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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를 애니로 배웠네]<3>그의 코털 하나도 구원하지 못했네

목 늘어난 티셔츠에 나는 반했네




늑대아이(2012, 호소다 마모루 감독)

뒷모습이 슬퍼 보이는 남자가 있었다.

본격적으로 연애를 시작하기 전 한 달 가까이, 그는 매일 우리 회사 앞에서 나의 퇴근을 기다렸다.(맞다. 백수였다) 회식이나 야근으로 나의 퇴근이 늦어지는 날엔, 회사 길 건너편 골목 안쪽에 있는 편의점 테이블에 앉아 혼자 소주(!)를 들이켰다. 늦은 밤 일을 끝내고 편의점 골목을 들어서면, 세상의 우울을 한 데 그러모아 짊어진 듯한 넓은 어깨가 보였다. 그래서 결심했던 것 같다. 내가 이 남자를 구원하리.



늑대여도 괜찮아


이런 여자, 여기 또 있다. 호소다 마모루 감독의 애니메이션 ‘늑대아이’의 주인공 하나(花)다. 목이 늘어난 티셔츠를 입고 강의실 구석에서 홀로 수업을 듣는 한 남자(잘생겼다)에게 마음을 빼앗긴다. 쓸쓸해 보이는 그의 뒤를 따라가 말을 건 하나. 남자는 자신이 이 학교 학생이 아니며 도움도 필요치 않다고 차갑게 말하지만, 기어이 그를 꼬시고야 만다.(잘생겼으니까?) 빈 손으로 수업에 온 그에게 슬며시 교과서를 내어주고, 학생증이 없는 그를 대신해 도서관에서 책을 빌리기도 한다. 그가 일 때문에 약속에 늦는 날엔 하염없이 기다리다 미소로 반겨준다. 그렇게 사랑이 무럭무럭 자라기 시작할 무렵, 그가 고백한다. 나 사실, 늑대인간이야.



우린 사랑하니까


하지만 이미 그를 구원하기로 마음먹은 하나는 그를 받아들인다(잘생겨서는 아니겠지). 그리고 영화의 초반 10분 간, 둘의 알콩달콩한 사랑이 잔잔한 음악과 함께 펼쳐진다. 작은 들꽃으로 집안을 꾸미고, 늑대로 변신한 그가 잡아온 동물로 음식을 만들어 나누어 먹는다. 아르바이트와 학업(그리고 사냥)으로 일과는 고되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있어 웃음짓는 나날이다.



나의 연애 역시, 나름 즐거웠다. 그에게 편의점 소주 대신 제대로 된 밥과 술을 사주고(백수라니까), 뜻대로 풀리지 않는 세상사에 대한 고민을 함께 나눴다. 연이은 실패로 인한 상처를 들먹이며 “세상을 버텨낼 자신이 없다”고 햄릿처럼 말하곤 했던 그는 조금씩 기운을 찾는 것처럼 보였다. 주구장창 술만 마시던 일과에서 벗어나 함께 새로운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변하는 그를 보는 게 좋았다. 나로 인해 누군가의 삶이 바뀌고 있다는 느낌, 짜릿했다. 가끔 예의 그 쓸쓸한 표정으로 “너한테 미안하다”고 그는 말했지만, 평강공주에 빙의해있던 난 귀기울여 듣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사라졌다.



그렇다. 모든 연락을 끊고 조용히 잠적했다. 미국 드라마 ‘섹스 앤 더 시티’에 나오는 ‘포스트잇 이별 통보’보다 한 단계 위, ‘잠수 테러’를 당하고 만 것이다.



그러나 남은 것은


훨씬 비극적인 방식이었지만, 하나의 늑대애인 역시 사라졌다. 그녀가 둘째 아이를 출산한 직후였다. 사실 이 애니메이션의 시작은 여기서부터다. 남자는 떠나고 여자는 홀로 남아 그가 남긴 두 아이를 키운다. 평소에는 그냥 귀여운 인간 아이들지만, 흥분하면 귀와 꼬리가 쏙 하고 솟아나는 늑대가 된다. 하나가 특별한 이 두 아이를 키워내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과정이 이야기의 핵심이다. 짧은 사랑을 가슴에 품고 ‘모성애의 화신’으로 거듭나는 하나의 모습은 물론 감동적이다. 그러나 영화 초반 제멋대로 감정이입해버린 나는, 갓난 아이 둘을 품에 안고 울고 있는 하나의 모습이 등장한 이후부터 영화에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러게 쯧쯧, 남자의 슬픈 뒷모습 같은 데 반해서는 안 된다니까.



얘들아 정신 차리고 살자


다행히 내게 늑대로 변신하는 두 아이가 남은 건 아니었다. 그가 나에게 남긴 것은 계속된 음주로 인해 너덜너덜해진 위점막과 거기서 살포시 자라고 있던 헬리코박터 파일로리균뿐이었다. 틈틈이 그에게 전화를 걸면서(물론 그는 받지 않았다), 병원을 찾아 위 내시경을 하고 몇 주간 약을 먹었다. 균이 말끔하게 사라졌다는 낭보가 전해질 무렵, 침묵하던 그가 메시지를 보내왔다. 반야심경처럼 길게 이어진 이 메일의 요점은 이거였다.

“고맙고 미안하다. 하지만 나는 너의 기대에 부응할 자신이 없다.”

그 편지를 아침저녁으로 복습하며 나는 깨달았다.

나는 내가 아닌 다른 이의 코털 하나도 구원할 수 없다.

그리고 그 후, 나는 나 자신을 구원하는 데만 온 힘을 쏟으며 살기로 결심했다.

워너비 팜므포탈 기자 sexybomb@joongang.co.k*r



※기자 이름과 e메일 주소는 글 내용에 맞춰 허구로 만든 것입니다. 이 칼럼은 익명으로 게재됩니다. 필자는 중앙일보 문화부 기자 중 한 명입니다. 매주 금요일 업데이트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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