부문 수상의 범죄스릴러다. 엽기적 연쇄살인범을 쫓는 미연방수사국(FBI) 요원은 교도소에 있는 또 다른 사이코 살인자인 정신과 의사에게 제안한다.

연쇄살인범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면 ‘플럼 섬(Plum Island)’으로 휴가를 보내주겠다고 말이다. 그러자 사이코 정신과 의사인 한니발 렉터는 “탄저균 섬엔 왜 가느냐”며 제안을 일축한다. 도대체 플럼 섬은 어떤 곳이기에 FBI가 관리하고 또 세균전 무기인 탄저균은 무슨 말인가.

플럼은 미국 뉴욕의 롱아일랜드에서 2㎞ 떨어진 섬이다. 여의도 면적만 한 이곳은 외부인 출입금지다. 이 섬엔 미국 정부 소속의 구제역 연구소가 있다. 미국에서 유일하게 구제역 바이러스 관련 실험을 할 수 있는 곳이다. 외부와 완벽하게 격리돼야 할 만큼 구제역은 위험한 동물 바이러스다. 냉전 시대엔 세균전에 사용할 무기의 하나로 구제역 바이러스를 이곳에서 연구했다. 구제역 바이러스는 소·돼지 사이에서 쉽게 퍼져 하루 만에 발열(發熱), 일주일 내에 50% 이상을 죽이는 무서운 병원체다. 설령 살아남더라도 제대로 성장하지 못한다. 짧은 시간에 한 나라의 축산 기반을 통째로 흔들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가축용 세균전 무기다. 세균전 무기인 탄저균도 만들었을 거란 일부의 추측 때문에 플럼 섬은 ‘탄저균 섬’이란 누명을 썼다.

최근 충청·경기 지역의 구제역이 확산일로에 있다. 2011년 331만 마리의 가축을 땅에 묻은 악몽이 재현될 수 있어 심히 우려스럽다. 구제역은 1980년대만 해도 낯선 병명이었지만 최근엔 자주 발생하고 있다. 동물계의 두창(천연두)에 해당하는 것이 구제역이다. 동물 바이러스의 폭풍 전야인가. 우리 가축들을 지킬 방안은 무엇인가.

구제역 병원체 피코르나바이러스(picornavirus). 구제역 바이러스는 불안정한 RNA 바이러스의 일종이므로 그만큼 변종(變種)이 잘 생긴다. 변종이 많을수록 백신의 예방효과는 떨어진다.
영국 자동차 경주 딱 한 번 거른 원인
2011년 1월 충남 성환 소재 국립축산과학원에 비상이 걸렸다. 근처 농가에서 구제역이 발생한 것이다. 연구소 측은 즉시 연구소 건물과 소·돼지 사육장을 봉쇄했다. 연구소와 통하는 유일한 출입도로를 폐쇄하고 수천 마리의 가축과 함께 100여 명의 연구원도 자발적으로 외부와 자신을 격리시켰다. 먹는 음식은 완전 소독한 후 반입했다. 그렇게 100일을 버텨냈다.

당시 전국을 덮친 구제역으로 수백만 마리의 돼지가 묻히고 2조7000억원이 날아갔다. 경제 피해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충북 진천 지역 돼지 10마리 중 9마리가 사라져 양돈 산업 자체가 붕괴되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구제역 청정국가’에서 ‘발생국가’로 분류돼 한국 내 모든 돼지고기·쇠고기의 해외 수출 길이 막혔다. 설상가상으로 돼지고기도 안 팔렸다. “익혀 먹기만 하면 된다”면서 장관까지 나와서 직접 고기를 구워 먹는 장면을 연출했지만 삼겹살집은 썰렁하기만 했다. 가축이 죽어나가고 수출이 막히며 고기가 팔리지 않는 삼중고(三重苦)에 축산농민은 속이 시커멓게 타들어갔다. 이런 대재앙급의 구제역은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영국 자동차 경주대회는 1958년 시작된 57년 전통의 국제대회다. 그러나 딱 한 번 이 경기가 취소됐다. 바로 구제역이 발생한 2001년이다. 영국에서 봄에 시작된 구제역은 2000개 농장으로 퍼졌으며 1000만 마리의 소·양·돼지가 희생됐다. 피해액만 12조원에 달했다. 축산 선진국인 영국에서도 대규모로 발생할 만큼 대단한 전파력(감염성)을 가진 것이 구제역 바이러스다.

