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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역사]박정희 지시로 … 쥐도 새도 가족도 몰랐던 미사일 개발

1970년대 후반 안동만 교수는 국내 최초 지대지 미사일 ‘백곰’ 개발사업에 연구원으로 참여했다. 안 교수가 개발 당시에 자신이 직접 만들어낸 미사일 날개(모형)를 만져보고 있다. 김경록 기자
“각하, …. 또 실패했습니다.” 대통령은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고개 들어 먼 하늘을 바라보는 그의 눈에 어리는 좌절감을 보며 주변 사람들은 몸 둘 바를 몰랐다.

국산 유도탄 개발은 벌써 열 번 넘게 실패만 거듭하고 있었다. ‘아아, 그토록 노력했는데도 겨우 이 정도밖에 안 되는 것인가. 이것이 우리의 한계인가.’ 소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김진명 저)의 일부다. 소설 속 유도탄, 그러니까 ‘미사일’ 개발은 쉽지 않다. 실제 현실은 어땠을까. 1970년대 국산 장거리 미사일 개발에 참여한 이가 있다. 후에 그는 국내 최초 군용기 개발을 이끌었다. 바로 한서대 안동만(66) 항공전자과 교수다. 국내 무기 개발의 역사와 함께 했던 그의 인생 이야기를 들어 봤다.

조한대 기자


 
국내 기술로 만든 최초의 군용기 KT-1. 1991년 개발 당시에, 안동만 교수와 연구진이 지상 실험을 하고 있는 모습이다. [사진 안동만 한서대 교수]
SF 만화 라이파이 보고 꿈을 키운 소년

아버지는 장남이 ‘법대’에 가길 바랐다. 초등학교 밖에 나오지 못했지만 대구에서 경찰이 된 아버지. 낮은 학력 때문에 경찰 조직 내에서 높은 자리는 꿈도 못 꿨다. 그래서 아들만큼은 남들이 우러러 보는 자리에 오르길 원했다. 아들은 고등학생 때 이미 한 살 차이나는 부잣집 아들 과외까지 해줄 만큼 공부를 잘했다. 하지만 아들의 눈에는 판사·검사·변호사가 그리 멋있어 보이지 않았다. 마음 속에 이미 다른 게 들어와 있었다. “어렸을 때 ‘라이파이(산호 저)’라고 주인공이 우주 여행하며 나쁜 사람들하고 싸우는 SF만화를 재밌게 봤어요. 자연스레 고3 때 이과를 택했죠.”

 그는 서울대 조선항공과(항공 전공)에 들어갔다. 가고 싶은 학과에 들어갔으니 열심히 공부할 만도 한데 그렇지는 않았다. “대학 미·적분은 고등학교 때와는 전혀 달랐어요. 어렵고 재미도 없는 거예요. 거기다 (가족들과) 떨어져 있으니 아르바이트도 해야 하고 놀기도 바빴거든요.” 그가 학과에 정 못 붙인 이유는 또 있었다. “학과 친구들 중에는 장관·장군 아들에 대기업 건설사 아들 등 잘사는 사람이 그렇게 많은 거예요. 교수님이 그런 애들한테만 ‘너희 아버지는 뭐하시니’하며 관심을 갖더군요. 속으로 얼마나 배알이 꼴리던지.”


 
1963년, 대구 경북중을 졸업할 때 모습 [사진 안동만 한서대 교수]
 오죽했으면 뒤늦게 공부해 법대 갈 생각도 해봤다. 하지만 힘든 객지 생활을 하다가 결핵에 걸리는 바람에 휴학을 했고, 그 생각은 접었다. 졸업 1년여를 앞둔 71년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에서 ‘박격포 연구’를 서울대에 위탁했다.

이를 계기로 그는 졸업 후 이곳에 취직했다. 반 년이란 세월이 지나고 그는 국방과학연구소(이하 ADD)로 다시 자리를 옮겼다. 무기 개발과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됐다.

국방연구소는 세상에 없는 기관이어야 했다

국가 연구소에 다닌다고 가족에게 자랑 한 번 못했다. ADD는 세상에 없는 기관이어야 했다. “가족들한테는 ‘홍릉기계’ 다닌다고 했어요. 그 때 ADD가 청량리 홍릉에 있었거든요.”

