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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RI 리포트] 일제 식민지 근대화론 vs 수탈론

1930년대에 건설된 겸이포 제철소. 수탈론자들은 이 같은 공장이 조선을 약탈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는 반면, 근대화론자들은 조선 경제의 성장에 기여했다고 보고 있다.

일본의 역사 교과서 왜곡으로 과거사 논란이 뜨겁다. 일제 식민지 지배로 근대화가 저해됐으며 경제가 피폐됐다는 게 우리 측 주장이다. 그러나 일본 교과서는 오히려 식민지 조선의 근대화를 도운 것으로 기술돼 있다. 국내에도 이러한 일본 측 주장에 동조하는 학자들이 있다. "일본의 식민지 지배가 축복이었다"는 감성적인차원이 아니라, 각종 기록과 데이터를 분석하고 이 시기를 살았던 국민들의 증언을 검토한 후 '식민지 시대가 근대적 경제성장의 기점'이란 결론을 내리고 있다. 보다 냉정하게 일본에 대처하기 위해서라도 식민지 시대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따져봐야 한다. 식민지 근대화론과 수탈론의 논쟁을 소개하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편집자


일제 식민지 시대에 한국경제는 성장했는가. 성장했다면 어느 정도였을까. 그리고 일본은 경제성장에 기여했을까.

안병직 전 서울대 교수가 설립한 낙성대경제연구소(소장 이영훈 서울대 교수)에서 활동하는 학자들은 대체로 이런 물음에 긍정적으로 답변한다. 이들은 1990년대부터 한국경제는 19세기 후반에 극심한 위기에 시달렸지만, 식민지 시대에는 3%대 후반의 고도 성장을 해왔다고 주장하고 있다. 일제 시대엔 약탈과 침략밖에 없었다고 주장해온 기존의 수탈론에 큰 충격을 줬음은 물론이다. 이때부터 수탈론과 식민지 근대화론 간에 본격적인 논쟁이 시작됐다.



◆식민지 시대에 경제가 성장했는가=차명수(영남대)교수는 한 논문에서 "식민지 시대는 한국이 근대적 의미의 경제성장을 시작한 시기"라고 주장했다. 이 기간 중 연평균 경제성장률은 4.2%(차 교수)였으며, 1인당 소비 증가율도 연평균 3.7%나 됐다(김낙년 동국대 교수). 산업구조도 근대적으로 변했다. 농업이 국내총산업생산액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918년 85%에서 52%로 낮아진 반면, 공업 비중은 8%대에서 26%대로 상승했다. 한국인이 소유한 공장도 1910년 39개에서 1938년 3963개로 늘어났다. 또 근대적 의료기술이 도입돼 사망률이 낮아지면서 인구가 빠른 속도로 증가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미 하버드대 한국학센터의 카터 에커트 소장도 같은 입장이다. "조선왕조가 개항기 시절 추진했던 산업화 노력은 실효를 거두지 못했지만, 식민지 시기의 개발정책은 산업발전을 촉진시킨 촉매이자 요람이었다"는 것이다.

근대화론에 비판적인 학자들은 이 시기의 경제성장을 중시하지 않는다. 정태헌(고려대)교수는 "식민지 시기의 성장은 큰 의미가 없다"고 지적한다. 일본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공업화를 추진했기 때문에 한국의 공업구조는 왜곡됐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가령 일본 내 기업들과 경쟁을 벌였던 방적공업의 경우 일본 기업들이 원재료 분야에 투자를 하지 않아 자급도가 낮았다. 그러나 일본 기업에 납품하던 화학공업은 원재료 분야의 투자가 많아 자급도가 높았다는 것이다. 게다가 한국인 기업이 성장했다고 하지만 일본인이 국내 회사 자본금의 거의 대부분(90%)을 가지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이와 관련, 박섭(인제대)교수는 "근대화론은 식민지 시기에 얼마만큼 생산이 늘었는지에 초점을 맞추는 반면, 수탈론은 성장 잠재력이 더 높아졌는지에 더 관심이 있다는 점이 다르다"고 지적한다.

