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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戰 전투병 파병의 빛과 그늘 - “50년 전 베트남 참전 정신으로 국가적 어려움 이겨내야”

2015년은 한국이 해외에 전투병을 파병한 지 50년이 되는 해이다. 베트남 파병은 1964년 9월 의료진과 태권도 교관 파병을 시작으로 1965년 8월 13일 제52회 임시국회 본회의에서 전투병 파병안이 통과돼 그해 10월 9일 해병대 청룡부대가 전투병으로는 처음으로 베트남에 상륙한다. 당시 청룡부대에서 소대장으로 활약한 4명의 인사가 전우들이 묻힌 서울현충원을 찾아 참전에 얽힌 비화들을 들려주었다.

한겨울 찬 바람 속에서 4명의 노병은 목숨을 걸고 싸웠던 동료 해병대 장교들이 묻힌 묘원을 찾아 묵념한 뒤 한동안 서로 말을 잇지 못했다.


“아! 여기 있네요.” 서울시 동작구 사당동 국립서울현충원 제51묘역. 베트남전 참전 해병대 용사들이 잠들어 있는 한 묘비 앞에 70대 노병들의 발길이 멈춰섰다. 고 이인호 소령의 묘비를 찾아낸 전우들이 반백 년 가까운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 고인을 추억하며 묵념했다. 겨울비가 시나브로 노병들의 코트를 적시고 있었지만 고인을 추억하는 이들의 뜨거운 가슴까지는 식히지 못했다. 동행한 김무일(71, 전 현대제철 부회장)씨가 고 이인호 소령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이인호 소령은 해병대 역사에 남은 상징적인 인물이다. 1966년 8월 11일, ‘귀신 잡는 해병’으로 명성을 떨친 청룡부대(해병 제2여단)는 베트남 평야지대인 투이호아 지구에서 ‘해풍작전’을 벌이고 있었다. 당시 3대대 정보장교였던 이 대위는 생포한 베트콩으로부터 정보를 입수해 당시 베트콩이 숨어있는 동굴을 수색하던 중이었다. 갑자기 캄캄한 동굴 안 저쪽에서 수류탄 한 개가 날아왔다. 이 대위가 재빨리 주워 던져 상대편 쪽에서 폭발해 적에게 타격을 입혔지만 순식간에 또 하나의 수류탄이 날아들었다. 이번에는 처치할 겨를이 없을 것임을 직감한 그는 부하들에게 “모두 엎드려!”라고 외치고는 수류탄 위에 자신의 몸을 덮쳤다. 정부는 부하들을 구하고 장렬히 산화한 그의 투철한 군인정신을 기려 1계급 특진과 태극무공훈장을 추서했다. 미국 정부도 그에게 은성무공훈장을 추서했다.

“교육자 출신인 이효상 전 국회의장이 이인호 소령의 고등학교 때 스승이었어요. 그래서 그분이 직접 이 소령의 묘비문을 써주셨지요.”

김무일 씨 옆에 조용히 서있던 이영세(72, 예비역 준장) 씨도 고인을 추억했다. 이인호 소령은 해군사관학교 12기로 임관한 뒤 베트남전에 참전했다. 지금도 해군은 이인호 소령이 애국심을 불태웠던 진해 해군사관학교 교정에 동상을 세우고 매년 추모제를 지내고 있다. 이 소령이 묻힌 제51묘역에는 고 강재구 소령의 유해도 묻혀 있다. 강재구 소령은 육사 15기 출신으로 1965년 10월 4일 월남 파병을 앞두고 강원도 원주에서 수류탄 투척 훈련 중 부대원이 실수로 떨어뜨린 수류탄을 자신의 몸으로 막아 부대원들의 생명을 구했다. 강 소령은 살신성인의 표본으로 교과서에 수록될 만큼 잘 알려져 있다.

파월 전우들이 묻힌 묘지 앞을 서성이던 노병들은 목숨을 걸고 함께 싸웠던 청룡부대 전우들이 묻힌 제51묘역에서서로 약속이나 한 듯이 말을 잇지 못했다. 청룡부대는 1965년 10월 9일부터 1972년 2월 24일까지 총 3만7340명이 베트남전에 참전해 15만1522회의 크고 작은 전투를 치렀다. 그 과정에서 해병대 장교 42명, 사병 1160명이 목숨을 잃었고 2904명이 부상했다. 파월 해병대 병력의 80%가 최전선에서 싸워야 했기 때문에 희생이 컸다고 했다.

