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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한번 부탁해, 59년 전 그 날의 기적

1956년 제1회 아시안컵 우승 직후 경무대(현 청와대)를 방문한 이유형 감독과 손명섭·함흥철(왼쪽부터) 선수가 이승만 대통령의 환영을 받고 있다. 큰 트로피는 우승팀에 줬다 돌려받는 진품이고 작은 건 우승국에 제공하는 미니어처다. [사진 이재형 축구역사문화연구소장]

백발의 노신사는 한동안 말을 잊었다. 유리 케이스 속, 반짝이는 은빛 트로피를 바라보며 잠깐이나마 50여년 전으로 시간여행을 다녀온 듯했다. 한참 뒤 가늘게 떨리는 음성으로 그가 말했다.

 “이 트로피는 한국 축구의 상징 같은 존재야. 이젠 후배들이 새 역사를 만들어야지. 이 늙은이가 너무 오래 기다렸잖아.”

 박경호(85) 선생은 1956년 홍콩에서 열린 제1회 아시안컵에서 태극마크를 달고 우승을 일궈낸 주인공이다. 지난 7일 아시안컵 우승 트로피를 전시 중인 서울 공릉동 한국체육박물관을 찾은 그는 “59년 전 우리들은 척박한 환경에서 애국심과 축구 사랑만으로 기적을 만들어냈다”면서 “호주 아시안컵에 나서는 후배들이 우리의 이야기를 듣고 용기와 긍지를 얻길 바란다”고 말했다.

손흥민
 - 지난해 3월 아시안컵 본선 조추첨식에 1회 대회 우승 멤버 자격으로 초청 받으셨죠.

 “조추첨식이 열린 시드니 오페라하우스 맨 앞자리에 앉았어. 사회자가 영어로 ‘코리아’ ‘미스터 박’ 그러더라고. 대충 감을 잡고 벌떡 일어나 ‘땡큐 베리 머치’를 외치며 만세를 불렀지. 뜨거운 박수 소리가 지금도 귓가에 맴돌아. 당시 출전한 18명 중 내가 유일한 생존자로 알려졌는데, 실은 두 분이 더 살아계셔. 김영진 선배는 목사님이 됐고, 박재승 선배는 편찮으시지.”

 - 50년대는 전쟁 직후여서 축구하는 데 어려움이 많으셨죠.

 “30년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나서 해방되던 해 혼자 월남했어. 축구화 끈을 동여매 목에 걸고 38선을 넘었지. 미군 군화 가죽을 찢어 만든 축구화는 내 목숨과도 같았어. 동생 경화(76)도 뒤따라 넘어와서 1960년 제2회 아시안컵(서울) 우승 멤버가 됐지. 내가 아시안컵 준비할 땐 모든 게 열악했어. 대표팀이 종로의 허름한 여관에서 합숙했는데 라면도 없어서 못 먹던 시절이야. 최종예선에서 자유중국(현 대만)을 만나 홈 1차전을 이겼는데, 타이페이 원정을 갈 비행기 삯이 모자라서 항공사에 외상을 했던 게 기억나. 지금 같으면 어림 없는 이야기지.”

1956년 제1회 아시안컵 우승멤버 박경호 선생은 서울 공릉동 한국체육박물관에 전시 중인 우승 트로피를 보자 감회에 젖었다. [김경빈 기자]
 - 본선이 열린 홍콩엔 어떻게 가셨나요.

 “당시엔 타이페이를 거쳐서 홍콩으로 가는 국적기가 일주일에 한 번 떴어. 경기 당일 새벽에 홍콩행 비행기를 탔고, 오전에 도착해 쉬지도 못하고 오후 4시 홍콩과의 첫 경기에 바로 나섰지. 몸이 천근만근이라 전반에만 두 골을 내주고 그대로 지는가 싶었지. 후반에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데 정신이 번쩍 들더라고. 비에 젖은 우리 유니폼에서 빨간 염색물이 빠지면서 단체로 피를 철철 흘리는 것 같았어. 상대가 보기엔 진짜 ‘붉은 악마들’이었겠지. 허허. 기운이 솟아서 2-2로 비길 수 있었어. 그 경기 뒤에 현지 교민들이 선물한 영국제 유니폼과 축구화를 받고 사기가 올라서 이스라엘(2-1승)과 월남(현 베트남·5-3승)을 꺾고 우승했지. 우승컵에 맥주를 가득 담아서 신나게 마셨던 기억이 생생해.”

 - 호주 아시안컵에 나서는 후배들의 전력을 어떻게 보시나요.

 “우리 때는 ‘아시아의 황금다리’로 불린 스트라이커 최정민이 있었어. 키 1m78㎝로 당시엔 장신이면서도 빨랐고, 찬스를 놓치는 법이 없었지. 내가 늘 강조하는 3B(브레인·보디 밸런스·볼 컨트롤)를 모두 갖춘 선수였어. 지금 대표팀에는 최정민 같은 해결사가 보이지 않아 걱정이야. 손흥민(23·레버쿠젠)이 돋보이던데, 아무래도 현역 때 내 역할과 비슷해서 눈길이 가. 예전 용어로는 ‘레프트 인사이드(left inside)’고, 지금으로 치면 공격형 미드필더였거든. 기회가 왔을 때 과감하게 슈팅하는 모습도 내 현역 시절과 닮았더라고. 세계적인 선수로 인정받으려면 수준 높은 기량을 꾸준히 유지하는 게 중요해. 기복을 줄여야 한다는 거지. 조영철(26·카타르SC)이나 이정협(24·상주)은 더 많이 뛰어야지.”

 - 이번 대표팀이 55년 무관의 한을 풀까요.

 “일본이나 호주를 피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야. 후배들이 한국 축구의 미래를 위해서 책임감을 가져야 해. 아시안컵 결과가 안 좋으면 K리그도 흔들리잖아. 우리 땐 ‘축구가 아니면 안 된다’는 신념이 있었어. 운동장에서 쓰러지더라도 후회를 남기지 말자는 생각으로 앞만 보고 덤볐지. 후배들이 내 생전에 ‘아시아 왕자’의 명성을 되찾아주면 좋겠어. 이제 난 몇 년 안 남았잖아. 우리나라가 결승에 오르면 호주에 한 번 가볼까 해. 마누라 몰래 돈을 조금 모았는데 쓸 일이 있으면 좋겠네. 허허허.”

글=송지훈·박린 기자
사진=김경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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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