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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 만에 죽은 동료, 손가락 잘린 친구 … 파독광부는 밤마다 울었다

파독광부. 이 단어에는 많은 의미가 담겨 있다. 못사는 나라 국민의 설움, 가족을 위한 무한한 희생,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전환점 …. 권이종(75) 한국교원대 명예교수도 이런 파독광부 중 한 명이었다. 그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돈을 벌기 위해’ 독일 탄광을 택했다. 암흑이라 생각한 머나먼 타지에서 마음 속에 담아뒀던 어릴 적 꿈을 다시 꺼냈고 이를 실현시키고 말았다. 어찌 그 길이 순탄했겠는가. 그의 인생에서 전환점(Turning Point)이라 할 만한 5가지 사건을 따라가봤다.

파독광부 시절에 찍은 권이종(왼쪽)씨의 사진에 50년이 흐른 현재 권씨(오른쪽)의 모습을 합성했다. [김경록 기자]


생애 처음 가슴에 꿈을 품다

장수 산서국민 학교에 다니던 어린 시절.
“대통령이 뭔지도, 장관이 뭔지도 모르고 시골에서 살던 때예요. 그 시절 동네에서 가장 존경 받는 분은 바로 초등학교 선생님이셨죠.”

권이종 교수는 전라북도 장수군 산서면에 있는 산골 마을에서 태어났다. 주위는 논과 밭뿐이었다. 그나마 구색 갖춘 작은 장에라도 가려면 3㎞를 걸어나가야 했다. 어린 눈으로 바라본 작은 세상에서 선생님이 ‘신(神)’처럼 보였다. 산서국민학교(현 산서초등학교) 2학년 때 담임이 “커서 선생님이 돼라”는 말을 했다. 이때부터 그는 ‘초등학교 교사’라는 꿈을 품었다.

그는 2남 2녀 중 막내다. 13살 터울 형은 학교를 4년 만에 중퇴했고 두 누나는 학교 문턱도 가보질 못했다.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운 집안이었다. 하루 한 끼조차 보리 조금 넣은 묽은 죽을 쑤거나 산에서 벗겨온 소나무 껍질에 쌀겨를 버무려 만든 떡으로 해결할 때가 많았다. 여섯 식구가 사는 쓰러져가는 초가집은 기울어진 문틀에 문이 제대로 맞지 않아 겨울 찬바람을 제대로 막아내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학교 다니는 일은 당연히 쉽지 않았다. 그나마 다른 형제와는 달리 초등학교라도 졸업한 것에 만족해야 할 형편이었다. 물론 농사일 돕느라 학교 안 가는 날이 많았지만 말이다.

그런데 그가 14살 나이에 ‘사고’를 쳤다. 가족 몰래 중학교 입학 시험을 쳐 합격해 버렸다. “친구들이 쓴 중학교 모자를 보니 눈이 뒤집히는 거예요. 고생을 한다해도 학교를 다니고 싶었어요. 일류 중학교였던 전주 북중은 떨어졌지만 동중에는 합격했지요.”

그의 어머니는 철없는 행동이라며 꾸지람을 하는 대신, 없는 살림에 빚까지 내 아들의 머리에 학생모를 얹어주었다.

예상대로 중학교 입학은 그에게 새로운 고생길이었다. 전주 달동네 판자촌에 홀로 살며 월세와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신문배달을 했다. 새벽 5시 서울에서 내려온 신문 100여 부를 받아 들고 매일 아침 1시간30분을 뛰어다녔다. 석간이 있던 시절이라 저녁에도 이 일을 반복했다. 이렇게 벌어도 월세와 학교 등록금을 내기 어려웠다. 배고픔은 항상 따라다녔다. 그나마 전주천 옆 남문시장에서 파는 자장면이 싼 값에 먹을 수 있는 별미였다.

“시장통에서 가격이 제일 쌌어요. 고기 한 점 없는 자장면이었지만 어찌나 맛있던지 그걸 먹을 때면 몇 그릇씩 배가 터지도록 먹었죠.”

