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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 영감(靈感)

이건용
작곡가·서울시오페라단 단장
작곡가라는 나의 직업을 밝히면 자주 듣는 질문이 있다. “어떻게 영감을 얻으세요?” 없던 음악을 새로 만들어내니 어떤 신비한 영역에서부터 그것을 가져오는 재주가 있다고 여기는가 보다. 베토벤을 그린 그림 중 펜을 손에 들고 입을 꾹 다문 채 어딘가를 응시하는 것이 있는데 완전히 영감에 사로잡힌 얼굴이다. 작곡가에게 영감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이 그림이 많이 기여했을 것 같다.

 원래 음악가는 무엇인가를 만들어내는 창조자라기보다는 필요한 때 적당한 음악을 들려주는 수행자였다. 그리스 신화 속의 음악가 오르페오나 가야금을 만든 음악가 우륵은 모두 연주자다. 그들도 음악을 지어서 연주한 것은 틀림없겠지만 그 음악은 지은 사람이 없어질 때 같이 없어진다는 점에서 만들어진 무엇이 아니다. 만들어졌다면 어딘가 남아 있어야 할 터이니까. 그런 의미에서 음악이 ‘무엇인가를 만드는 예술’이 된 것은 대체로 악보라는 기록 장치, 더 나아가서는 사전 설계도가 고안된 후라 하겠다.

 제자들을 가르치다 보면 영감을 기다리다 작품에 착수하지 못해 애를 먹는 학생들을 만난다. 멋진 아이디어다 싶어 착수해 놓고 보면 마음에 들지 않아 버린다. 그리고 다른 것을 시작하다 또 막힌다. 이렇게 착수하지 못한 채 시간만 가는 것이다.

 이런 때 나는 대가들이 쓴 연습곡을 보여준다. 이 연습곡들은 (예컨대 피아노 같은) 악기의 연습을 목적으로 하는 만큼 영감에 의한 곡이라기보다 악기를 다루는 기교, 손가락의 기능 등을 고려해 만든 곡이다. 당연히 무미건조한 악상으로 시작된다.

그러나 대가들은 곡을 진행하면서 그 무미건조한 악상으로부터 그럴듯한 음악을 만들어낸다. 그런 곡을 보여주면서 학생들에게 말한다. “봐라. 빛나는 악상이 없이도 멋진 곡을 쓸 수 있지 않느냐. 겸손하여라. 천재적인 악상이 너에게 필요한 것이 아니다. 평범한 재료를 가지고 성실하게 작업하는 연습이 중요하다. 그렇게 하면 너는 꼭 너만큼의 곡을 낳을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가르치는 나 역시 영감을 기다리지 않는다. 농담이 섞인 것이기는 하지만 나는 “곡을 주기로 한 약속시간이 나의 영감이다”라고 말하곤 한다. 곡을 위촉받으면 나는 대가들이 연습곡을 쓰듯 내가 가지고 있는 재료 중에서 쓸 작품에 적합한 것들을 고른다. 적합한 재료가 없을 경우에는 답사를 하기도 한다. 예컨대 동학 100주년 기념 칸타타를 쓸 때는 전주와 김제 만경평야를 몇 번 다녀왔다. 가면 무엇인가를 얻는다. 구체적인 장면을, 관련된 민요나 시를 얻기도 한다. 그저 분위기만 느끼고 와도 소득이다. 어떤 청중이 내 곡을 들을 것인가를 눈으로 확인하는 것도 도움이 된다.

 위촉자가 아이디어를 줄 때도 있다. 내 곡을 연주할 연주가의 특징, 그의 기호, 그가 좋아하는 음악 등을 잘 관찰하다 보면 하나의 악곡을 시작할 수 있는 좋은 실마리를 얻을 수 있다. 이런 나를 두고 어떤 작곡가 친구는 맞춤옷에 비겨 “너는 맞춤곡 작곡가야”라고 놀린다. 자신의 개성보다 소비자의 요구에 더 신경 쓴다는 의미일 것이다.

 나는 이 놀림이 별로 나쁘지 않다. 영감의 섬광을 기다리면서 시간을 보내다가 마감시간을 넘기고 연주가 임박한 시간에 늦게야 작품을 넘기는 것보다 그가 즐거이 내 음악의 전도사가 될 수 있도록 그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음악의 공간과 그것을 연습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마련해 주는 것이 더 현명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런 연주를 통해 내 음악을 만날 때에야 청중이 비로소 나의 음악에 감동받을 것이다.

이건용 작곡가·서울시오페라단 단장

◆약력=서울대 작곡과 졸업, 독일 프랑크푸르트 음대 디플롬, 서울대 음대 교수,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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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