“이곳에 우리 해병학교 동기생들이 많이 묻혀있습니다. 35기 120명이 소위로 임관했는데, 대부분이 월남전에 참전해 선봉에 섰지요. 그래서 전사한 장교들 중에 소대장이 많습니다.”

청룡부대 소대장으로 혁혁한 전과를 올려 이름을 떨친 박종환(73, 사업가) 씨와 김무일 씨가 당시의 치열했던 전투 장면을 회상했다. 희생자들은 대부분 중위계급장을 달고 소대장으로 복무하던 스물예닐곱 한창 나이의 젊은이였다. 가랑비에 젖어가는 묘비를 어루만지며 발걸음을 옮기던 노병들은 묘비번호 122번 ‘해병중위 고 이수장’의 묘비 앞에서 다시 한동안 발길을 떼지 못했다.

파월영령 추모비 만들어 기증

청룡부대 출신 노병들이 만들어 기증한 기념비. 기업인 김무일 씨를 비롯해 참전 용사들이 당시 이 기념물을 세우는 데 큰 힘을 보탰다.


눈여겨보니 이수장 중위의 묘비 뒷면에는 별다른 글귀 없이 ‘1968년 3월 16일 월남에서 전사’라고만 적혀 있었다. 이수장 중위는 파병 소대장 중에서도 특별히 사연이 많은 전우였다고 한다. 고 이 중위와 함께 생과 사의 고비를 무수히 함께 넘었던 동기생 김무일 씨에 따르면, 이 중위는 부산수산대학교를 나와 해병대에 자원한 훤칠한 미남 장교였다. 어찌나 인물이 뛰어났던지 당대의 인기 여배우와 펜팔로 교제를 했을 정도여서 전우들의 부러움을 샀다. 하지만 이 중위는 전투 중에 아깝게 목숨을 잃고 말았다. 그가 국립묘지에 묻힐 때는 그와 펜팔로 우정을 나눈 그 여배우가 소복을 입고 눈물로 지켜봤다고 했다.

“목숨을 함께했던 전우들을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이곳을 찾을 때마다 동지들을 찾아 헌화하고 참배합니다. 어느 날 현충원에 월남전 참전 영령들에 대한 변변한 기념물이 없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우리 동기생들이 돈을 모아서 파월장병들의 넋을 위로하는 기념비도 만들어줬습니다.”

베트남전 참전 후 언론인으로 활약한 장수근(71) 씨가 노병들이 만들어 기증했다는 기념비가 있는 곳으로 기자를 안내했다. 참전 후 기업인으로 경제 일선에서 활약한 김무일 씨 등 노병들이 기념물을 기증하는 데 힘을 보탰다고 했다.


가랑비가 어느새 진눈깨비로 바뀌어 있었다. 4명의 노병은 기념비 옆에 있는 작은 정자 안으로 발길을 옮겼다. 자연스럽게 반백 년의 시간을 거슬러 베트남전 참전 때의 영웅담이 다시 화제에 올랐다. 네 사람이 몸담은 청룡부대는 한국군 최초의 전투부대로 파월돼 맹위를 떨쳤다. 청룡부대는 1965년 10월 9일 베트남 퀴논에 상륙한 이후 번개 1, 2, 3호 작전을 비롯해 청룡작전, 짜빈동작전, 괴룡작전, 승룡작전, 황룡작전 등 한국군이 전과로 꼽는 여러 전투를 수행했다.

“테로이 매복작전 대단했다”

이영세 “저야 주로 포병으로 복무해서 소총수로서의 전투 경험은 적었지만 월남에서 가장 전과를 많이 올린 사람이 여기있는 박종환 동지입니다. 그때 테로이 매복 작전은 참으로 대단했었지요.”