구제역은 지구촌 전체에서 해마다 6조~21조원의 피해를 입히는 범(汎)세계적인 가축질병이다. 병명인 구제역(口蹄疫·Foot-and-Mouth Disease)은 입(口)과 발굽(蹄)에 물집이 생기는 질병(疫)이란 의미다. 발굽이 두 개로 갈라진 돼지·소·말 등 80여 종의 동물을 감염시키지만 사람은 안전하다. 처음 세상에 보고된 1897년 이후 전 세계에서 간간이 발생했지만 2000년대 들어 그 빈도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국내에선 오랫동안 생소한 질병이었다. 그런데 왜 구제역이 활개를 치게 된 것일까. 구제역 발생은 밀집된 사육환경, 높은 감염력, 빠르게 변하는 바이러스의 특성 탓이다.

사육평수 늘리는 ‘가축 웰빙’이 대안
70년대 지방 소도시에 살던 필자는 뒤뜰에 있던 돼지 다섯 마리에게 밥을 주는 일이 주요 일과였다. 동네 가정집에서 모아온 음식 찌꺼기에 쌀겨를 버무려 주었다. 같은 초등학교에 다녔던 여학생 집만 애써 피해 다닌 기억은 있지만 돼지가 병에 걸려 죽은 기억은 없다. 당시의 양돈이 농가의 소규모 부업 형태라면 지금은 대규모 기업형 농장 형태다. 10년 전에 비해 양돈농가의 수는 40%로 줄었지만 1만 마리 이상을 키우는 대규모 농장은 2.3배나 늘었다.

대규모 사육이 이뤄지면서 돼지 한 마리당 허용된 공간이 좁아졌고 이로 인해 돼지들의 면역력도 약해졌다. 감염 돼지 1마리가 2000마리를 감염시키는 것이 구제역 바이러스다. 이런 바이러스가 돼지들이 밀식된 한 농장을 순식간에 초토화시키는 것은 이미 예견된 일이었다. 밀식해 키우면 생산성은 높아지지만 그만큼 감염병에 취약해진다. 따라서 이젠 사육방식의 개선을 고민할 때다. 가축의 사육평수를 늘려 면역력을 높이자는 최근의 ‘가축 웰빙’ 방안이 눈길을 끈다.

에볼라 바이러스는 우주복처럼 입고, 금고처럼 생긴 완전 밀폐된 실험실에서만 다룬다. 구제역도 마찬가지다. 미국·영국 등 축산선진국도 지정된 한 곳의 연구소에서만 구제역 바이러스 연구를 허용한다. 국내에도 농림축산식품부 산하인 농림축산검역본부 내 국제기준을 갖춘 구제역 연구실이 유일하게 허가·설치돼 있다. 에볼라의 치사율이 높다고 하지만 감염은 오직 신체나 배설물 접촉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이와 달리 구제역 바이러스는 감기처럼 공기를 타고 이동할 수 있다.

구제역 바이러스는 죽은 돼지에서도 나온다. 죽어서 호흡과 배설을 멈췄는데 어디서 바이러스가 나올까. 2011년 미국 로런스 리버모어 국립연구소는 피부 각질이 원인임을 밝혔다. 떨어져 나온 각질은 먼지 형태로 날아가 축사 곳곳에 퍼진다. 이곳을 다녀간 사람의 옷에 묻고 차량에 붙어 먼지처럼 퍼진다. 따라서 한번 구제역이 발생된 농장은 완전 차단하고 거리를 충분히 둬야 먼지를 타고 바이러스가 퍼지지 않는다. 문제는 국내에선 많은 돼지·소 농장이 도로 근처에 촘촘히 몰려 있다는 사실이다. 구제역 바이러스가 쉽게 퍼질 수 있는 환경이다. 잘 퍼질 수밖에 없는 국내 환경이라면 사전에 대비할 방법은 없는가. 예방백신을 접종해 미리 막을 수는 없을까.

필자는 해마다 독감(인플루엔자) 예방주사를 맞는다. 하지만 이맘때 가끔 독감에 약하게 걸려 고생한다. 독감 바이러스가 자주 자신의 모습을 변형시켜 독감 백신의 효과를 떨어뜨린 결과일 것으로 여겨진다. 독감이나 구제역 바이러스는 유전자의 종류가 DNA가 아니라 RNA다. 불안정한 RNA의 특성 때문에 변종(變種)이 수시로 생긴다. 현재까지 7종의 구제역 바이러스가 밝혀졌지만 같은 종(種) 내에서도 유전자 순서가 30%까지 다른 변종들이 존재한다. 만약 이 변종 구제역 바이러스가 돼지나 소의 몸에 침입하면 구제역 예방백신의 효율(효과)은 떨어지게 마련이다.

