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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세대가 신세대 이해해야지요” 라종일 “교수님은 상처 낫게 해준 남친” 김현진

지난 7일 팟캐스트 녹음 현장에서 만난 라종일 교수(오른쪽)와 김현진 작가. 이들은 평소에도 카톡으로 다양한 대화를 나눈다. 라종일 교수는 딸보다도 한참 어른 김 작가에게 줄곧 존댓말을 썼다. 김춘식 기자
“나는 그냥 열심히 하지 않은 편이어야 한다. 열심히 안 한 것은 아니지만, 열심히 하지 않은 것으로 하겠다. 열심히 하지 않아서 버려진 것뿐이다.”

[7030 힐링 토크' 라종일 교수와 김현진 작가

 드라마 ‘미생’에서 장그래가 던진 독백은 청춘의 처지를 대변한다. 자본과 자기 계발의 홍수 속에서 실패를 탓할 대상은 나뿐이다. 이른바 ‘멘토’라 할 법한 성공한 어른들은 말을 얹는다. 아르바이트 현장에서 부당한 대우를 당해도 “인생의 좋은 경험이라 생각하고 열심히 해야 한다”고 충고한다. 백화점 주차장에서 무릎을 꿇은 아르바이트 대학생은 “부당함에 맞설 패기도 없는 젊음”으로 치부한다. 그러나 청춘들은 이미 충분히 열심이다. 견디며 버티고 있는 이들에게 ‘아프니까 청춘이다’ 같은 충고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책 한 권이 세상에 나왔다. 『가장 사소한 구원』(사진). ‘70대 노교수와 30대 청춘이 주고받은 서른두 통의 편지’라는 부제가 붙었다. 또 멘토인가 싶지만 그들의 문답은 뻔하지 않다.

 주인공은 라종일(75) 한양대 석좌교수와 칼럼니스트 김현진(34)씨다. 이들 사이에 사계절 동안 편지가 오고 갔다. 흉사가 겹쳐 마음을 의탁할 곳 없이 망가진 김 작가에게 라 교수가 건넨 말, 뾰족한 대책도 아닌 말이 출발이었다.

 “첫째, 이제 아무 걱정하지 마라. 둘째, 나는 네 편이다. 셋째, 글쓰는 사람은 원래 어느 정도 불행해야 한다. 당신도 그것을 알지 않느냐?”

 지난 7일 두 사람을 만났다. ‘딴지일보’의 팟캐스트 방송 ‘과이언맨’의 녹음 현장에서다. 김 작가와 프로레슬러 김남훈씨가 진행하는 방송에 라 교수가 출연했다. 책 출간에 맞춰 멘토와 멘티를 주제로 녹음을 진행한 날이었다.

좌린
5년 전 김 작가 책 보고 라 교수가 연락
-두 사람 조합이 낯섭니다. 어떻게 인연을 맺었나요.

 ▶김현진=“교수님이 연락을 주신 건 5년 정도 됐어요. 평소 전북대 강준만 교수의 글을 흥미 있게 보시는데, 그분이 2009년 제가 낸 책 『그래도 언니는 간다』에 대해 서평을 써 주셨어요. 서평을 본 교수님이 책도 읽어보시고는 커피나 한잔 하자고 하셔서 냉큼 갔죠.”

 ▶라종일=“일본 대사를 마치고 대학 총장으로 재직 중일 때였어요. 젊은 사람이 살아가면서 어려운 점을 지적한 책이 인상적이었죠. 문제의식도 그렇지만 언어를 잘 다뤄서 놀랐어요. 20대에 이 정도 세상을 보는 눈과 소질이 있다면 앞으로 훌륭한 작가가 되겠다고 생각했어요. 좋아하는 작가는 많지만 개인적으로 관심 갖고 기대를 걸긴 처음이었어요.”

 -처음부터 속 깊은 편지를 주고받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요.

 ▶김=“힘든 일이 너무 많아 잠수를 탔을 땐데, 교수님 전화도 몇 번을 받지 않다가 힘들어 연락 못 드렸다고 안부차 말씀을 드렸어요. ‘무슨 일이냐’고, ‘밖으로 얘기 안 하면 아무것도 치유되지 않는다’고 하셔서 더듬더듬 얘기하게 됐어요.”