포병출신이라는 예비역 준장 이씨는 청룡부대 포병대대에서 관측장교로 복무한 뒤 여단본부와 수색중대 등에서 두루 복무했다. 그는 중위로 참전한 뒤 대위 때도 또 한 번 베트남 파병을 자원하기도 했다. 베트남전의 한국군 활약상을 두루 꿰고 있는 이씨에 따르면, 한국군의 가장 큰 전과는 1967년 2월의 ‘짜빈동 전투’인데 그에 버금가는 것이 ‘테로이 매복작전’이라고 했다. 박종환 씨가 바로 청룡부대 1대대 2중대 3소대장으로서 당시 소대를 지휘했다. 말을 아끼던 그가 입을 열었다.

박종환 “저희 부대는 그때 매복작전을 잘 수행한 것 밖에 없어요. 제가 지휘하던 3소대의 2분대원들이 미리 제보를 받고 밤에 매복을 하고 있었는데, 적들이 우리 생각보다 너무 많이 왔어요. 그러니까 적 1개 중대 병력과 우리 1개 분대병력이 정면으로 붙은 겁니다. 하지만 우리는 매복하고 기다리고 있었고, 그쪽은 엉겁결에 당한 것이라서 적의 피해가 컸죠. 파월 한국군 총사령관인 채명신 장군이 다음날 헬기를 타고 우리 부대원들을 직접 격려하러 왔을 정도로 큰 전과였지요.”

1967년 7월 북베트남군과의 연결통로였던 꽝응아이성 쭈라이 일대의 테로이 마을에서 벌어진 이 작전은 마을 민병대장의 제보를 근거로 박 소대장이 치밀한 매복작전 계획을 세우도록 한 것이 주효해 분대 병력으로 중대 병력을 격멸한 보기 드문 전과를 올렸다고 한다. 당시 소대장 복무는 6개월이 기본이었다. 최전선에서 전투병으로 선봉에 서는 경우가 많았기에 6개월만 복무하는 것으로 규정돼 있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박씨는 총 9개월 동안 소대장으로 부대를 이끌어야했다. “제 후임 소대장이 부상을 당해서 실려갔거든요. 그 바람에 제가 소대장을 3개월을 더하게 됐지요. 그 3개월이 참 길게 느껴지더라고요.” 생사가 갈리는 최전선에서 소대를 이끌었던 박씨의 솔직한 토로였다. 김무일 씨도 청룡부대 수색중대 1소대장으로 11개월을 복무한 용사 중의 용사였다. 김 씨가 참전 당시를 회상하듯 말을 이어받았다.

김무일 “요즘도 가끔씩 생각나는 것이 1968년 2월 ‘구정 대공세’ 전투입니다. 그때 참 치열했습니다. 불과 몇 분 전에 적의 정황을 알려주면서 제게 몸조심을 각별히 당부해주던 제 10중대 박승진 소대장이 장렬한 최후를 맞았다는 비보가 무전기로 전해졌을 때는 마음이 무너지는 것 같았어요. 그 심정을 격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겁니다. 학창시절에 단짝이었던 박 중위는 병역 의무를 끝내고 나면 고시에 재도전하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했어요. 그런 그가 꽃다운 스물다섯의 나이에 저승으로 떠난 거지요. 적과 대치하고 있는 긴박한 상황에서 잠시 박 중위의 죽음을 생각하고 있는데 갑자기 예상치도 못한 곳에서 적의 박격포탄이 날아들었어요. 그 충격에 철모가 날아가고 흙더미가 머리 위로 쏟아지고, 포성의 진동으로 고막이 터져 피가 흐르고… 그 아비규환 속에 바로 앞에서 싸우던 부대원이 피를 토하며 쓰러졌지요. 죽음이 바로 눈앞에 있었습니다.”

김씨는 “당장 내일 이 세상을 하직할 수 있다는 마음이 그 때 소대장으로서의 솔직한 심정이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전투 중에 본능적으로 살아남기 위해 필사적으로 몸을 재빨리 움직여야만 했던 그 급박한 상황에서도 소대장으로서 어떻게 해서라도 단 한 명의 소대원도 잃지 않고, 그들의 귀국을 학수고대하는 사랑하는 가족들의 품 안으로 무사히 돌려보낼 수 있을지를 생각했다”고도 했다. 월남전에서 이렇게 리더십을 발휘하며 용맹을 떨친 김무일 씨는 군 제대 후 현대모비스에 입사해 현대·기아자동차 부사장, 현대제철 부회장을 지내며 솔선수범의 리더십으로 재계에서 해병대 출신 CEO의 성공사례로 꼽힌다.