구제역 백신의 예방 효과가 절대 100%가 될 수 없다는 사실 외에도 구제역 백신을 놓으면 돼지 수출 재개 기간이 그만큼 늦춰진다는 문제가 있다. 이유는 백신을 맞은 돼지 속에 남은 ‘죽인 바이러스(백신)’와 실제 구제역을 일으킨 ‘살아 있는 구제역 바이러스’의 구분이 쉽지 않아서다. 또 어떤 돼지는 구제역 백신 때문에 바이러스가 성장하진 못하지만 바이러스 자체는 계속 몸에 지니는 이른바 ‘보균(保菌)’ 상태를 보인다. 따라서 백신을 접종하면 구제역이 사라진 후에도 일정 기간이 지나야 안심할 수 있는 ‘청정국가’가 될 수 있다. 정부가 가능한 한 백신을 쓰지 않고 구제역을 잡으려 하는 것은 그래서다.

보통은 구제역이 발생하면 먼저 해당 농장을 차단·격리하고 그 반경 500m의 가축을 살(殺)처분해서 백신 없이 버텨보려 한다. 그래도 확산이 계속되면 백신 사용이 불가피해진다. 구제역 백신도 접종 후 돼지 등의 몸에 항체(抗體)가 생기려면, 다시 말해 효과를 보려면 얼마간 시간이 걸린다. 따라서 어떤 시점에 얼마의 범위로 어떤 백신을 사용할 것인가가 구제역 백신 정책의 핵심이다. 예방을 넘어서 지구상에서 구제역을 아예 없애버리는 방안은 없을까.

구제역 대처에 성과를 거두려면 바이러스를 초기 검출해 조기 대응해야 한다. 축산 농가에서 쉽게 사용할 수 있는 진단 키트의 개발과 보급이 중요한 이유다.
농부도 쉽게 다룰 진단 키트 개발 중
2001년 2월 19일 영국 정부에 급보가 날아왔다. 런던 근교의 한 도축장에서 발굽에 수포가 있는 돼지가 발견됐다는 것이다. 돼지 공급 농장을 역(逆)추적해 보니 도축장에서 500㎞ 떨어진 ‘번사이드’ 농장이었다. 해당 농장은 구제역에 모두 감염된 상태였다. 발병 시기는 이미 3주 전이었다. 영국의 가축 방역당국은 발생 농장을 격리·차단하고 살처분을 시작했다. 하지만 구제역은 이미 가축ㆍ사람ㆍ차량을 타고 도로를 통해 3주 동안 영국 전역으로 번지고 있었다. 엄청난 피해를 부른 2001년 영국의 구제역 파동은 초기 대응에 3주나 걸린 것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이처럼 초기대응이 구제역 해결의 열쇠다.

최근 연구 결과에 따르면 구제역·조류 인플루엔자(AI)·에볼라 등 모든 고(高)감염성ㆍ고위험성 감염병의 확산을 막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바이러스를 최대한 빨리 검출해 신속하게 대응하는 것이다. 구제역의 경우 입·다리에 수포가 생기는 실제 증상을 보고 가축의 격리를 시작하면 너무 늦다. 증상이 나타나기 전에 구제역 바이러스는 이미 외부로 퍼져 나오기 시작해 다른 돼지들을 감염시키기 때문이다. 따라서 최대한 일찍 바이러스를 검출한다면 퍼지기 전에 가장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다. 구제역 조기 발견의 핵심 기술은 현장에서 농부도 쉽게 사용할 수 있는 진단 키트(kit)다. 바이오 나노 칩(bio nanochip)은 손톱만 한 칩에 가축의 피 한 방울만 묻히면 구제역 바이러스 여부를 수분 안에 검사할 수 있는 도구다. 농림축산검역본부도 2011년부터 구제역 진단 바이오칩을 개발하고 있다. 여기에 스마트폰이 결합되면 금상첨화다.

『바이러스 폭풍』의 저자인 미국의 바이러스 학자 네이선 울프는 “지금은 바이러스 폭풍(viral storm)이 올 완벽한 조건이 갖춰졌다”고 기술했다. 구제역이야말로 전 세계를 무대로 활동하는 가축 바이러스다. 항공기 승객 모두가 바이러스를 하루 만에 지구 반대편으로 옮길 수 있는 ‘수퍼 확산자’다. 또 먼 나라의 가축 부산물도 사료로 수입해서 쓰는 지구촌(村)에 살고 있다. 전 세계적인 공동 대응 없이는 어느 나라도 안심할 수 없다. 구제역은 동물계의 두창과 같다. 과학기술의 발달로 인류가 박멸시킨 두창처럼 구제역도 지구상에서 완전히 없앨 수 있다.



김은기 서울대 화공과 졸업. 미국 조지아텍 공학박사. 한국생물공학회장 역임. 피부소재 국가연구실장(NRL) 역임. 인하대 바이오융합연구소(www.biocnc.com)와 한국과학창의재단에서 바이오테크놀로지(BT)를 대중에게 알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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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