힘들었지만 학교 다니기를 포기하고 싶진 않았다. 피곤해서 교실에서 졸지언정 학교는 나갔다. 중학교 졸업 후, 그는 전주에 있던 명문고등학교 입학시험을 봤지만 떨어졌다. 한 농업고에 들어갔지만 적성에 맞지 않았다. 1년 만에 인문계 고등학교에 가겠다고 마음 먹었다. 2학년으로 올라가는 그해 2월, 무턱대고 전주신흥고등학교를 찾아갔다. “교장선생님을 만나게 해달라”는 까까머리 학생 부탁을 서무과 직원은 거절했지만 2~3일 간격으로 세 번 찾아가니 2학년으로 들어갈 수 있게 해줬다. 그로부터 2년 후 그는 고등학교 졸업장을 손에 쥐었다. 집안 농사 일을 돕는 대신 공부를 택한 그의 선택이 옳았는지는 그 당시 그도 알 수 없었다.

지하 1000여m의 탄광에서도 틈틈이 봤던 독일어 문법책. 석탄을 묻혀가며 공부한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다.


형님 소(牛) 판 돈으로 ‘도박’을 하다

중학생 때 13살 터울의 형과 함께.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곧바로 군에 들어갔다. 3년이 지난 1963년 고향에 돌아왔지만 얼마 안돼 오촌 여조카를 따라 서울로 갔다. 형님이 쓰러져 가던 고향집을 부수고 새집을 지을 때였다. 농사 일은 둘째치고 남자 일손 하나가 아쉬울 때였지만 이번에도 가족들은 별말 없이 그를 보내줬다.

“서울은 기회의 땅이잖아요. 그곳에 가면 나에게도 분명 기회가 올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 기회가 도대체 어떤 것인지 그는 몰랐다. 올라와서 한 일은 ‘막노동’이었다. ‘함마’라 불리는 큰 망치로 철근을 자르고 모래와 벽돌을 등에 지고 건물을 오르내렸다. 잠은 또 다른 조카가 왕십리에서 하는 헌책방에서 청했다. 책 사이에 있던 빈대들이 밤이면 피를 빨아먹는 통에 밤잠을 설치곤 했다.

그러던 중 공사장에서 같이 일하던 대학생이 ‘파독광부’ 이야기를 꺼냈다. 파독광부 모집 공고가 신문에 실리고 많은 이들이 신청하러 몰려들 때였다. 광부 월급이 당시 국내 공무원 월급의 10배라는 말이 심심치 않게 들려왔다.

권이종씨가 파독광부 시절 독일어로 썼던 일기장과 코담배 통. 코담배는 콧속을 자극해 달라붙은 석탄가루를 재채기와 함께 뽑아내는 데 쓰였다고 한다.
그는 파독광부를 가난에서 벗어날 기회로 생각했다. 문제는 자격 요건 중 1년 이상 광부 경력이 있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방법은 딱 하나 경력증명서 위조였다. 당시 증명서 위조는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광부 경력 있는 사람만을 모집하는데 젊은이 수천 명이 몰렸다는 사실이 이를 말해준다. 증명서를 만들려면 브로커에게 소 한 마리 값에 버금가는 돈을 줘야 했다.

돈을 마련하려고 고향을 찾았다. “내가 독일 광부로 가서 돈 많이 벌어가지고 소도 사주고, 논·밭도 사주겠다고 설득했어요.”

형님은 전 재산이나 마찬가지인 소 판 돈을 그에게 쥐어줬다. 뒤돌아보면 무모한 도박이었다. 설사 위조 증명서가 걸리지 않는다 해도 파독광부 시험에 불합격하면 그 돈은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다. 브로커에게 사기 당하는 사례도 종종 있었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발표날만 기다렸다.

다행이라는 말로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그는 64년 1차 2진 파독광부에 합격한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가장 힘들었다

파독광부로 일하던 시절.

64년 10월 5일. 그의 나이 스물 네 살이었다. 그는 같은 기수 429명과 함께 김포공항에서 독일행 루프트한자(Lufthansa) 비행기에 올랐다. 그가 일할 곳은 독일 메르크슈타인(Merkstein) 지역 아돌프(adolf) 탄광이었다.