“박정희, 북한의 오판 막으려 파병 결정”

1. 1968년 월남전에 참전해 적진을 돌파하는 해병대 청룡부대원들. / 2. ‘호이안’ 전선에서 수색소대장으로 복무할 당시 김무일 중위(왼쪽) 3 1967년 베트남에서 용궁작전을 수행 중인 수색중대 대원들.


같은 청룡부대 전우인 장수근 씨도 6개월간 2대대 7중대 2소대장으로 부대를 이끌었다. 그는 병역을 마친 뒤 언론계에 투신해 <서울신문> 국제부 기자로 명성을 날렸다. 장씨는 한국군이 수행한 전투 성과보다는 요즘에는 베트남전 참전이 가져다준 정치·경제적 의미를 많이 곱씹게 된다고 했다.

그에 따르면, 당시 전투병 참전은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한국군의 큰 전력 손실을 가져올 베트남전 파병에는 당시 박정희 대통령과 채명신 장군이 의기투합했던 고뇌에 찬 결정이 있었다고 했다. 장씨에 따르면, 초대 주 베트남 한국군 사령관을 맡았던 고 채명신 중장은 박정희 대통령의 월남 파병 결심을 듣고 반대했었다고 한다. 베트남전은 기본적으로 어디에 적이 있는지 알 수 없는 게릴라전이기 때문에 6·25전쟁 당시 전면전 경험밖에 없는 한국군으로서는 당해내기 어렵다는 것이 채 장군의 반대 이유였다.

하지만 당시 박 대통령의 고민은 따로 있었다. 박 대통령은 한국군이 파병하지 않으면, 미군이 주한미군 2사단이나 7사단을 베트남으로 차출해 국가 방위에 공백이 생길 것을 우려했다고 한다. 그렇게 되면 북한이 오판할 빌미를 줄 수 있다고 여겨 한국이 먼저 베트남 파병을 미국에 제안해야 한다고 결심하게 됐다는 것이다. 박 대통령이 채 장군을 만난 자리에서 재차 이런 취지를 설명하며 초대 파월 사령관을 맡아줄 것을 간곡히 부탁해 결국 전투병 파병이 성공적으로 이뤄졌다는 비사를 들려줬다.

장수근 “베트남전 파병의 의미에 대해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1965년 1월 26일 대국민 담화를 발표한 내용이 있습니다. 정치적으로는 대공투쟁과 집단안보체제의 강화·국민의 단결과 해외진출의 의미가 있다고 했고, 군사적으로는 한국군 파병으로 미군의 한반도 계속 주둔과 한국방위 보장을 약속받을 수 있다는 점, 우리의 전투력 향상을 통한 국방력 강화를 강조했어요. 마지막으로 경제적 의미를 내세웠는데, 실제로는 이것이 중요했지요. 한국과 미국, 월남 3국간 협조를 통한 3각 무역체제 구축을 통해 외화획득 기회를 확보할 수 있다는 점과 파월장병 군수품 중 국산 군수품을 제조해 수출하면 경제적 이익을 얻을 수 있다고 강조했어요. 한국군 파병은 이처럼 ‘국방과 경제’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동시에 잡으려는 박 대통령의 포석이었지요. 이것은 당시 우리 파병 장교들도 실제 피부로 느꼈던 것이었고요.”

이영세 “맞습니다. 월남전 참전 때문에 우리 군의 전투력이 현대화되기 시작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 전에 우리 군은 소총으로 싸우는 부대였어요. 제가 포병이었지만 돈이 없으니 포 사격 훈련조차 제대로 할 수 없는 여건이었지요. 당시 경제대국인 미국이 아니었다면 그렇게 비용이 많이 드는 전쟁을 수행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베트남이 보통 나라가 아니거든요. 미국이 개입하기 전에 프랑스도 결국 손들고 나갔잖아요. 월남전이 끝난 뒤 중국군 1개 사단이 베트남에 들어갔다가 거의 전멸했습니다. 베트남의 역사를 보면 중국에도 호락호락 당하지 않는 나라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저력이 있었기에 지금 베트남이 전쟁의 폐허를 딛고 경제발전을 이루고 있는 것이고요.”