 70년대 초는 박정희 정권이 무기 국산화에 박차를 가할 때였다. 73년 4월 박 대통령은 장거리 지대지 미사일을 만들라고 ADD에 은밀히 지시했다. 대외 명칭은 ‘항공공업 육성’ 사업이었다. 그 어디에도 ‘미사일’이란 단어는 없었다. 극비 사항이어서였다. 그가 ADD에 들어간 것도 이 사업을 추진하는데 연구원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국방과학연구소 본관
 입사한 지 1년여 만에 그는 미국 전투기 제작업체 노스롭(Northrop, 현 노스롭그루먼)에 항공기 설계 연수생으로 유학을 갔다. “사실은 미사일 관련 정보를 얻어 오기 위해서였어요. 항공기와 원리는 같지만 구조가 더 간단한 게 미사일이거든요.”

 유학 중이던 어느날 한국에서 미사일개발 팀장을 맡고 있던 이경서 박사와 팀 연구원들이 미국으로 왔다. 군수업체 맥도널드 더글라스사(이하 MD사, 97년 보잉사에 합병)와 계약을 맺고 미사일 제조 연구를 하기 위해서였다. 그에게 주어진 임무는 ‘복사’였다. “하루 3시간씩 6개월을 복사만 했어요. 노스롭사 도서관의 항공·미사일 자료, 여기에 이 박사님께서 보내신 MD사 자료까지. 라면상자로 20개 넘는 분량을 복사해서 국내로 들여왔죠.” 대단치 않아 보였던 복사 일. 그러나 국내 미사일 개발의 전환점은 여기였다.

대한민국 최초의 지대지 미사일 백곰 발사

국내 미사일 개발팀은 이 자료를 토대로 MD사의 지대공 미사일 ‘나이키 허큘리스(Nike Hercules)’와 똑같은 미사일을 만들기로 했다. 남의 것 베끼는 게 당시로선 최선이었다. 아니, 똑같이 만들면 기적이라고 불러야 할 상황이었다. 당시 ADD를 돕던 방위산업체라는 게 경운기 만드는 회사였으니 말이다. 이때부터 개발 사업은 나이키 허큘리스에 코리아를 붙여 NHK-1 사업이라 불렀다.

 그는 미사일 기체(機體) 만드는 일을 했다. 숱한 우여곡절을 겪었다. “길이 15m 날개를 만들기 위해 부산에 있는 자동차 하청업체를 찾아갔어요. 6개월이 걸렸죠. 미사일 로켓 실험하다가 산불이 나서 소화기 들고 산비탈을 반나절 넘게 뛰어다니기도 했죠.”

 그렇게 해서 국산 미사일을 만들었지만 첫 번째 실험 발사에서 실패하고 말았다. “분위기 살벌했죠. 연구원 100여 명이 모여 있는 자리였어요. 서로 자기 분야 쪽은 문제 없다고들 했어요. 아무도 실패 원인을 모르니 답답한 상황이었죠.”

 그러나 그들은 실패를 디딤돌 삼아 성공에 이르렀다. 4개월 뒤인 78년 9월 26일 대통령 앞에서의 시험발사 날, 그는 ‘백곰’이라 불리는 우리 나라 최초의 장거리 지대지 미사일이 상공을 가르는 걸 봤다. “숨죽이며 지켜보던 연구원 모두가 서로 얼싸안고 울고 불고 난리가 났어요.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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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6 이후 접었던 미사일 사업 아웅산 테러로 부활

“충격이었죠. 3년 만에 귀국해 보니 주위 동료들이 다 없어졌더라고요.”

 첫 미사일 개발 성공 후 그는 박사과정을 밟기 위해 영국 크랜필드 대학원으로 떠났다. 떠난 지 이틀 후 10·26 사태가 터졌다. 그가 유학생활을 하는 동안 정권이 바뀌고 ADD의 장거리 미사일 사업은 흐지부지됐다. “미국은 박정희 대통령이 불장난 한다고 봤거든요. 새 정부가 그런 미국의 눈치를 본 거예요. 무기 개발하던 ADD에 물리·수학 같은 기초 연구를 하라고 했죠. 82년 말에는 ADD 전 직원에게 ‘사표’를 내게 해 3분의 1을 잘라 버렸어요. 많은 동료들이 하루 아침에 직장을 잃었죠. 우리나라 방위산업 역사에 큰 치욕입니다.”

