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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식의 'Big Questions'] 무한에서 단 하나로 줄어든 신들의 역사, 그 다음은?

이탈리아의 조각가이자 화가인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1508~1512). 신이 오른손 끝으로 땅 위의 아담에게 생기를 불어넣는 장면이다. 신이 인간을 만들었을까. 아니면 인간이 신을 만들었을까.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그림이다. 몸을 살짝 가린 미인들에 둘러싸인 한 어르신. 노인이라고 하지만 여전히 멋지고 단단한 몸, 그리고 마치 1950년 할리우드 중년 배우를 연상케 하는 근엄하면서도 자비로운 얼굴. 중력은 그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일까.

<37> 인간은 神이 될 수 있을까?

날개도 로켓도 없이 공중을 날아다니는 어르신은 오른손을 쭉 뻗어 벌거벗은 남자의 손가락을 만지는 듯하다. 아니, 어쩌면 단순히 흙과 물로 빚어진 진흙덩어리였던 남자(아담)는 어르신의 손이 닿으려는 순간 보고 느끼고 움직이는 인간이 돼버렸는지도 모른다. 이탈리아의 조각가이자 화가인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1508∼1512)에서 어르신은 오른손 끝으로 땅 위의 아담에게 생기를 불어넣어준다.

신이 만든 인간, 인간이 만든 신
신으로부터 만들어진 인간. 하지만 정말 그런 걸까. 만약 신이 인간을 만든 게 아니라 인간으로부터 신이 만들어졌다면? 이시스·오시리스·엔키·마르둑·야베·비시누·시바·제우스·아폴로·오딘·토르…. 우리 인간이 이 모든 신을 만들어냈다면? 왜 인간은 신을 만들었을까. 신이 있는 지구를 왜 인간은 신이 없는 지구보다 더 선호했을까. 우선 많은 것이 설명된다. 설명이란 무엇인가. 설명이 가능하다는 말은 더 이상 질문이 필요 없다는 말과 같다. 우리도 한번 프랑스의 철학자 데카르트(Rene Descartes·1596~1650)를 흉내 내 보자. 내 눈에 보이는 세상, 그리고 내 모든 기억과 믿음이 허상이라면? 그래도 여전히 이 모든 것을 허상이라고 생각하는 무언가는 여전히 존재해야 한다. ‘나’란 이름을 가진 그 무언가는 필연적으로 존재해야 한다는 말이다. ‘나’에 대해선 아무 설명도 정당화도 필요 없다. 모든 설명은 어차피 ‘나’로부터 시작돼야 할 테니 말이다.

눈을 한번 크게 떠보자. 마치 머리 안에 초(超)고화질 모니터라도 존재하는 듯 선명하고 입체감을 가진 세상이 보인다. 그리고 ‘나’와는 다른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돌·나무·사자…. ‘나’와 내가 아닌 세상의 차이는 무엇일까. 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나는 나기에 내 행동은 내가 의도하고 예측할 수 있다. 내가 팔을 들고 싶은 순간 난 팔을 든다. 하지만 난 알 수 없다. 나무에 매달린 열매가 언제 떨어질지. 저 먼 곳의 사자가 언제 나를 향해 달려올지. 내 앞에 보이는 남자의 주먹이 언제 내 얼굴에 날려질지. 예측하면 나, 예측도 의도도 하지 못하면 세상. 내가 아닌 나머지 세상의 다른 모든 것을 예측하기 위해선 좋은 설명이 필요하다. 가장 단순한 설명은 이거겠다. 세상은 나와 같다고. 이 세상 모든 것 역시 내 안의 ‘나’와 같은 무언가를 갖고 있다고. 그들이 갖고 있는 ‘무엇’을 내 안의 ‘나’와 차별화하기 위해 ‘영혼’이란 이름을 지어보자. 돌·나무·사자…. 이들 모두 영혼을 가졌고 의도가 있다면 그들의 행동은 나 자신의 경험과 희망을 바탕으로 설명할 수 있다. 이 세상 모든 것엔 영혼과 의도가 있다고 믿는 애니미즘(animism)은 이런 배경으로 탄생했다.