 더듬더듬 시작한 이야기는 차츰 수많은 고민과 질문이 돼 쏟아졌다. 돈 안 들이고 연애하는 방법은 있는지, 누구 좋으라고 아이를 낳는지, 미움과 증오를 어떻게 녹였는지, 우리나라의 계급은 완전히 고착화된 것은 아닌지…. 개인사와 세상사의 경계 없는 질문에 라 교수는 때로 따뜻하게, 때로 엄중하게 답했다. 라 교수가 “이런 게 어떻게 책이 되느냐”고 내키지 않아 했던 책이 출간된 건 이 때문이다.

 ▶김=“제가 갖는 고민은 누구나 겪는 건데 교수님의 답은 보통의 멘토들이 주는 뻔한 답, ‘견뎌’ 같은 것과 다른 거예요. 이건 혼자 보기 아깝다고 해서 출간하게 됐어요.”
 녹음이 시작됐고 골방 같은 스튜디오에선 뻘쭘, 개드립, 짝퉁, 진퉁, 썸 같은 말이 자유로이 오고 갔다. 국제 정세를 논하던 학자와는 도통 어울리지 않는 풍경이었다.

“피차 불완전, 어떻게 조언해줄 수 있나”
방송은 ‘멘토질’이 상업화하면서 가난한 청춘의 주머니에서 나온 돈을 멘토들이 벌어가는 현상을 이야기했다. 또 ‘천 번은 흔들려야 어른이 된다’ 같은 메시지가 청년들을 더 고통스럽게 하는데 과연 진정한 멘토는 존재하는지까지 이어졌다. 일종의 멘토 자격으로 출연한 라 교수는 정작 멘토 열풍이 “당황스럽다”고 했다. “이렇게 큰 사회적 현상인지 몰랐다”고.

 그렇다면 라 교수가 김 작가와의 편지 교환을 통해 한 조언은 무엇이었을까.

 ▶라=“둘이 그냥 얘기를 주고받은 거 아닌가요. 저는 현진씨에게도 많이 배웠는데요. 제가 일방적으로 뭘 알려준 게 아니라 저도 배운 게 많아요. 제가 70대 중반인데도 어린애처럼 느껴져요. 조그만 감정에도 흔들리고 신통치 않은 욕심도 있어요. 피차 불완전하기 마련인데 어떻게 남에게 조언이 될 만한 말을 해줄 수 있나 모르겠어요. 경험을 서로 나눌 수는 있지만 일방적으로 이렇게 저렇게 하면 훌륭한 사람이 될 거라든지, 그런 비결을 가르쳐줄 수는 없지 않나 싶어요.”

 ▶김=“선생님은 문제 제기만 말고 의견을 들려 달라고 하세요. 선생님께 귀한 지혜를 나눠 받고 싶다고 했더니 펄쩍 뛰시는 거예요. 절대 그런 말 하지 말라고. ‘나는 아직까지 내 일신의 안위조차 판단 못 하고 방황하는 사람에 불과하다’고요. 보통 어르신들은 내가 방황한다는 말을 안 하시잖아요.”

 어설픈 충고 대신 상대에게 귀 기울였다. 냉정하고 현실적인 조언도 있었다.

 ▶김=“제가 완전히 피해의식에 사로잡혀서 왜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는지 울부짖는 편지를 썼어요. 거기에 대해 ‘사람이 낙원에서 쫓겨난 이후로 세상이 자기에게 친절하길 기대해선 안 된다’고 하시는데 정신이 번쩍 들더라고요. 듣기 좋은 얘기나 되도 않는 얘기는 안 하시는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녹음이 끝난 뒤 스태프가 이런 말을 남겼다. “대한민국에서 70대 중반의 이런 (성공한) 분에게 이런 말씀을 듣는 건 쉽지 않아요.”

