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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호의 시시각각] 청와대판 '땅콩 회항'도 시간문제?

이철호
논설실장
“요즘 참 피곤하다. 옛날이 그립다. 그때는 신문·방송만 막으면 됐었는데….”



 대한항공 ‘땅콩 회항’의 공판을 지켜보는 대기업 홍보 임원들의 한결같은 넋두리다. 이 사건은 언론을 통해 공개된 게 아니다. 대기업 직원들의 스마트폰 익명 게시판인 ‘블라인드(blind) 앱’에 처음 올랐다. 사건이 발생한 지난해 12월 5일 그날, 대한항공 블라인드 앱에 ‘내려!’라는 제목으로 상세한 전말이 올라왔다. 뉴욕과 서울의 시차를 감안하면 뉴욕 현지에서 거의 생중계된 셈이다. 여기에 “이런 사안은 바깥에도 알려야 한다”며 대한항공 직원들이 분노의 댓글을 달면서 외부에 알려졌다.



 이 사건의 또 하나 변곡점은 1등석에서 현장을 목격한 여성 승객의 증언이다. 그녀는 소란이 일어났을 때 네이버의 ‘라인’으로 친구와 실시간으로 문자를 주고받았다. 휴대전화에 남아 있는 ‘(조현아 전 부사장이) 승무원을 밀었다’ ‘파일을 말아 벽을 쳤다’ ‘사무장이 내렸다’는 메신저 문자들은 고스란히 검찰에 증거로 제출됐다. 은폐와 거짓말에 급급했던 대한항공에 온 사회의 분노가 집중됐다. 이 모두 SNS가 바꿔놓은 세상이다.



 예전부터 ‘을’의 놀이터는 존재해 왔다. 가장 고전적인 형태가 일부 회사들이 자체 인트라넷에 개설한 익명 게시판. 하지만 회사 보안팀에 미운털이 박힐까 개점휴업이었다. 3년 전에는 익명의 SNS인 ‘대나무숲’이 반짝 인기를 끌었다. 출판업계·광고업계 등의 ‘을’들이 마음껏 뒷담화를 늘어놓았다. 그러나 경쟁업체에 대한 지나친 비방, 도를 넘는 인신 공격, 그리고 계정이 해킹당하면서 시들해졌다.



 이에 비해 블라인드 앱은 스마트폰으로 직장을 입력한 뒤 회사 e메일을 통해서만 인증받는 폐쇄형이다. 외부인이 분탕질치기 어렵다. 여기에다 ‘닉네임(별명)’을 사용하고, e메일 정보도 암호화해 관리자조차 접근할 수 없다. 서버는 해외에 두었다. 블라인드 측은 “서버를 통째로 들고 가도 글쓴이를 추적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익명성·보안성 아래 마음껏 ‘디스’하는 운동장이다. 이런 블라인드가 눈에 가시 같은 존재가 되면서 반격도 거세다. 일부 기업들은 블라인드 앱 사용을 금지하고, 회사 전산팀에서 특정 주소의 e메일을 차단해 가입 인증을 막고 있다.



하지만 반격이 성공할성싶지 않다. 요즘 SNS는 개방·공유에서 익명·폐쇄로 방향을 트는 게 대세다. 트위터와 페이스북 등은 이미 소통의 공간이 아니라 동원의 공간으로 변질돼버렸다. 개방형 SNS에선 누군가 나를 지켜볼지 모른다는 자기 검열에다 광고까지 범람하면서 피로감이 높아졌다. 최근 미국 10~20대 사이에 익명 메신저인 ‘시크릿’ ‘위스퍼’가 선풍을 일으킨 것이나, 실명을 고집해 온 페이스북까지 익명 채팅인 ‘룸’을 만든 것도 이 때문이다. 발칙한 뒷담화는 음습한 그늘에서 번식하기 마련이다.



 이미 흐름을 되돌릴 수 없다는 통계도 나왔다. 지난해 한 달 평균 4곳 정도 만들어지던 블라인드 앱이 올 들어 보름 만에 무려 11개 곳이나 개설된 것이다. 여기에다 카카오톡 검열 논란 이후 플래시챗까지 인기다. 익명성과 보안성의 플래시챗은 10분 이내에 모든 정보와 흔적이 사라진다. 익명의 SNS는 더 이상 막기 힘든 현실이다.



 그렇다면 기업들만 폭로의 희생양이 될까. 블라인드 앱은 지난해 3월 31일, 청와대 문양을 띄워놓고 청와대 직원들에게 블라인드를 만들라고 은근히 유혹한 적이 있다. “다음 ‘블라인드’ 차례는 요즘 대한민국에서 가장 응어리가 많다는 그곳?”이란 문구와 함께…. 어쩌면 청와대판 ‘땅콩 회항’이 노출되는 건 시간문제일지 모른다. 더구나 내부 폭로에는 권력 암투·골육상쟁이 최적의 서식 환경이다. 만약 ‘정윤회 문건’이 익명의 SNS를 통해 유포됐다면 꼬리조차 안 밟혔을 것이다. 여·야당과 정부부처, 지방자치단체들도 마찬가지다. 내부 소통을 늘리며 미리 몸조심을 하는 게 상책이다. 더 이상 돈이나 권력으로 익명의 SNS를 누를 수 없다. 면피성 사과로 ‘갑질’을 덮고 갈 수도 없다. 한 방에 훅 가는 무서운 세상이다.



이철호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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