애니미즘은 많은 문제를 해결해줬다. 굶고 다치고 원인 모르게 아프고 죽고…. 도저히 예측 불가능하던 세상이 갑자기 설명되기 시작한다. 날 굶게 하고 다치게 하고 죽게 하는 모든 것엔 내면적 세상이 존재한다. 그렇다면 더 이상 죽고 다치고 굶지 않기 위해선 눈에 보이지 않는 그들에게 부탁해보면 어떨까.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우선 세상엔 너무 많은 영혼이 존재한다. 끝없이 넓은 초원에서 풀을 뜯고 있는 저 많은 소. 각자마다 독립적인 영혼을 갖고 있다면 누구에게 부탁해야 할까. 더구나 그들이 왜 내 부탁을 들어줘야 할까.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이던가. 그들의 등과 목에 긴 창을 꽂아 쓰러뜨리고 아직 생명이 남아 있는 그들의 배를 날카로운 칼로 자르는 게 아니었던가. 마치 기다렸다는 듯 쏟아져 나오는 창자, 마지막 숨을 내뱉는 그들의 소리, 멈출 줄 모르는 붉은 피. 내 창자가 쏟아져 나오길 내가 원하지 않듯 영혼이 있는 소들 역시 그것을 원할 리 없다. 나는 원하지만 그들은 원하지 않는다. 나는 받아야 하지만 그들은 주고 싶어 하지 않는다. 이 문제를 어떻게 풀 수 있을까. 

애니미즘의 탄생 배경
답은 숫자에 있었다. 만약 영혼의 수가 사물의 수보다 적다면? 깨알같이 많은 모래알이 각자 다른 영혼을 가진 게 아니라면? 모든 소를 움직이는 소 영혼이 있고 하늘 위에 사는 것들을 다스리는 하늘 영혼, 그리고 깊은 바닷속을 장악하는 바다 영혼이 있다면. 이런 영혼 위의 영혼을 신이라 부른다면 또 한 번의 혁신이 가능하다. 맛있는 소의 고기를 먹고 싶다면 자신의 살덩어리를 스스로 줄 이유가 없는 소가 아닌, 소를 다스리는 소의 신에게 부탁하면 되겠다. 이것이 무한에 가까웠던 영혼의 수를 불과 몇 안 되는 신들로 대체한 다신교(多神敎)의 탄생 배경이다. 다신교의 효율성은 대단했다. 험하고 무서운 세상. 이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더 이상 무한에 가까운 영혼에게 잘 보일 필요가 없었다. 세상을 다스리는 몇 안 되는 신들에게 제물을 바치고 그들이 머물 수 있는 멋지고 거대한 신전을 지어주며 그들을 찬양하는 시와 글을 쓴다면 모든 것이 예측가능해지겠다. 불안·걱정·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진 삶. 다신 숭배의 보상이었다.

인류 역사에서 처음으로 유일신을 제시한 고대 이집트의 파라오 아멘호테프 4세(기원전 1352~1336 또는 기원전 1351~1334). 그는 아케나텐(Akhenaten)으로 이름을 바꿨는데 이는 ‘아텐의 지평선’이란 뜻이다.
기원전 14세기께 살았던 고대 이집트 제18왕조의 파라오 아멘호테프 4세. 남다른 외모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먼 훗날 태어났다면 다빈치·모차르트·아인슈타인을 능가할 천재성을 갖고 타고났던 것일까. 수많은 이론과 가설은 가능하지만 여전히 아무도 모른다. 왜 재위 5년에 아멘호테프가 이집트인 모두에게 지시했는지. 수많은 신들이 만물을 지배한다는 믿음은 참이 아니라고. 우주엔 단 하나의 신만 존재한다고. 불안과 어두움을 물리치고, 따스함과 빛을 주는 태양이 바로 그 유일한 신이라고. 그리고 신의 이름은 ‘아텐(Aten)’이라고. 무한의 영혼으로부터 시작해 힘 좀 쓰고 서로 싸우고 질투하고 외도하는 몇 명의 신들로 줄어들었던 다신교적 영혼의 세상. 아멘호테프는 한 방에 이 모든 신들을 단 하나로 간추려버린 것이다. 아텐이란 유일신을 숭배하던 그는 새 수도 아케타텐을 설립하고 자신의 이름을 아케나텐으로 바꾼다. 하지만 대부분의 얼리어답터(early adopter)처럼 아케나텐의 혁신 역시 실패하고 만다. 파라오 아케나텐이 죽은 지 불과 몇 년 후 조상들에게 물려받은 신들을 포기할 수 없었던 사람들은 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장악한다. 수도 아케타텐은 버려지고 아케나텐의 아들 투트안카텐(아텐의 살아 있는 이미지란 뜻)의 이름은 투트안카문, 그러니까 ‘아문의 살아 있는 이미지’로 바뀐다.

