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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 변화하는 북한의 대남전략

문정인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2000년 6월 14일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김대중 대통령과의 첫 대면에서 “북남 관계가 정상화되기 위해서는 국가보안법이 철폐돼야 한다”고 말했다. 김 대통령은 차분히 반박했다. 조선노동당 규약 서문 중 ‘조선노동당의 당면 목적은 공화국 북반부에서 사회주의의 완전한 승리를 이룩하며 전국적 범위에서 민족해방과 인민민주주의 혁명과업을 수행하는 데 있다’는 조목을 예로 들며 “북이 남을 적화통일하겠다는 의도가 분명한데 어찌 우리가 일방적으로 국가보안법을 폐기할 수 있는가”라고 대응했다. 이에 김 위원장이 "7차 당 대회를 곧 소집해 규약을 개정하겠다”고 답변하면서 두 지도자는 가까스로 긴장국면을 넘겼다.



 그 후 7차 당 대회는 열리지 않았다. 2010년 9월 개최된 당 대표자회에서 당규 일부를 개정했지만, 문제가 된 ‘전국적 범위에서 민족해방과 인민민주주의 혁명과업을 수행한다’는 대목 중에서는 ‘인민민주주의’에서 ‘인민’이라는 단어만 빼는 데 그쳤다. 이는 남한을 민족해방의 대상으로 삼겠다는 북한의 통일전선전략이 계속 유효하다는 것을 시사한다.



 그러나 올해 신년사에서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의 말은 사뭇 뉘앙스가 다르다. “자기의 사상과 제도를 상대방에게 강요하려 하여서는 언제 가도 조국통일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할 수 없으며 대결과 전쟁밖에 가져올 것이 없다”거나 “우리는 인민대중 중심의 우리식 사회주의 제도가 가장 우월하지만 결코 그것을 남조선에 강요하지 않으며 강요한 적도 없다”는 대목이 그것이다. 물론 ‘강요한 적이 없다’는 말 자체는 사실과 다르다. 과거 북측이 남측에 대해 침투, 살상, 파괴, 와해공작을 벌여온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식 사회주의 제도를 남조선에 강요하지 않는다”는 대목은 흥미롭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잠시 최근 북한의 대남 침투 양상을 복기해 보자. 이전 시기 북한의 대남전략은 지상이나 강안, 해상을 통해 간첩을 직접 침투시키고, 이들의 암약을 통해 남한 내에 지하당 조직을 구축해 세를 불리는 방식이었다. 이른바 ‘결정적 시기’가 오면 남한 내 민중혁명을 주도하는 게 그들의 임무였다. 이 때문에 과거의 대공수사는 개별 첩자보다는 핵심공작원-연락책-행동책으로 이어지는 간첩단을 일망타진하는 데 역점을 뒀다.



 그러나 2000년 이후의 양상은 방식이 다르다. 국방부가 발표한 2014년 국방백서에 따르면 1950년대에서 90년대 말까지 북한으로부터의 직접 침투는 1761건에 달하지만 2000년대 이후에는 전무한 것으로 집계된다. 해외를 통한 우회침투도 80년대와 90년대에는 139건이었던 것에 비해 2000년대에는 14건, 2010년 이후로는 전혀 없는 것으로 나타난다. 반면 과거에는 없었던 탈북자를 가장한 간첩 침투가 2000년대에는 2건, 2010~2013년에는 12건으로 증가했다.



 최근에 검거된 대남간첩 대부분은 위장 탈북자로 정교한 간첩망을 구축한 고정간첩이라기보다는 남한에 거주하고 있는 탈북자들에 대한 동향감시 활동에 치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특히 이들 대부분이 대남공작 담당부서인 통일전선부가 아니라 북한의 체제 옹위를 전담하는 국가안전보위부에 의해 파견됐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바꿔 말해 예전에는 대남 적화통일전략 차원에서 간첩을 파견했다면, 이제는 남한의 탈북자 사회나 남한 정부가 자신들의 체제 정통성을 흔드는 것을 막는 일에 중점을 두고 있다는 뜻이다.



 이러한 변화는 최근 북한의 행태가 남한 체제의 전복을 목표로 하는 공세형에서 자신들의 체제를 지키려는 수세형으로 전환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우리의 제도를 남에게 강요하지 않을 터이니 남도 북에 대한 제도통일 의도를 포기하라’는 김정은 제1위원장의 신년사 내용에 새삼 눈길이 가는 것도 이 때문이다. ‘종북세력이 사방에 깔려 있는 마당에 무슨 별도의 대남 침투 공작이 필요하겠느냐’는 반문도 가능하지만, 공세형에서 수세형으로의 전환은 생각보다 많은 것을 의미할 수 있다. 대남침투나 와해공작 자체가 쉽지 않아진 남과 북의 격차는 이미 오래전에 경쟁이 불가능한 수준으로 벌어졌음을 방증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전환에 대처하는 우리의 전략 역시 현명해질 필요가 있다. 북측의 수세적 자세를 낙관적으로 평가해 안이한 태도만을 취한다면 그 역시 문제지만, 그렇다고 북한을 벼랑 끝으로 몰아세우고 무분별한 종북몰이에 집착하는 공세적 자세 또한 결코 바람직한 대안일 수는 없어 보인다. 그게 북한 도발의 빌미를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변화하는 현실에 대한 냉철한 분석과 과유불급(過猶不及)의 신중함으로 지금의 국면을 남북관계 개선의 새로운 계기로 삼는 지혜가 필요하지 않을까 한다.



문정인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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