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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21)제79화 육사졸업생들(174)

오씨로부터 윤계민중위를 중공군에게 고발하라는 부탁을 받은 백씨는 그럴 수가 없다고 판단, 오씨 몰래 전처럼 통역, 중공군의 의심을 물어 돌려보냈다.
백씨는 오씨에게 윤중위를 자기집으로 옮길 테니 앞으로 절대 그런 소리를 하지 못하도록 부탁했다. 윤중위는 백씨 집에서 며칠을 더 지낸 뒤 3월 중순 미해병수색대에 발견돼 극적으로 구조됐다.
그로부터 27년후 3성 장군이 된 윤장군은 근처를 지나다 옛날 생각이나 그때 자신을 살려준 은인들을 찾았다고 한다.
백방으로 수소문한 끝에 당시의 젊은 며느리 원준희씨와 백씨를 찾아내고 감격의 해후를 했다는 말을 들었다.
윤장군은 원씨 집 앞 빈터에 대지 1백50평 건평 23평의 아담한「보은의 새집」을 한채 지어주었고 백씨에게는 담장을 새로 쌓아주고 아담한 광을 지어주었다고 한다.
6·25의 비극 중에 피어난 한편의 인정가설라 하겠다.
강대하소위 (58·대령예편·현대한광학사장)는 50년 가을 북진때 청천강근처서 중공군의 기습을 받고 부상, 포로가 됐다가 비오는 날 이송중 감시 소홀을 틈타 탈출, 밤에만 남쪽으로 걸어 8일만에 아군진지에 귀환해 살아났다.
윤수용소위(58·대령예편·현대우상사회장) 도 7연대 수색중 대장으로 압록강변 혜산진까지 북진했다가 중공군에 프로가 돼 한달만에야 탈출, 돌아왔다.
9기생들은 소대장 (소위) 으로 6·25를 맞아 중대장을 거쳐 일부가 대대장까지 이르렀을 때 휴전이 됐다. 대부분 초급장교로 전쟁을 치렀기에 특별히 개별적인 전공을 소개하기는 어렵다.
모두들 용감하게 싸웠고 운이 좋은 사람은 살아남아 훗날 장성에까지 긴급했다고 하는 편이 좋겠다.
그러나 그중 동기생들이 기억하는 몇몇 무공담은 빛나고있다. 51년 5사단방연대1대대 작전주임으로 양구 피의 능선 김일성고지(1천2백m)전투에 참가했던 나동원중위(소장예편·현아세아자동차사장) 는 대대잔류법력 2백70여명을 이끌고 야간공격을 감행, 고지를 점령해 충무무공훈장을 받았고 나중 월남전서도 활약했다.
김창범소위(54·소장예편·현망삼미업사장)는 개전초 동두천북방 창말고개 전투서 1연대 대전차포증대 소대장으로 적 탱크부대에 집중공격을 퍼부어 진격을 일시 저지했고 19연대 3대대소속김구기소위(대령예편)는 충주근지암전투서 적 1개중대병력을 기습 사살했다.
충남공주 추구지구전투서 적유격대 2개중대를 무찌른 조돈철소위 (60·중령예편·현대한통운이사대우부방)등의 무공도 동기생들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정훈범과 9기생의 활약도 빼놓을 수 없다.
6·25중반 1연대 정훈장교로 배속된 장근환중위(57·소장예편·현동방해상화재보험고문) 는 정훈활동으로 처음 화랑무공훈장을 받았다.
장중위는 용문산지구 전투때 40명의 정훈요원을 중대마다 2명씩 배치, 활발한 진중정훈활동을 해 연대의 사기를 높이는데 기여했다.
피아간 일진일퇴의 공방전이 밤낮없이 계속되던 어느날 이었다. 연대의 외곽을 수비하고 있던 9중대가 적의 기습공격으로 붕괴될 위기에 빠졌다.
갑작스런 적의 돌격에 당황한 아군이 밀리고 있을 때 정훈요원으로 9중대에 배치된 서기종일병이『사나이 대장부가 나라 위해 죽는데 무엇이 두려우냐. 기왕에 죽을 바엔 떳떳이 죽자』고 크게 외치며 앞장서 참호를 뛰쳐나갔다.
중대원들은 서일병의 대갈일성에 용기백배, 일제히 참호를 뛰쳐나가 백병전 끝에 적의 공격을 완전히 무찔렀다고 한다.1연대는 여세를 몰아 한달음에 화천북방 백암산까지 적을 밀어붙여 진격할 수 있었다고 한다.
어떻게 보면 사소한 것이지만 바로 순간적인 심기의 변화가 전투의 승패를 결정하고 전반적인 전세에 까지 영향을 미친 극적인 예라 하겠다.
특히 군의 사기는 이처럼 중요한 것이다. 그와 함께 정훈의 중요성도 입증된 셈이다.
이 전투를 승리로 이끈 정훈활동의 공으로 장근환중위는 화랑무공훈장을 받았으며 서기종일병은 충무무공훈장과 미은성무공훈장을 받았다.
정훈장교제도는 이범석국방부장관의 아이디어였다. 당초 미측에서는 나치독일이나 적군의 정치장교와 비슷한 것이 아니냐고 오해, 반대가 많았었다.
우여곡절 끝에 8기생때 처음 정훈장교 1기 후보생이 모집돼 함께 교육받아 임관했고 정훈 2기가 9기로 입교했던 것이다. <계속> 장창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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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