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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현진 기자의 아웃사이더]조선시대엔 잊힌 광개토대왕

광개토대왕 영정
‘아웃사이더’의 첫 번째 주제는 광개토대왕과 고정관념에 대한 것입니다. 뜬금없이 광개토대왕과 고정관념이라니…의아하실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이야기를 끝까지 듣고나면 조금은 고개가 끄덕여질 것입니다. 오늘 이야기의 핵심은 광개토대왕이 대중에게 잊힌 이유입니다. ‘역사NIE’ 21회 광개토대왕 편(중앙일보 열려라공부 1월 7일자)에서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광개토대왕은 대중에게 잊힌 왕이었다”라고 간단하게 언급하는데 그쳤지만, 오늘은 그 이유에 대해 고민해보고자 합니다.

광개토대왕,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민족의 영웅입니다. 좁디좁은 한반도를 넘어 만주·간도 등 광활한 영토를 통치했던 그는 한민족의 자긍심을 일깨우기에 충분한 인물이죠. 하지만 광개토대왕이 대중에게 제대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불과 100년이 조금 넘었을 뿐입니다.

광개토대왕은 1905년 ‘황성신문’에 광개토대왕릉비의 내용이 소개되면서 비로서 한국인은 광개토대왕의 존재를 알게 됐습니다. 20세기에 들어서야 광개토대왕을 인지하기 시작했다는 말입니다. 그는 잊힌 왕에서 일약 민족의 영웅으로 올라서게 됩니다. 시대의 요구였던 부분이 컸습니다. 당시 일제의 침탈이 본격화되던 시기였기에 짓밟히고 상처입은 민족의 자존심을 다시 일깨워 줄 수 있는 영웅이 필요했습니다. 역사학자들은 광개토대왕에 주목했습니다. 그는 그렇게 민족의 영웅으로 재발견됐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광개토대왕은 왜 대중에게 잊혔는가의 문제 말입니다. 아무리 고대사 기록이 부족하다고 해도 대중이 광개토대왕을 기억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좀체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민담이나 전설의 형태로조차 광개토대왕의 이야기는 전해지지 않았다는 점은 이해하기 힘든 부분입니다. 고구려와 관련해선 온달과 평강공주의 이야기가 더 유명했습니다. 사람들은 온달은 기억했어도 광개토대왕은 기억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광개토대왕릉비
역사학자 김용만씨는『광개토대왕의 위대한 길』에서 이와 관련해 재미있는 해석을 내놓고 있습니다. 바로 조선시대 사람들의 고정관념에 대한 것입니다. 지금 중국 집안시에 있는 광개토대왕릉비는 높이 6.39m, 무게 37톤의 거대한 크기 때문에 그 이전부터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었습니다. 당시 고구려의 수도였던 국내성으로 추정되고 있는 집안시에는 한 변의 길이가 85m, 높이가 15m에 이르는 천추총이라는 거대한 무덤도 있습니다. 1966년 조사 당시 이런 크고 작은 무덤이 1만1300여 개에 달했습니다. 20세기 초까지는 국내성 성벽의 흔적도 뚜렷이 남아있었다고 합니다. 이정도 거대한 규모의 유적이 사람들의 눈에 안 띄었을리가 없습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습니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알고는 있었지만 그것이 우리 조상의 것일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금나라 황제의 무덤과 비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조선 세종 때 지은 『용비어천가』 39장 해제에는 “압록강 너머 너른 벌판, 속칭 대금 황제성이라고 부르는 옛성의 북쪽 7리에 비석이 있다”고 적고 있습니다. 조선 최초의 백과사전으로 불리는 『지봉유설』 ‘능묘’ 편에는 “만포진 건너편에 큰 무덤이 있는데, 황제의 묘라고 전한다”라는 문구도 보입니다. 거대한 비석, 수 많은 돌무덤과 성곽의 흔적 등 옛 도시의 존재는 알고 있었지만 그것을 금나라 황제의 것이라고 착각했던 겁니다.

조선은 스스로를 중국의 제후국으로 규정했던 나라입니다. 고려시대 내내 거란·몽골 등 외적의 침입이 이어졌습니다. 이런 아픈 과거를 딛고 문을 연 조선은 외적의 침입을 막고 독립을 유지하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바라봤습니다. 조공과 책봉의 관계로 맺어진 명·청과의 외교관계는 중국이라는 거대한한 방패막 안에서 나라의 안전을 보장받고자 했던 외교전략이었습니다.

그런 조선에게 국경을 넘어 다른 나라를 정복하고 제국을 건설하는 일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조선에게 있어 수나라의 침략을 막아낸 고구려 영양왕과 을지문덕 장군은 본받아야 할 위인이지만, 광활한 영토를 정복하고 제국을 건설했던 광개토대왕은 이해할 필요도, 이해할 수도 없는 인물이었던 겁니다. 『조선왕조실록』에서 을지문덕 장군은 나라를 구한 위대한 영웅으로 묘사하고 있지만 광개토대왕에 대한 언급은 한 마디도 없습니다. 물론 이런 사실을 조선시대 사람들의 탓으로 돌릴 수는 없습니다. 시대의 한계로 바라보는게 맞을 듯 합니다. 굳이 문제를 꼽자면 조선시대 사람들의 상식에 갇힌 고정관념을 탓해야겠죠.

광개토대왕릉비는 그렇게 1400여 년을 이끼에 덮여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거대한 비석을 보면서 금나라 황제의 것일거라고 추측했지 우리 조상이 세운 비석이라고는 상상조차 못했습니다. 아무도 그 이끼를 걷어내고 비문을 읽어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렇게 역사의 뒷편으로 사라질 뻔했던 광개토대왕릉비는 19세기 말 일본의 밀정이었던 사코 가게아키 대위에 의해 발견됩니다. 광개토대왕릉비의 가치를 알고 고대사 연구를 먼저 시작한 것은 일본입니다. 일본역사학계는 광개토대왕릉비의 내용을 왜곡해 고대일본이 한반도 남부 일대를 지배했었다는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하며 당시 일본의 조선합병을 정당화하려 했습니다. 한반도의 찬란한 역사의 한 장면이 일본의 악의적인 역사왜곡의 근거로 전락해버린 순간이었습니다.

역사학자들은 역사연구를 할 때 ‘만약’이라는 가정을 가장 경계한다고 합니다. 주관에 따른 왜곡을 피하고 철저한 사료 검증 등 객관적인 연구를 위해서죠. 하지만 저는 역사학자가 아니니 마음 편하게 ‘만약’이라는 상상을 한번 해봤습니다. 만약 한 명이라도 광개토대왕릉비에 덮여 있던 이끼를 걷어내고 비문을 읽어봤더라면 어떨까 하고 말입니다. 그 비문에 자극받아 조선이 적극적인 북방정책을 추진했다면 어쩌면 지금보다 더 넓은 영토를 후손에게 물려줬을 지도 모릅니다. 아니 적어도 일본의 악의적인 역사왜곡은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요.

※정현진 기자의 ‘아웃사이더(outsider)’는 담당 분야인 빅데이터·역사NIE와 고교·대학 입시에 대해 취재하면서 기사에서는 미처 하지 못했던 뒷 이야기들을 풀어봅니다. 누구나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 옳다고 믿는 것에 대해 한번쯤 다른 시각에서 ‘왜’라는 질문을 던져봅니다.

정현진 기자 correctroad@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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