◆일제 총독부는 성장에 기여했는가=근대화론에 따르면 식민지 기간 중 조선의 고도성장에 조선총독부가 기여한 바 크다. 은행 등 근대적인 금융기관들이 생겼으며, 토지조사사업을 통해 소유권 제도가 확립됐고, 조세 행정체계도 정비됐다. 또 일본에서 투자설명회를 여는 등 투자 유치에도 노력했다는 것이다.

경제위기에 허덕이던 19세기 후반과 크게 다른 모습이다. 차 교수는 "조선 후기의 전통사회는 오늘날의 북한처럼 무너져 가고 있었다"고 지적한다. 인구와 생산이 늘기는커녕 오히려 줄어들었다. 1900년께의 임금과 땅값은 100년 전인 18세기 초반에 비해 10분의 1 수준에 불과했다. 그런데도 조선왕조는 국민들의 역량을 모아 경제위기를 돌파할 계획을 만드는 데 실패했다. 이렇게 무너져 가던 조선이 식민지 시기부터 고도성장으로 돌아섰다면 뭔가 다른 요인이 있었을 것이고, 그게 바로 조선총독부의 역할이 아니겠느냐는 의미다.

반면 수탈론자들은 19세기 후반의 위기론에 동의하지 않는다. 오히려 조선이 홀로 설 수 있는 가능성을 보인 시기라고 본다. 상공업자들이 성장하기 시작해 상품 생산과 이에 따른 시장경제가 싹을 띄우고 있었으며, 개인 소유제도가 진전했고, 노동력의 자유로운 이동을 가로막는 노비제도 매우 축소됐다. 인간의 이익을 위해 자연을 활용한다는 실용주의적 관념과 교육 중시 사상, 서민예술 등도 발전하기 시작했다고 본다. 이렇게 올라오던 근대화의 싹이 일제의 식민지 지배로 잘렸다는 게 수탈론의 주장이다. 가령 이태진(서울대)교수는 "(1897년부터 시작된)광무개혁이 뜻밖의 성과를 올리자 이를 경계한 일본이 러일전쟁이란 비상수단을 동원해 국권을 탈취했다"고 지적한다. 근대화론도 19세기 후반의 긍정적 변화를 부정하진 않는다. 다만 그 변화가 미미했기 때문에 조선이 홀로 근대화를 하긴 힘들었을 것이라는 입장이다.

◆독립운동을 보는 시각도 달라=양측은 독립운동을 보는 시각도 다른 편이다. 수탈론자들은 당시 한국인들은 저항과 민족 독립을 최우선시했다고 본다. 고통의 근원이 일제 지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는 주장이다. 소작쟁의와 노동운동도 민족 독립운동 차원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근대화론자들은 모든 것을 독립운동으로만 이해하는 것은 무리라는 입장이다. 농민들은 조선총독부가 제공하는 농업기술을 별다른 저항감 없이 수용했으며, 기업가들은 투자를 위해 조선총독부 등으로부터 돈을 빌리려 했다는 점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인들은 저항과 협력 사이에서 갈등해 왔고, 이것이 당시 사회의 실상이 아니겠느냐는 의미다.

양측의 논쟁이 치열해지면서 통합하려는 움직임도 일고 있다. 허수열(충남대)교수는 "식민지 시대에 성장한 것은 사실인데도 수탈론은 이를 도외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그는 또 "근대화론도 개발을 지나치게 강조할 뿐, 조선인들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지 못한 '개발 없는 개발'이었음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문제가 있다"고 주장한다. 박섭 교수도 "식민지 시대에 긍정적인 변화가 있었음을 부정할 순 없다"면서도 "그러나 그것이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할 순 없다"고 말했다.

김영욱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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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