월남전 참전으로 군 현대화 이뤄

노병들은 무궁화 조화가 놓인 고 채명신 파월 한국군 사령관의 무덤 앞에서 거수경례로 존경의 마음을 전했다.

장씨와 이씨의 말처럼 베트남전 참전이 한국군 현대화의 기회가 되었다는 것은 몇 가지 통계수치로도 확인된다. 한국군 파월 이후인 1968~72년까지 한국군에 대한 미국의 군사원조액은 22억 달러에 이른다. 이는 1961~65년 미군사원조액 8억 달러보다 3배 가까이 늘어난 수치다. 당시 한국군은 미군으로부터 신예구축함 2척을 지원받았고, 팬텀 전투기, M16소총 국산화도 지원받았다. 아울러 3개 향토사단을 정규사단화하고 17개 육군사단과 해병사단 장비를 현대화해 북한의 무력통일 시도를 막을 수 있는 방위력을 키우게 됐다고 한다.

당시 박 대통령이 기대한 대로 베트남전 참전이 우리 경제에 숨통을 트이게 한 것도 사실이다. 참전을 결정한 1964년 1억2800만 달러였던 한국의 외환보유고는 전쟁이 끝난 1975년에는 15억4천만 달러로 급증했다. 1966년부터 1972년까지 6년간 베트남에 주둔한 한국군과 연관된 국내 송금액은 총 8억7250만 달러에 달했다. 이 중 수출·군납·건설·용역·기술자가 송금한 돈이 6억9427만 달러였고, 한국 군인이 송금한 돈이 1억7830만 달러였다. 베트남전이 한창이던 1969년에 베트남으로 송출한 인력이 1만5500명이었고, 진출 기업도 79개 업체에 달했다. 당시 현대건설·한진상사·대우실업·금성전자를 비롯한 국내기업들이 군수물자 납품과 용역사업을 통해 베트남전 특수를 톡톡히 누렸다.

최근 천만 관객을 돌파하며 세대간 소통을 강조한 영화 <국제시장>에서 주인공인 덕수(황정민 분)와 달구(오달수 분)가 베트남에서 일해 송금한 돈들, 그리고 실제 1969년 7월 청룡부대 2대대 5중대 2소대원으로 베트남에 파병돼 전투병으로 싸웠던 영화 속 가수 남진(유노윤호 분)이 국내에 송금한 그 돈들이 돌고 돌아 우리나라 경제발전의 초석이 됐다는 것이 이들 노병의 주장이었다.

노병들은 최근 참전 용사를 ‘용병’으로 격하시키는 일각의 주장 때문에 파월장병들에 대한 복지혜택이 줄고 있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도 토로했다. 베트남전은 우리 군에 사망 5099명, 부상 1만962명(국방부 공식 발표), 8만9708명의 고엽제 피해라는 큰 대가도 치르게 했다. 1975년 주베트남대사관 철수에 따른 베트남과의 외교단절 이후 1992년에야 외교관계가 복원됐고 아직도 한국계 베트남 2세인 ‘라이따이한’ 문제 등 양국간에 화해와 협력이 필요한 부분도 많다.

한국에 빛과 그늘을 동시에 안긴 월남전 전투병 파병으로부터 50년의 세월이 지났다. 우리 세대는 베트남 참전의 경험으로부터 어떤 교훈을 얻어야 할까? 목숨을 걸고 전쟁터에서 싸웠고, 현대사를 관통하며 열심히 살아온 우리 사회의 원로들에게 젊은 세대에 당부하고 싶은 말을 들어보았다.