지하 1000m를 내려가 거기서 또 3~4㎞를 전철로 이동해야 작업장이 나왔다. 빛이 들지 않는 암흑 속에서 헤드랜턴 불빛에 의지해 8시간 동안 일해야 했다. 지열은 36℃에 육박했다. 땀이 비오듯 쏟아졌다. “(작업복에) 엉덩이·무릎 보호대는 필수였죠. 공기가 정말 탁한데 너무 더워서 마스크를 못해요. 마스크 쓴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니까요.”

고된 타국 생활에 가족과 고향 생각이 절로 났다. 밤마다 눈물을 흘렸다. 무엇보다도 그가 가장 힘들었던 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작업을 시작한 지 일주일 만에 동료를 잃었다. 천장 붕괴 사고였다. 죽은 동료는 유학을 목적으로 왔다고 했다. 기계에 손가락이 절단되고 다리를 다치는 등 크고 작은 사고들이 종종 터졌다.

한 독일 탄광의 갱도 모습. 그는 주로 이런 곳에서 일했다고 한다. [사진 권이종 ADRF 회장]

“죽음과 사고가 두려웠어요. 제대로 돈도 벌지 못하고 부모·형제 얼굴을 다신 못 볼 수도 있고, 불구자라도 돼버리면 어쩌나 불안했죠.”

그도 사고를 피하지 못했다. 독일에 와 8개월이 지났을 무렵(65년 6월 30일) 바위더미가 무너져 왼손을 짓이기고 말았다. 한 달 동안 병상 신세를 져야 했고 지금도 왼손에 거의 힘을 주지 못한다.

광부를 하며 생긴 직업병이라고나 할까. 그는 지금도 고층에서 아래층으로 내려갈 때면 웬만해선 엘리베이터를 이용하지 않는다.

“꼭 광산에 들어가는 느낌 같거든요.”

더디게만 흘러가던 광산에서의 3년도 어느덧 종착점에 이르렀다. 계약기간이 만료된 거다.

100㎞를 달려온 그가 내 인생을 바꿔놓다

그의 운명을 바꿔 놓은 은인인 독일 로즈마리 부인과 함께.

그는 독일 생활을 하며 썼던 모든 짐을 한국 가족에게 보내놨다. 드디어 귀국 날, 뒤셀도르프 공항에 탑승수속도 마쳤고 한국행 비행기에 오를 일만 남아 있었다. 오스트리아 출신 로즈마리 부인과 그의 딸이 공항에 나타났다. 광부 계약 기간이 1년도 남지 않은 67년 초에 독일에서 만난 가족이었다. 특히 당시 예순이었던 로즈마리 부인은 그가 양어머니로 모실 만큼 가까운 사이였다. 그런 그녀가 공항에서 100㎞ 떨어진 에슈바일러(Eschweiler)에서 그의 한국행을 말리러 온 거였다.

“독일에서 광부로만 지내다 가는 게 무슨 의미냐며 남아서 좀 더 공부를 하라고 하셨어요. 평소 내 꿈이 초등학교 교사라는 것, 그리고 항상 공부를 하고 싶어하는 내 마음을 알고 계셨거든요.”

결국 그는 독일에 남기로 결심한다.

“빨리 귀국하고 싶다는 마음 한 켠에는 독일 대학에서 공부해 보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던 것 같아요. 하지만 공항까지 가놓고서는 왜 그런 결단을 내렸는지 지금까지도 나 스스로 이해가 안 가요.”

그는 로즈마리 부인의 도움을 받아 68년 4월에 아헨교원대에 입학한다. 이곳에는 또 다른 조력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 사범대 학장으로 있던 푀겔러 교수다. 그 교수의 허락으로 외국인 신분이었지만 입학할 수 있었고 아르바이트 자리를 알아봐 줘 생활비를 마련할 수 있었다.

든든한 조력자가 있어도 제2의 독일생활이 쉽지만은 않았다. 서툰 독일어 실력으로는 전문용어가 오가는 수업을 따라가기 벅찼다. 성적은 당연히 좋지 않았다. 정붙일 한국인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학교에서 그의 외로움은 커졌다. 학교에서 유일한 안식처는 누구의 시선도 느낄 수 없는 화장실이었다. 사범대 1층 화장실, 입구에서 가장 먼 수세식 좌변기 칸. 그곳에서 그는 혼자만의 시간을 보냈다.