 그러나 ‘버마 아웅산테러 사건’으로 ADD는 다시 새로운 운명을 맞게 됐다. “사건이 터지고 나서 보니 우리에겐 (북한에) 강력히 경고할 만한 무기가 없었던 거죠. 그때 (전두환) 대통령이 생각해낸 게 바로 장거리 미사일 사업이었어요.”

 미사일 사업 재개는 곧 ADD의 부활을 의미했다. 연구원 100여 명을 새로 뽑고 개발 사업도 늘렸다. 그러나 한순간에 직장을 잃은 옛 동료들은 다시 만나지 못했다. “서슬퍼런 정권이 펄펄 살아있을 때였으니까요.”

 
성공할 리 없다 비웃음 딛고 군용기 개발 성공

80년대 중반 그는 항공기 개발로 눈을 돌린다. “당시 ADD 소장에게 100억원 주면 3년 안에 국산 비행기 두 대 띄워 주겠다고 했어요.” 이 말이 얼토당토 않던 시절이었다. 많은 공군 장군들이 ‘너희가 비행기 띄우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고들 말했다.

 비난은 오기를 불렀다. “우리도 할 수 있다. 보여주고 싶더라고요.” 그는 예산을 받아냈다. 백곰 사업 때와는 달리 이번엔 그가 사업을 이끌어 갈 위치였다. 책임감이 어깨를 짓눌렀지만 분명 ‘가능’하다 믿었다.

 자체적으로 비행기 설계를 마친 후 스위스의 군용기 제작업체 ‘필라투스(Pilatus)’와 자신이 박사학위를 받았던 영국 크랜필드대, 그리고 미(美) 공군 기술검정팀에게 설계 검토를 요청했다. 3중으로 검토를 의뢰한 건 국내 기술진 모두가 비행기 개발엔 ‘초짜’였기 때문이었다. 경험 있는 선진 기술자들의 조언을 구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기술 유출을 경계하는 그들과 신경전을 벌이기도 했다. “스위스 필라투스 연구원들은 자신들의 비행기를 보여주면서 우리에겐 자도 못갖고 오게 했어요. 저희는 연필로 (부품들을) 대충 재보고 나중에 노트에 적곤 했어요.”

 그가 속한 팀은 수많은 보완 사항을 지워나갔다. 그로부터 3년 후인 91년 12월 12일, 국내 기술로 만들어낸 최초의 기본훈련기는 상공을 갈랐다. 이후 몇 번의 개량을 거쳐 국내 최초 기본훈련기 ‘KT-1’이 탄생했다.

노무현 시절 첫 연구원 출신 국방연구소장에

그는 2000년 항공기·유도무기 개발본부장이 됐다. 3년 뒤에는 국방부 연구개발관으로 자리를 옮겼고, 다시 ADD로 돌아와 2005년 ADD 소장이 됐다. 말단 연구원으로 시작해 ADD 최고 수장이 된 것이다. 군 출신이 독차지하던 소장 자리에 오른 첫 번째 연구원 출신이었다.

 그는 3년 임기를 무사히 마친 후 ADD를 떠났다. 연구소에 들어온 지 35년 만이었다. 현재는 한서대 항공전자과 석좌교수로 재직 중이다. 일선에서 물러난 자리. 그러나 아직도 국내 방위산업에 대한 걱정은 사라지지 않는단다. 그가 초석을 다진 항공산업에 대한 염려 때문이다.

 “KFX(한국형 전투기)사업이 10년 동안 경제성 분석만 하고 있어요. 안보를 어떻게 경제적인 논리로만 볼 수 있습니까. 국내에서 개발하면 8조원이 더 들어요. 그렇더라도 국산화율을 높여 우리가 마음대로 팔 수 있는 전투기를 갖는 게 낫겠습니까, 아니면 외국과 함께 만들어 마음대로 팔 수도 없는 전투기를 갖는 게 낫겠습니까. 단군 이래 가장 큰 사업이란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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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중앙일보 입사 이래 북한 문제와 양자 외교 관계를 비롯한 외교안보 현안을 오래 다뤘다. 편집국 외교안보부장ㆍ국제부장과 논설위원ㆍ도쿄총국장을 거쳤고 하버드대 국제문제연구소(WCFIA) 펠로우를 지냈다. 부소장 겸 논설위원으로 외교안보 이슈를 추적하고 있다.

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