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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 샤갈의 마을에 눈이 내릴까

전수경
화가
이번 겨울이 싱겁다. 눈 때문이다. 몇 차례 기상청의 예보가 있었고 눈이 오는 듯했지만 서울을 온전히 덮지도, 쌓이지도 못했다. 그래도 눈을 기다리다 혹여나 하는 마음으로 크리스마스이브에 새 달력을 사기 위해 광화문 네거리로 나섰다. 거기서 나는 눈 올 기미가 전혀 없는 인디고빛 하늘에서 쏟아져 내리는 함박눈과 마주쳤다. 한 보험회사의 대형 글판에 올라온 이용악(1914~71)의 시 ‘그리움’이었다. “눈이 오는가 북쪽엔/함박눈 쏟아져 내리는가….” 글판을 보는 순간 깊은 곳에서 솟구쳐 내 망막에 새하얗게 퍼지는 온기를 느꼈다. 두고 온 북쪽 작은 마을의 함박눈을 그리는 시인의 질문은 곧, 눈을 기다리다 내가 그 거리에 나온 이유에 대한 물음과 같았다. 해맑은 서울 하늘 아래에서 나는 함박눈을 느꼈다.



 ‘샤갈의 눈 내리는 마을’은 도처에 있는 카페의 이름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샤갈의 눈 내리는 마을’에서 만나자고 약속한다. 검색 사이트는 같은 말로 곧장 샤갈의 특정 그림으로 안내한다. 아동도서의 표지나 미술책에도 마치 같은 제목의 작품이 있는 것처럼 암시한다. 샤갈이 눈 내리는 마을을 그린 것으로 은연중 믿게 된 지 오래다. 하지만 샤갈은 눈 내리는 마을을 그린 적도, 그와 같은 제목을 붙인 적도 없다. 이미 눈이 내린 장면을 그린 것이 겨우 있는 정도다. 유독 한국의 독자와 관람자는 샤갈에게서 눈 내리는 마을을 불러들이고 그곳에서 만날 것을 약속한다.



 김춘수의 시에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이라는 대목이 나온다. 이 시는 “샤갈의 마을에는 3월에 눈이 온다”로 시작한다. 시의 제목과 그 시작이 그러한 믿음을 낳게 했고 퍼뜨린 것 같다. 그가 말하는 샤갈의 마을은 화가의 고향을 얼핏 암시하는 듯하지만 미술에 종사하는 내가 볼 때 그것은 화가의 매체, 즉 회화를 가리키는 것으로 비친다. 시인은 3월의 어느 봄날에 화가의 화집을 보면서 눈을 상상했을 뿐이다. 그는 눈이 “수천 수만의 날개를 달고 샤갈의 마을의 지붕과 굴뚝을 덮는다”고 한다. 눈이 부재하는 샤갈의 캔버스에 시인은 눈을 불러들였다. 그의 의식 깊은 곳에서 돋는 기다림이 헤아릴 수 없는 가벼운 것들로 그의 망막을 뒤덮은 것으로 보인다. 김춘수는 곧 닥칠 봄의 절정을 무수히 흩날리는 눈의 속성으로 염원한 것이다.



 눈이 내리는 마을을 그린 적 없는 샤갈의 화면에서 김춘수를 자극한 것은 무엇일까? 흔히 ‘샤갈의 눈 내리는 마을’로 오해되는 원작은 샤갈의 대표작인 ‘나와 마을’이다. 시인이 그와 같은 시를 짓게 한 바로 그 그림이다. 이 그림에서 초록빛의 ‘나’와 흰 염소가 커다란 얼굴로 마주 보고 있다. 이 둘의 관계는 친밀한 시선과 서로의 눈동자를 연결하는 실선, 그리고 분할된 면들 속에 그려진 몇몇 에피소드로 암시된다.



 각을 세운 보석에서 발산하는 듯한 형형색색의 면과 면 사이에 샤갈의 실버 화이트는 눈가루처럼 영롱하다. 그림 속 주인공의 새하얀 눈, 그의 백지장 같은 입술, 시인이 올리브빛으로 물들었다는 겨울 열매들도 안개꽃다발처럼 다투어 퍼진다. 이 모든 흰색이 한겨울의 눈을 연상하게 한 것 같다. 샤갈의 흰색은 화면의 내용들을 설명함과 동시에 보는 이의 염원대로 상상할 기회를 제공한 셈이다.



 세상의 다양한 수고와 험한 풍경들을 공평하게 덮어 버리는 흰 눈은 우리를 들뜨게 하고 설레게 한다. 펑펑 내리는 눈으로 다음해 농사의 풍년을 점치고 연인들은 첫눈 오는 날 만날 것을 약속한다. 김춘수는 겨울 아닌 3월에 봄의 절정을 기다리며 “수천 수만의 날개를 달고” 눈이 내린다고 했다. 많은 이가 그 시를 읽으며 샤갈의 마을에 눈이 내린다고 믿는다. 시인 이용악은 “잉크병 얼어드는” 한밤에 문득 깨어 북쪽 고향에 내릴 함박눈을 불러들인다. 아직 겨울은 남아 있고 나는 내가 원하는 눈이 조만간 나의 눈썹에 얹힐 것을 기다린다. 그때 샤갈이 못 그린 ‘눈 내리는 마을’을 그릴까 싶다.



전수경 화가



 ◆약력 =서울대 동양화과 졸업, 동 대학원 미술이론 석사, 미술학 박사 과정 수료. 한국미술신예작가상, 마카오 민정총서 초대전 외 10회 개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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