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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명복 칼럼] 영화 한 편이 뭐라고

배명복
논설위원·순회특파원
“우리는 미국 문화의 가장 저급하고, 가장 바보스럽고, 가장 천박한 형태들을 돈을 내거나 아니면 훔쳐가는 이들에게 수출하고 있다. 전 세계의 지적이고 예민한 사람들이 미국의 대중문화를 웃음거리로 삼는 것은 당연하다.” 미국의 저명한 외교관이자 역사가였던 조지 케넌이 한 말이다.



 케넌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대공산권 전략의 근간이 된 봉쇄정책을 입안한 인물이다. 소련의 붕괴로 냉전이 끝나고 유일 초강대국 미국의 시대가 열렸지만 그는 문화력보다 군사력에 치우친 미국의 장래를 어둡게 봤다. 케넌은 특히 미국의 대중문화에 매우 비판적이었다. 1999년 8월 11일자 ‘뉴욕 리뷰 오브 북스’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미국의 대중문화가 세계 지식인들의 조롱거리가 되고 있는 현실을 개탄했다. 심지어 ‘쓰레기’란 표현도 서슴지 않았다.



 나는 미국의 대중문화가 저급하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창의적이고 건강한 요소가 더 많다. ‘웨스트윙’ ‘뉴스룸’ ‘하우스 오브 카드’ 같은 드라마에서 미국 대중문화의 독창성과 저력을 실감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할리우드의 메이저 제작사인 소니 픽처스가 논란 끝에 개봉한 영화, ‘디 인터뷰’에 관한 한 케넌의 한탄과 우려에 깊이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북한이라는 현대판 세습왕조 체제의 갓 서른을 넘긴 우스꽝스러운 지도자를 코미디의 소재로 삼고 싶은 영화적 상상력은 존중해야 마땅하다. ‘깡패국가’라 할지라도 엄연한 주권국가의 현직 지도자를 극 중 암살하는 설정도 표현의 자유에 속한다고 봐줄 수 있다. 그렇더라도 신체의 특정 부위와 관련된 추잡한 섹스 코드를 곳곳에 삽입해 스스로 싸구려 저질 막장 코미디를 추구했어야 하는 것인지는 나로선 이해하기 힘들다. 아무리 잠깐 씹다 버리는 추잉검 같은 B급 오락물이라지만 이따위 것을 영화라고 만들어 버젓이 시장에 내놓는 후안무치가 놀랍다. 영화를 보고 든 첫 번째 생각은 양치질을 하고 싶다는 거였다.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은 소니 픽처스 해킹에 대한 ‘비례적 대응’을 공언한 지 보름도 안 돼 대북 추가제재를 명시한 행정명령에 전격 서명했다. 미국의 민간 사이버 업계를 중심으로 ‘내부자 소행설’이 확산되고 있는 것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미 최대의 사이버 보안업체인 노스(Norse)는 자체 추적 결과를 토대로 소니에서 해고된 직원 1명 등 6명을 용의자로 압축했다며 북한 관련설에 정면으로 의문을 제기하고 나섰다. 노스는 자체 조사 결과를 미 연방수사국(FBI)에 전달하고 설명까지 했다. 그러나 FBI는 사이버 공격의 배후는 북한이라는 수사 결과에 변함이 없다면서 민간이 알 수 없는 결정적 증거가 있지만 기밀사항이기 때문에 공개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철저한 비보도를 전제로 언론에 진상을 확인시켜주면 의혹이 해소될 법한데도 그렇게 하지 않다 보니 논란이 정리가 안 되고, 북한은 계속 발뺌하고 있다.



 FBI의 수사 결과가 사실이라면 북한은 무모한 도발로 미국의 코털을 건드린 꼴이 다. 가만히 있었으면 관객들이 알아서 판단해 조용히 넘어갈 수 있는 영화였음에도 공연히 벌집을 쑤셔 화를 자초한 셈이다. 설사 영화가 밀반입돼 북한 주민들이 보게 되더라도 북한 당국이 걱정할 일은 없을 것 같다. 오히려 할리우드의 영화 수준에 대한 실망과 함께 북한을 업신여기는 미국에 대한 반감만 커질지 모른다.



 오바마의 행정명령으로 북한은 핵과 미사일을 개발하고, 인권을 유린하고, 악랄한 사이버 공격까지 감행하는 악(惡)의 존재로 더욱 굳어지게 됐다. 북·미 대화는 더욱 요원해졌다. 가장 갑갑한 처지가 된 것은 한국이다. 새해를 맞아 모처럼 남북대화 분위기가 무르익고 있는 마당에 미국이 북한 때리기에 나섰으니 난감한 노릇이다. 미국의 조치에 장단을 맞출 수도, 안 맞출 수도 없는 난처한 상황이다. 이럴 때는 정공법이 최선이다.



 남북관계와 북·미 관계는 차원이 다른 문제다. 공식적으론 미국도 대화를 통한 남북관계 개선을 지지한다는 입장이다. 그런 만큼 미국의 대북 추가제재에도 불구하고 남북대화는 우리의 필요에 따라 추진해야 한다. 더구나 대북 제재는 전혀 새로운 게 아니다. 남북대화의 필요성에 대해 동맹국인 미국에 설명하고 이해를 구하는 절차는 물론 필요하다. 그 때문에 시간은 조금 더 걸릴지 몰라도 미국 때문에 할 일을 못 해서는 안 된다. 필요하면 박근혜 대통령이 오바마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야 한다.



 쓰레기 같은 할리우드 영화 한 편 때문에 미국과 북한이 정면 충돌하고, 그 불똥이 한반도로 튀어 남북대화가 무산된다면 그거야말로 진짜 코미디다. 케넌이 지하에서 혀를 차며 통탄할 일이다.



배명복 논설위원·순회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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