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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66) 제79화 육사졸업생들(119)-김창룡소위

김창룡소위가 제1연대에서 정보소대를 운영하면서 한참 군내사찰활동을 펴고 있을 때 송호성 경비대사령관이 법무처장 김완룡대위를 불렀다. 김창룡을 조사하여 파면시키도록 하라는 것이었다.
그때 송사령관은 한통의 문서를 김대위에게 던져주었다. 미군요로를 거쳐 사령부로 보내진 김창룡에 등용에 대한 항의서였다.
내용인 즉 김창룡은 해방될 때까지 일본군 헌병 앞잡이로서 만주의 우리동포들에게 혹독한 박해를 자행한 민족 반역자인데 그런 자가 어떻게 신생조국의 국군창설에 등용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김완룡대위는 제1연대로 가서 이성가 연대장과 이정석 정보주임 (군영·예비역소장·현재 미국거주)에게 문제의 합의서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들은 군내의 공산당을 잡아내는데는 김창룡은 꼭 필요한 사람이니 어떻게 해서든지 살려서 일을 하게 하라고 간청했다.
김완룡대위만 해도 일본중앙대학을 다니다 학병으로 끌려가 일본군 평양사단에 근무하면서 학병들의 탈출·무력항전 계획을 주모하다가 사전에 누설되어 헌병대에 구금된 후 징역9년을 선고받아 복역하는 동안 혹독한 고문을 당했던 경험이 있기 때문에 헌병출신인 김창룡도 그런 부류의 인간일 것이라는 좋지 않은 선입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김창룡소위를 불러들였다. 김완룡대위는 그가 예상한 대로 김창룡의 첫인상은 『참으로 악인다운 지독하고 험상궂은 모습이었다』고 전했다. 김대위는 조사를 시작했다.
『귀관이 경비대에 들어온 동기는 무엇인가.』
『네, 일본군대에서 배운 좋은 점을 펴가지고 조국의 군대를 위하여 몸을 바치고자 들어 왔읍니다.』
『그렇다면 조국에 대한 그런 희생정신은 언제부터 가졌는가.』
『일제때는 배운 것이 없어 어떻게 살아보려고 한 것이 헌병으로 들어가게 됐는데 해방이 되고서 비로소 나라를 알게되고 자신을 알게됐습니다. 따라서 저에게 기회를 주시면 과거의 잘못을 거울삼아 죄를 씻고 충성을 다하겠읍니다.』
그러고는 해방후 북한에서 공산당에 붙잡혀 두번이나 사형선고를 받고 탈출하여 월남해서 입대하게된 경위를 자세히 설명했다.
김완룡대위는 김창룡이 험상궂은 인상으로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며 말하는 것이 처음에는 기분 나빴지만 인상과는 달리 솔직하고 씩씩한 태도에 호감을 갖게됐다.
마침 그때 김창룡은 당시 군내에서 의심을 받고 있던 이병조 김진석 최남근 김지회 오일균등 좌익장교들의 명단을 짜놓고 뒤를 밟고 있었기 때문에 일을 계속 맡겨보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송호성사령관에게 가서 이런 과도기엔 그런 경험자가 필요하니 내버려두라고 말했다.
처음엔『귀관이 술 얻어먹고 봐주려는 것 아니냐』며 주저하던 송사령관은 김완룡대위 (군영·예비역소장·함흥태생·변호사·현재65세)의 건의를 받아들였다. 숙군하면 으레 김창룡을 생각하게 된다. 그만큼 그는 숙군에 앞장섰고 철저했다. 그 때문에 그는 출세도 했고 권격도 휘둘렀지만 그것 때문에 욕을 먹게 되고 불운한 운명의 길을 걷게 됐는지도 모른다.
그러면 도대체 김완룡이란 어떤 사람이었는가. 그동안의 기록과 증언, 그리고 내가 들은 얘기를 종합해보면 이렇다.
김창룡은 1916년 함남 영흥군 요덕면 인상리의 산골마을에서 태어났다. 그곳에서 4년대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5세때 영흥으로 나와 영흥공립농잠실습학교에 들어가 2년과정을 마쳤다.
그러고는 일본인이 경영하는 영흥의 편창제사공장에 직공으로 들어갔다. 2년간 일하면서 일본인 사장으로부터 착실한 소년으로 인정받아 그의 추천으로 만주 장춘역의 직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거기서도 열심히 일해 2년만에 다시 일본인의 소개로 북지에 있는 일본헌병부대의 군속으로 들어갔다. 그는 세도가 당당한 일본헌병들을 곁에서 보면서 군속이 아닌 진짜 헌병이 되는 것을 평생의 소원으로 삼았었다고 한다.
그래서 모든 고난을 견뎌내며 열심히 일해서 일본장교의 눈에 들어 1940년초에는 신경 (장춘)에 있는 관동군 헌병교습소에 들어갈 수 있었다. 소정의 과정을 마치고 일본 헌병이 됐다. 아직은 보조헌병이지만 그는 드디어 대망의 소원을 이룬 셈이다. 그때 김창룡의 나이 25세였다.
김창룡은 어느날 박기병을 잡아들였다. 박기병은 그때 일본군 관동군에 근무했었는데 조선인 독립운동가들과 내통했다 하여 김창룡에게 걸려든 것이다.
김창룡은 박기병을 심문하면서 마구 두들겨 팼다. 그러나 맞고만 있을 박기병씨가 아니었다. 『조선사람끼리 왜 이러는가. 너 그따위로 놀면 죽어!』했다. 그 후 두 사람은 가까와져 해방후 먼저 서울에와서 군영반을 나온 박기병장군 (66·예비역소장)이 김창룡을 군대에 넣어주는 인연으로 발전했다.
어쨌든 김창룡은 일본헌병이 되고 나서 2년동안 만주에서 50여건의 항일조직을 적발, 검거한 공로로 헌병오장 (오장·국군의 병장급 상당)으로 특진됐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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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석 소장 : kimseok@joongang.co.kr (02-751-5511)
국방연구원 전력발전연구부ㆍ군비통제센터를 거쳐 1994년 중앙일보에 입사한 국내 첫 군사전문기자다. 국방부를 출입한 뒤 최장수 국방부 대변인(2010~2016년)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군사안보전문기자 겸 논설위원으로 한반도 군사와 안보문제를 깊게 파헤치는 글을 쓰고 있다.

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