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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뱌오 탐낸 스탈린 “소련 장군 15명과 바꿀 수 없나”

1 국공 내전 시절 전선에서 작전을 지휘하는 동북인민해방군 사령관 린뱌오(가운데). 오른쪽은 정치위원 뤄룽환(羅榮桓). 1948년 10월 14일 진저우(錦州). 2 학생들에게 훈시하는 항일군정대학 교장 린뱌오. 1937년 1월 옌안.
1936년 12월, 국·공 양당은 연합에 성공했다. 10년간 요란하던 총성이 그쳤다. 내전 기간, 국민당군에 치명타를 안긴 청년 장군 린뱌오(林彪·임표)의 이름도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지 않았다.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408>

이듬해 7월, 일본군이 화베이(華北) 일대를 점령했다. 항일전쟁을 선언한 국·공은 연합체제를 출범시켰다. 장제스(蔣介石·장개석)를 양당의 최고사령관인 군사위원회 위원장에 추대했다.

1937년 8월 23일, 산시(陝西)성 촌구석에서 중공 중앙위원 회의가 열렸다. 난징(南京)에 있던 장제스는 특무기관을 통해 중공의 회의 내용을 보고 받았다. “중공은 홍군의 명칭을 국민혁명군 제8로군으로 바꿨습니다. 예하에 3개 전투사단을 두고 린뱌오, 류보청(劉伯承·유백승), 허룽(賀龍·하룡)을 사단장에 임명했습니다. 린뱌오와 마오쩌둥(毛澤東·모택동)이 논쟁을 벌였다고 합니다. 정확한 내용은 알 수 없습니다.”

장제스는 군사회의를 소집했다. 린뱌오 칭찬에 침이 말랐다. “린뱌오는 전장(戰場)과 초연(硝煙), 선혈과 생명이 오가는 곳을 갈망하는, 당대의 한신(韓信)이다. 다시 군대를 이끌고 전공을 세울 날이 멀지 않았다. 청사에 남을 공을 세울 테니 두고 봐라.”

장제스의 예측은 정확했다. 전쟁의 포성이 울리자 린뱌오의 그림자가 전쟁터에 어른거리기 시작했다. 9월 25일, 린뱌오가 핑싱관(平型關) 전투에서 일본군 천여 명을 몰살시켰다. 항일전쟁 첫 번째 승전에 온 중국이 열광했다. 전국의 매체에 린뱌오의 이름이 빠지는 날이 없었다. 흉노를 멸망시킨 한(漢)대의 명장 이광(李廣)과 곽거병(霍去病), 왜구 토벌에 공을 세운 명(明)대의 척계광(戚繼光)에 비유하며 린뱌오를 찬양했다.

첩보(捷報)를 접한 장제스는 머리가 복잡했다. 중국군의 승리였지만, 영광은 공산당의 몫이었다. 일기에 심경을 토로했다. “린뱌오는 황푸 출신이다. 누가 뭐래도 내가 키운 학생이다.” 황푸 출신들로 구성된 군사회의도 소집했다. “일본과 전쟁을 치르면서 우리 군은 많은 땅을 왜적들에게 내줬다. 최근 핑싱관에서 중국 군대가 승리했다. 우리 황푸 출신이 지휘했다니 더 이상 기쁠 수가 없다. 그 지휘관이 이 자리에 없는 것이 애석하다. 린뱌오는 공산당원이다. 황푸 4기생 중에서도 가장 어린 학생이었다. 황푸의 걸출한 인재들은 모두 공산당 쪽에 합세했다는 말을 들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여기 있는 너희들은 전부 무능한 놈들이다. 지치이후용(知恥而后勇), 부끄러운 걸 알면 용기가 생기는 법, 더 이상 나를 실망시키지 마라”며 린뱌오의 선배들을 질책했다. 장제스의 훈시는 효과가 있었다. 국민당군도 도처에서 일본군에 승리를 거뒀다.

핑싱관 전투 얼마 후, 지형 관찰 나갔던 린뱌오가 국민당군의 오발로 부상을 당했다. 일본군에 노획한 야전 군복 착용이 화근이었다. 소식을 접한 장제스는 성명을 냈다. “국가가 인재를 필요로 하는 때에 대장의 재목을 잃었다. 애석한 일이다.” 이어서 책임자를 색출해 처벌하라고 지시했다. 린뱌오에게도 위로 전문을 보냈다. 들것에서 사경을 헤매던 린뱌오는 국·공 관계를 우려했다. 장제스에게 답신을 보냈다. “일본 군복을 걸친 내 잘못이니 추궁하지 마십시오.”

마오쩌둥도 린뱌오의 중상 소식에 안절부절못했다. 스탈린에게 린뱌오의 생명을 구해달라는 급전을 보냈다. “린뱌오는 어린 나이에 혁명에 뛰어들었다. 처음 만났을 때 20대 초반이었다. 어린애 같았지만 총명하고 민첩했다. 매사에 긍정적이고 군사적 재능이 탁월했다. 지휘관의 말을 잘 듣지 않았지만, 결국은 지휘관에게 명예를 안겨줬다.” 스탈린이 거절할 리 없었다.

4년간 린뱌오의 소식이 들리지 않았지만 장제스는 옛 제자를 잊지 않았다. “사람이 떠나자 차(茶)도 식었다. 천하에 명성을 드러낸 내 학생의 모습이 가물가물하다”는 일기를 남겼다.

4년간 소련에 머무르던 린뱌오는 독일군의 프랑스 침공과 진공 경로를 정확히 예측하는 등 대전략가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소련군 참모총장이 장제스에게 보낸 편지가 남아 있다. “린뱌오의 전략과 전술은 독특하고 심오하다. 수준이 소련의 지휘관들을 능가한다. 스탈린 동지는 소련 장군 15명과 교환하고 싶다는 말을 자주한다. 실제로 마오쩌둥 동지에게 요청했다가 거절당한 줄 최근에 알았다.” 린뱌오의 재능을 재확인한 장제스는 모스크바의 중국 대사관에 전문을 보냈다. “린뱌오의 행적을 유심히 관찰해라.”

1941년 겨울, 린뱌오가 귀국 길에 올랐다. 옌안(延安)중공 중앙위원회는 국민당 측에 협조를 구했다. “린뱌오가 시안(西安)을 경유해 옌안으로 돌아올 예정이다. 보살펴주기 바란다.”

장제스는 신중했다. 군사위원회 시안 연락사무소 주임을 겸하던 34집단군 사령관 후쭝난(胡宗南·호종남)을 충칭으로 불렀다. “린뱌오가 귀국 중이다. 시안에 머무르는 동안 정중히 접대해라. 공심위상(攻心爲上) 공성위하(攻城爲下), 사람의 마음을 공격하는 것이 상책이다. 성을 공격하는 것은 하책이니 명심해라.” 특수공작을 지휘하던 다이리(戴笠·대립)에게도 따로 지시했다. “후쭝난에게는 비밀로 해라. 린뱌오의 안전을 책임져라. 수상한 사람이 접근하면 무조건 사살해라.” 다이리는 특무요원 200여 명을 데리고 시안으로 떠났다.

옌안의 마오쩌둥도 팔짱만 끼고 있지 않았다. 린뱌오가 시안에 도착하면 일거일동을 주시하라고 시안의 팔로군 연락사무소 측에 지시했다. <계속>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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