71년 그는 독일에 간호학생으로 유학 온 지금의 아내를 만나 결혼했다. 이를 계기로 그의 마음도 안정을 찾아갔다. 맞벌이를 하면서 형편도 나아졌다. 그러나 시련은 또다시 찾아왔다. 첫딸을 잃었다. 태어난 지 5개월, 이유는 질식사였다. 그와 아내가 공부와 일 때문에 바빠 남의 손에 맡기고 석 달이 흘렀을 때였다. 싸늘하게 식어버린 아이 앞에서 눈물밖에 흘릴 수 없는 자신이 싫었다. 40여 년이 흐른 지금도 아이에 대한 마음의 빚은 여전히 남아있다.

가슴에 아이를 묻은 채 그는 다시 책을 펼쳐 들었다. 남들은 4년 걸릴 대학 공부를 6년 만에 끝내고 푀겔러 교수의 권유로 석·박사 학위에도 도전했다. 공부를 시작한 지 11년 만에 그는 독일 교육학 박사가 됐다. 박사 학위를 받고 몇 달 후 그는 말 그대로 ‘금의환향’해 귀국했다. 한국을 떠난 지 꼭 14년 만이었다.

귀국, 드디어 꿈을 펼치다

교수로 재직 중이던 한국교원대 대학원생들과 함께.

독일에서 평생교육 및 청소년학을 전공한 그는 한국에 돌아와 직접 교수 자리를 알아봤다. 고향에서 가까운 전북대 교육학과에 79년 9월에 강의를 시작했다. 1년여가 흐르고서는 문교부(현 교육부)에서 상임자문위원으로 파견근무를 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80년에 개정된 헌법에 ‘국가는 평생교육을 진흥해야 한다’는 조항이 생기면서 정부가 평생교육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해서다. 이 분야 전문가가 필요했던 거다. 자문위원으로 있던 3년 동안 사회교육법(현 평생교육법)을 만드는 데 일조했다. 이후 한국교원대 교육학과 교수로 자리를 옮겼다. 84년부터 2006년 퇴임하기까지 22년을 이곳에 있었다. 2001년에는 3년간 한국청소년개발원(현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 원장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지금은 개발도상국 아이들에게 교육 지원을 해주는 비영리 민간단체인 아프리카 아시아 난민교육후원회(ADRF) 회장을 맡고 있다.

그는 지금도 가끔 파독광부 시절을 떠올린다. 그럴 때면 얼굴에 눈물과 미소가 함께 번진다. “작년에 내가 일했던 독일 탄광에 다녀왔어요. 예전에 얼마나 힘들었으면 바라만보는데도 눈물이 핑 돌더군요. 그런데 난 그렇게 생각해요. 가난이 준 선물이라고. 파독 광부가 아니었다면 대학교수 권이종은 없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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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조한대 기자
사진=김경록 기자

자, 퍼즐 맞추기를 한번 시작해볼까요. 서로 아무 상관 없을 것 같은 보통 사람들의 개별 인생을 이어붙여 한국 현대사를 총정리하는 ‘당신의 역사’ 시리즈를 시작합니다. 따로 떼 보면 아무 것도 보이지 않지만 다 맞추고 나면 원래의 큰 그림이 보이는 직소 퍼즐처럼 말이죠. 호텔업계와 영화계·교육계 등 여러 분야에서 일하는 보통 사람들의 특별한 인생을 퍼즐 맞추듯 재밌게 한번 이어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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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중앙일보 입사 이래 북한 문제와 양자 외교 관계를 비롯한 외교안보 현안을 오래 다뤘다. 편집국 외교안보부장ㆍ국제부장과 논설위원ㆍ도쿄총국장을 거쳤고 하버드대 국제문제연구소(WCFIA) 펠로우를 지냈다. 부소장 겸 논설위원으로 외교안보 이슈를 추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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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