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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호근 칼럼] 감동과 설렘의 정치는 어디에?

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
박근혜 대통령의 학습능력은 뛰어나다. 대통령직 2년 만에 기자들의 날 선 질문에 능숙하게 답변할 정도이니 말이다. 예민한 것은 슬쩍 우회하고, 설득이 필요한 사안은 마치 안방 담론처럼 깊숙이 들어가기도 한다. 대면보고가 너무 없다는 비판에 요즘같이 대화 채널이 발달한 시대에 ‘저를 딱히 만나고 싶으세요?’라고 배석한 장관들에게 공을 넘겼다. ‘자주 만납시다!’가 아니었다.

 이 뛰어난 학습능력이 통치 양식과 인식의 틀을 바꾸는 유연제가 되면 좋으련만 오히려 ‘박근혜 스타일’을 강화하는 호신술이라는 생각이 든다. 패션이 그렇다. 기자회견장에서 입은 옷은 앞깃이 접히고 뒷깃을 살짝 올린 슈트형 재킷, 말하자면 겸손과 신중 복합모드였고, 헤어스타일은 약간 변형된 올림머리였다. 분위기에 따라 옷 색깔이 바뀌는 것만 제외하면 1979년 청와대를 떠난 뒤 고착된 ‘박근혜 패션’이다. 지난 대선 때 야당은 ‘133종 옷’을 들먹이며 사치 성향을 잘못 공격했는데, 오히려 133종이 동종 디자인으로 수렴된다는 사실에서 ‘무서운 원칙주의’를 읽어냈어야 했다.

 뛰어난 학습능력으로 더욱 세련된 이 ‘무서운 원칙주의’가 가슴을 옥죄는 ‘고집’으로 비친다는 사실을 정작 본인은 잘 모를 것이다. 박 대통령만이 아니다. 기존 정권에서 집권 기간 중 통치 스타일을 바꾼 대통령이 있었던가. 통치양식을 자주 바꾸면 여론에 너무 흔들린다고 비난받을 것이 뻔하다. 오바마 스타일, 푸틴 스타일이 상황에 따라 자주 바뀌던가? 아베 총리가 변할 것인가? 아니다.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더욱이 통치자로 등극한 지도자임에랴. 그런데 체감온도의 격차를 읽어내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국정의 소소한 내용까지 파악하고 있는 대통령이 생활고에 허우적대는 대중들에게 집권 실적을 열거해 봐야 달나라 방송처럼 들린다.

 세간의 의혹을 샀던 사건들에 ‘근거 없음’ 판정을 내리는 것도 그렇다. 그런 사건이 빚어진 상황과 정권의 느슨한 관리체계는 ‘근거 없음’으로 봉합되지 않는다. 인적쇄신? 무고한 사람을 교체할 필요가 없다는 대통령의 말도 일리가 있지만, 가구를 재배치하면 방의 용도가 달라지듯 변화를 원하는 대중들의 주문도 소중하다. 청와대 밖에서 청와대를 바라보는 발상의 전환, 그런데 대통령 등극의 원동력인 예의 그 ‘고집’이 발상 전환을 막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시청자들은 광복 70주년, 한·일 국교 정상화 50주년에 걸맞은 ‘대전환의 개념’을 고대했을 것이다. 일본과 중국도 향후 50년을 개척할 새로운 키워드를 마련 중이다. 필자가 강조했듯 2015년은 시련과 고난, 부활과 성공의 파란만장한 길을 걸어온 한국에 새로운 출발을 명령한다. 120년의 역사를 딛고 ‘3차 변혁’의 시동을 걸어야 한다는 그 역사적 과업 말이다. 1차는 ‘근대 이행’(1894년), 2차는 ‘산업화와 민주화’ 변혁이었다면(1961년), 3차는 무엇이어야 하는가. 대통령의 답은 ‘경제와 통일’이었다. 그게 ‘나의 시대적 과제’이자 ‘시대정신’이라고 강조했다.

 그건 역대 대통령들도 헌신했던 공통 과제다. 모든 정권을 관통하는 일종의 상수(常數)다. 상수는 상식이다. 획기적인 발상 전환을 요하는 ‘광복 70주년’에 여전히 상식을 발령한다면 그 정권의 역사 인식, 시대 인식은 그리 치열하지 않음을 암시한다. 청와대 내부에 한국 사회의 발전 단계와 총체적 혁신을 향한 고민의 기류가 없다는 것을 뜻한다. 신년 구상을 채운 ‘경제혁신 3개년 계획’과 ‘통일정책’의 구체적 사안들이 참신하다 해도 새로운 상위 통치개념이 결여되면 청와대 수석들이 만든 그저 평범한 기획으로 들릴 뿐이다.

 시청자들의 가슴을 뛰게 하는 것은 지난 70년과는 질적으로 다른, 새로운 출발의 지평을 열어젖히는 설레는 언어, 감동의 키워드다. 그건 정권의 역사 인식이 달라져야 나온다. 70년 동안 한국 사회를 가뒀던 인식 프레임을 깨뜨리는 것이 필수요건이다. 3차 변혁을 향한 새로운 출발은 저성장 경제에 짓눌린 저소득층, 양극화와 세대 격차, 분열되는 개인들을 양산한 우리의 유별난 성공신화를 우선 버릴 것을 명한다. 지난 70년 동안 경제와 통일에 밀려나 제멋대로 헝클어진 사회를 재설계하는 작업, 그리고 시민들의 자발적 참여가 첫 과제다.

 국가 주도의 경제·통일 시대는 지났다. 민주화 28년의 역사는 이제 ‘시민 주도의 사회개혁’으로 행진하라고 말한다. 그런데 2015년 신년 구상은 여전히 경제와 통일이었다. 국가가 주역이라면 70년대의 경제·통일 패러다임과 얼마나 다른가? 혹시 박근혜 대통령은 ‘미완의 70년대’를 완성하고 싶은 것일까? 설령 그렇다면 가업정치(家業政治)의 울타리 내에 맴돌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것이 역대 대통령들의 공통과제, 한민족의 숙원임은 틀림없으나 왜 이 대변혁의 시점에서 다른 감동적 구상과 발상 전환은 없는가.

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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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