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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93)<제79화 육군졸업생들>(146)후방의 혁명진행|장창국

대구지역을 제외한 다른도시는 서울에서 상오5시에 있을 혁명성공 첫방송을 듣는 순간 출동을 하기로 되어 었었다. 부산은 군수기지사령부병력이, 광주·전주는 31사단이, 대전·논산은 논산훈련소가, 청주지구는 37사단병력이 각각 동원되었다.
부산지구의 경우 군수기지사령부참모장 김용순준장(3기·작고)이 중심이 되어 움직였다. 후방의 조직은 이주일소장이 맡기로 되었으나 부산만은 박정희소장이 3월께 부산에 내려가 김준장을 직접 포섭했다.
부산지구는 첫방송과 함께 김준장지휘로 각방송국·전신전화국·유류저장소등에만 병력을 배치했다. 상오7시쯤 부산지역에 있는 항만사령관·육군병기학교교장등 지휘관들이 참석한 가운데 군수기지 사령관 박현수소장(61·군영·전남 진도·전 호비사장)주재로 지휘관 회의를 열었다.
이때 박사령관은 『서울에서 군이 쿠데타를 일으킨 모양인데 상세한 상황을 모르는 만큼 경계를 강화하고 나의 지시에 의해서만 행동하라』며 혁명반대 입장을 밝혔다.
이 회의가 계기가돼 사령부안에는 지지파와 반대파의 선이 그어졌다.
사령부안의 혁명지지파가 의의로 많자 박사령관은 정보를 알아 본다며 부산에 주둔한 미군 「하야리야」부대로 갔다.
이통에 사령부안의 장교들은 서울의 사태만을 주시하게 됐다.
사령관이 없는 마당에 사령관의 지시를 받을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혁명지지파 장교들은 상오9시쫌 독자적으로 경남지구계엄사무소라는 간판을 걸었다.
박사령관이 정오가 지나서 부대로 잠시 돌아왔으나 혁명반대태도엔 변화가 없었다고 한다. 사태가 이에 이르자 참모장 김준장은 직권으로 지휘관회의를 소집, 사령관의 귀대를 촉구했고 나가있던 박사령관은 하오4시쯤 귀대했다.
하오5시가 넘어 장도영총장으로 부터 「전군혁명 가담」전문이 내려왔다. 이때부터 박사령관의 지휘로 경남도청·부산시청등 주요관공서가 차례로 접수됐다.
김준장은 최고회의 내무위원장을 거쳐 중장으로 예편, 한때 중앙정보부장도 역임했다. 그후 고향인 삼천포-하동-사천에서 6, 7대의원으로 당선됐고 김종필씨 후임으로 5·16민족상 이사장을 맡기도 했다.
대전·논산지구는 논산훈련소장 최홍희소장에 의해 지휘됐다.
최소장은 대전을 접수하기 위해 상오6시30분 부대를 출동시켰는데 이미 대전에 있던 3관구사령관인 김계원소장 (60·영주)이 혁명에 동조, 주요기관울 장악하고 있었다.
군영출신인 최홍희소장은 5·16후 예편, 말레이지아대사등을 역임했는데 현재 캐나다에서 반한활동을해 물의를 일으키고있다.
같은 군영출신인 김계원소장은 육군참모총장까지 지내고 69년 예편, 중앙정보부장·주중대사등을 거쳐 청와대비서실장을 하다 10·26사태를 맞았다.
광주지구는 31사단장 최주종준장 (군영·61·함북성진)에 의해 지휘됐다. 하오6시30분쯤 광주시내 주요건물은 완전히 접수됐다.
광주지구에는 당시 1관구사령관 김익렬소장(군영·중장예편)과 전투병과사령관 박병권소장(63·군영·전국방부장관), 육군보병학교장 최창언소장(군영·중장예편)등 고급지휘관이 많았으나 모두 혁명을 지지하기로 의견이 쉽게 모아졌다.
사단장 최준장은 혁명후 계속 군에 남아 부산군수기지사령관을 지냈고 소장으로 예편, 주공사장을 역임했다.
청주지구는 37사단장 김진위준장(3기)에 의해 접수됐다.
김준장은 3월초 대구에서 열렸던 2군사령부 산하 사단장회의에 참석했다가 이주일소장에 의해 포섭됐다.
이소장은 그후에도 37사단을 직접방문해 구체적인 거사계획을 짰다고 한다.
김준장은 혁명후 최고회의 건설분과위원장을 지냈고 그해 수도방위사령관을 맡았다.
그가 수도경비사령관시절 고대학생들이 데모하던 현장에 군복차림으로 나가 직접 설득을 벌였다는 얘기는 이미 3기생 부문에서 소개했다.
그는 논산훈련소장까지 지내고 소장으로 예편했는데 유창운수라는 회사를 경영했다.
이밖에 진해지구는 진해해군군의학교장 오원선대령이 주축이 되어 진해해병기지 사령관을 설득키로 했으나 효과가 없어 해병보급기지단장 한예택대령과 연결돼 진해지구 해군과 해병의 지지를 얻었다. 당시 진해에 있던 육군대학은 8기생을 중심으로 이미 오래전에 조직돼 있었다.
8기생 정문순중령(58·평북철산)에 의해 동기생인 윤필용(56·현도로공사사장) 차규헌 (54·현국가안보비상기획위원장) 김달훈중령 (60·경북상주)이 혁명에 참여했다.
정중령은 63년 준장으로 예편, 문화재관리국장·주후꾸오까총영사등을 지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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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