성공적인 명품은 언제나 수입품이어야 하는 것일까. 고대 이집트에서 실패한 유일신은 아브라함과 모세의 유일신 야베가 됐다. 아브라함의 유일신은 인류 최고의 ‘수출품’이 된다. 유대교·기독교·이슬람·사마리탄교(Samaritanism)·야지디교(Yazidism)·드루즈교(Druzism)…. 54%의 지구인들이 아브라함의 신을 믿고 있으니 말이다.

철학자 니체(오른쪽)가 사랑하던 루 안드레아스 살로메(왼쪽). 루의 연인 파울 레(가운데).
무한에서 수십 명, 그리고 결국은 단 한 명. 문명의 역사는 줄어든 신들의 역사라고도 할 수 있겠다. 끝은 여기일까. 아니, 모든 끝은 또 다른 시작의 시작일 뿐이다. 독일의 철학자 니체(Friedrich Nietzsche·1844~1900). 그는 문헌학의 대가, 19세기 최고의 문화비평가, 현대 허무주의의 아버지로 불리는 인물이다. 대부분의 과학자나 철학자같이 그다지 뛰어나지 못한 외모의 소유자였던 니체. 잘생긴 친구 파울의 연인이었기에 아름다운 루를 멀리서만 짝사랑해야 했던 니체. 우리 모두는 적어도 그의 말 한마디는 기억한다. “신은 죽었다(Gott ist tot!)”고. 누군가가 죽었다면 대부분은 죽인 자가 있다. 신은 죽었고 인간이 죽였다. 왜냐고?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수학·물리학·화학·생물학·기계학·전기학·천문학 등의 발전 덕분에 아브라함의 신 없이도 인간은 세상을 설명하고 예측할 수 있게 됐다.

양자컴퓨터, 나란 존재 업로드 가능할까
신은 정말 죽은 것일까. 신이란 올림포스 산에 사는 것도 아니고 아스가드 궁전에서 만찬을 즐기는 것도 아니다. 그들은 불안과 공포로 가득한 나약한 우리 인간의 위안일 뿐이다. 진화론·양자역학·상대성이론·분자생물학·뇌과학…. 이들은 혼란한 우주를 설명하고 예측하기 위해 만들어진 지식이다. 그 방대한 지식은 과연 우리의 불안을 없애줄 수 있을까. 물론 아니다. 아니, 차라리 우리의 존재적 불안을 더 키우기만 하는 듯하다. 모든 게 우연이라고. 특별한 이유 없이 존재하고 이유 없이 소멸된다고, 현실이란 대부분 착시이고 절대 진실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밤중 날아가는 새 소리에도 기겁하는 나약한 영장류의 후손인 우리들. 우리는 그다지 강한 종(種)이 아니다. 만약 신이 죽었다면 우리를 안심시켜줄 수 있는 다른 무언가를 찾아야 한다. 그렇다. 만약 우리 스스로가 신이 된다면 어떨까. 유전공학·로봇공학·뇌공학·인공지능 등의 기술력을 빌려서 말이다. 잘못 넘어지기만 해도 부스러지는 팔·다리 뼈를 초강력 탄소복합 소재로 바꾼다면. 100년도 버티지 못하는 우리 몸을 유전적으로 업그레이드할 수 있다면. 사랑하던 연인에게 버림받아 이불킥(kick)을 날리며 술독에 빠지는 우리의 아픈 기억을 지울 수 있다면. 점점 희미해지는 내 기억들을 브레인 리딩(brain reading) 기술로 읽어 재현할 수 있다면. 나약한 내 육체가 소멸되기 전 내 모든 기억·감정·희망, 그리고 ‘나’란 존재 그 자체를 양자컴퓨터에 업로드(upload)할 수 있다면. 본질적으로 불가능하지 않은 이 기술이 언젠가 실현되는 그 순간, 존재의 불안함과 궁극성을 극복한 인간은 드디어 신과도 같은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질문은 이거겠다. 만약 인간이 신이 된다면 신이 된 인간은 무엇을 원해야 할까.



김대식 독일 막스-플랑크 뇌과학연구소에서 박사학위를 땄다. 미국 MIT와 일본 이화학연구소에서 박사후 과정을 거쳤다. 이후 보스턴대 부교수를 지낸 뒤 2009년 말 KAIST 전기 및 전자과 정교수로 부임했다. 뇌과학·인공지능·물리학뿐 아니라 르네상스 미술과 비잔틴 역사에도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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