“지위와 부의 대물림이 제일 걱정”
두 사람은 완전한 대척점에 있다. 40년 넘는 세월의 간극만큼이나 삶의 궤적도 다르다. 라 교수가 최고의 엘리트 교육을 거쳤다면 김 작가는 고교를 자퇴하고 공교육을 뛰쳐나왔다. 라 교수가 대학 교수로 일하던 서른넷 나이에김 작가는 스스로를 “집도 절도 없는 도시민이자 비정규직”이라고 부른다. 겹치는 데라곤 전혀 없지만 김 작가는 라 교수를 “내 남자 친구”라며 짓궂게 소개한다. 라 교수도 “김 작가 같은 사람이 나한테 조르는 건 내게 특권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첨예한 세대 갈등의 답을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우리 사회의 세대 갈등이 심각해 보입니다.

 ▶라=“근대화 이후 계속된 현상 아닌가 싶어요. 서정주의 시에도 있잖아요. ‘아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스물 세해 동안 나를 키운 건 8할이 바람이다.’ 근대화 이후 새로운 세대에게 아비는 늘 종이었어요. 근대화를 이끈 건 외국의 문물이었어요. 젊은 세대는 늘 바람 속에 살았어요. 젊은 세대를 이끌어 온 세대가 없어요. 지금도 그렇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조금 달라진 건 각자 자기 얘기를 하는 거예요. ‘봐라, 우리가 이뤄놓은 게 있지 않으냐.’ ‘그게 뭐 그리 대단하냐.’ 충돌이 돼요. 해결책은 없어요. 나이 많은 세대가 더 이해하는 게 중요하지 않나 싶어요. 호강에 겨웠다고 생각하면 안 될 것 같아요. 어떡하든 젊은 층을 이해해야죠.”

 ▶김=“제가 99%의 아저씨·할아버지들은 가래침 탁탁 뱉고 소리 치느라 바쁘다고 한 적이 있어요. 그랬더니 교수님이 ‘조금은 이해하는 마음으로 대해주면 어떻겠습니까’라고 부탁하셨어요. 빠른 변화에 뒤떨어지면서 떠밀리듯 살아온 분들이라고요. 그런 말씀을 차분히 해주시면 저도 부끄러워지죠. ‘세상에 나쁜 사람은 없다. 나쁜 입장만 있을 뿐이다’라는 말도 생각하게 되고요.”

 -이젠 개천에서 용 나는 시대가 아닙니다. 이것이 부모 세대와 불화의 한 원인 같습니다.

 ▶라=“제일 나쁜 건 배경에 따라 많이 결정된다는 거예요. 좋은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가정에서 자랐다든지, 강하게 동기를 주고 밀어줄 수 있는 가정에서 자랐다든지 하는 거요. 사회적인 지위와 부가 대물림되는 현상이 제일 걱정이에요. 정치의 주된 문제가 돼야 하지 않나요.”

 김 작가는 마지막 편지에서 “상처를 주면 줬지, 낫게 해준 남자 친구는 처음이랍니다. 처음 겪는 따뜻하고도 달콤한 경험이었습니다”라고 고백했다. 라 교수는 이렇게 답했다.

 “현진에게 밀려서(?) 신통치 않은 답을 쓰면서 어쩌면 저도 현진 못지않게 힘을 얻었는지도 모릅니다. …누군가에 손을 내밀어 붙들어 줄 수 있는 것은 자기 자신을 붙들어 일으키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사람 사회의 가장 중요한 진리 중 하나가 아닌가 합니다.”

 우연히도 영국의 작가 존 버거는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사소한 구원’에 대해 이런 글을 썼다.

 ‘누군가 저항을 하는 것은 지금 이 순간을 지키기 위해서다. 저항의 본령은 어떤 대안, 좀 더 공정한 미래를 위한 희생이 아니다. 그것은 현재의 아주 사소한 구원이다. 문제는 이 사소한이라는 형용사를 안고 어떻게 시간을, 다시 살아갈 것인가 하는 점이다.’(『벤투의 스케치북』)

 라종일 교수와 김현진 작가의 이야기도 존 버거의 사소한 구원과 다르지 않다. 오늘의 청춘이 기대하는 것은 지금 순간을 지키고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공감과 위로라고 말이다.


홍주희 기자 hongh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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