장수근 “우리는 종전한 것이 아니라 휴전한 것인데, 대다수 국민들이 전쟁을 잊고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누리는 평화는 깨지기 쉬운 평화라는 것을 늘 잊지 말아야 합니다. 북한은 이 지구상의 어떤 나라보다 특수하고 예측을 불허하는 집단입니다. 그런데도 식자들도 평화만 얘기하지 전쟁은 말하지 않아요.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전쟁에 대비할 줄 알아야 평화도 이룰 수 있습니다. 또 하나, 국가를 지키는 것은 경제력과 국방력입니다. 빙산의 일각인 일부의 부패만 보고 국방과 국군 전체를 매도하는 분위기는 바람직하지 않다는 생각입니다.”

경제발전 견인차 역할 평가돼야

박종환 “맞습니다. 우리는 북한과 대치하고 있는 나라입니다. 언제든지 김정은이 도발할 수 있는 나라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그리고 요즘 보면 정치권에서 장성을 불러 부하 다루듯 하는 나라는 우리나라밖에 없지 않나 싶어요. 정치가 잘해야 나라가 잘 됩니다. 각자가 자기 자신이 서 있는 자리에서부터 반성하고 교훈을 얻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노병들은 또, 우리나라가 50년 전 베트남 참전의 교훈을 통해 부강한 나라를 만들어야 하는데 최근 몇 년 새 경기침체로 활력을 잃고 있는 현실을 많이 걱정하며 베트남 참전 정신으로 어려움을 이겨낼 것을 강조했다.

이영세 “지금 상황이 우리가 참전했을 50년 전과 비슷합니다. 경제가 어렵고 안보도 튼튼하지 않은 것 같아요. 국방력도 증진시키고 경제도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야 합니다. 그때처럼 근성과 정신력으로 이 난관을 헤쳐 나가야 경제가 살아 날 수 있습니다. 현직에 있는 군 장성들도 애국심으로 무장해 더 분발해야 마땅하고요.”

김무일 “1964년에 북한의 경제력과 군사력은 우리의 두 배였습니다. 당시 한국의 GNP는 76달러였는데 북한은 135달러였어요. 하지만 참전 이후인 1966년부터 우리나라에 10% 고도성장 시대가 열렸습니다. 그때 우리나라가 외화획득을 위해 얼마나 고생했습니까? 60년대 초부터 파독(派獨) 광부와 간호사들이 정말 고생했잖아요. 1965년부터 1973년까지는 32만 명의 파월 전우가 목숨을 걸고 싸웠습니다. 70년대는 근로자들이 중동으로 진출해 외화를 벌어들였고요. 이 세 가지가 우리나라 경제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한 것이 사실이잖아요. 그렇게 우리가 50년간 노력해서 지금의 무역대국이 됐습니다. 이것을 젊은 사람들이 잊어버리지 않았으면 합니다. 기성세대가 이만큼 노력한 것을 인정하고 젊은 세대가 기성세대와 소통해서 나라를 더 발전시켜 갈 수 있기를 원합니다.”

70대의 노병들이 식어가는 젊은 세대들의 애국심을 일깨우는 그 사이 서울현충원의 너른 묘역을 적시던 진눈깨비도 그쳐가고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선 노병들은 차에 올라 현충원을 빠져나가다 뭔가 잊은 게 있는 듯 다시 차를 돌렸다. 초대 주베트남 한국군 사령관이었던 고 채명신 중장이 월남전 사병들의 묘지 맨 앞에 묻혀 있었다. 2013년 11월 세상을 떠난 그가 생전에 사병들 곁에 묻어달라는 유언에 따른 것이라고 했다. 4명의 노병은 무궁화 조화가 놓인 고 채 장군의 무덤 앞에 서서 50년 전 그날처럼 일제히 거수경례를 했다. 젊은 날에 참전 용사들이 흘린 피와 땀이 헛되지 않기 위해 전우의 몫까지 열심히 살아 한평생 조국에 봉사해왔다는 노병들의 진한 애국심이 전해져왔다.

글=나권일 월간중앙 기자, 사진=김현동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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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석 소장 : kimseok@joongang.co.kr (02-751-5511)
국방연구원 전력발전연구부ㆍ군비통제센터를 거쳐 1994년 중앙일보에 입사한 국내 첫 군사전문기자다. 국방부를 출입한 뒤 최장수 국방부 대변인(2010~2016년)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군사안보전문기자 겸 논설위원으로 한반도 군사와 안보문제를 깊게 파헤치는 글을 쓰고 있다.

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