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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제스가 꼽은 황푸 최고 인재는 ‘전쟁 마귀’ 린뱌오

장정(長征)을 마친 린뱌오(앉아있는 사람 가운데 왼쪽에서 넷째)는 옌안의 홍군대학 교장에 취임했다. 앞줄 둘째가 홍군대학 교육위원회 주임과 정치위원을 겸한 마오쩌둥. 뒷줄 왼쪽에서 다섯 번째는 당시 마오의 부인 허쯔전(賀子珍). 1936년 10월 옌안의 홍군대학 문전.
황푸군관학교 얘기에 린뱌오(林彪·임표)가 빠질 수 없다. 중일전쟁이 막바지를 향하던 1945년 5월 25일 새벽, 류보청(劉伯承·유백승), 덩샤오핑(鄧小平·등소평), 보이보(薄一波·박일파), 천이(陳毅·진의), 린뱌오 등 중공의 군사 지도자들을 태운 미군 수송기 한 대가 홍색 수도 옌안(延安)을 출발했다.

전송 나온 마오쩌둥(毛澤東·모택동)의 경호원이 기록을 남겼다. “뭔가 중요한 사명을 띠고 떠나는 눈치였다. 주석과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는 비행기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하늘을 응시했다. 손에 땀이 나는지 연신 손을 바지에 문질렀다. 국·공전쟁의 서막인 줄은 한참 지나서야 알았다.”

충칭(重慶)에 있던 장제스(蔣介石·장개석)는 옌안을 떠난 수송기의 향방을 궁금해했다. 행정원 군사부장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믿을 만한 소식입니다. 산시(山西)성 리청(黎城)에 사람들을 내리고 돌아갔습니다. 류보청과 덩샤오핑은 현지에 남고, 천이는 화중(華中)지역으로 이동했습니다. 린뱌오만 행방이 묘연합니다.”

꼬마 제갈량 소리를 듣던 바이충시(白崇禧·백숭희)가 한마디 던졌다. “동북으로 간 게 분명합니다.” 장제스는 바이충시의 판단에 동의했다. 고개를 끄덕이며 한숨을 내뱉었다. “나는 린뱌오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안다. 내가 관심이 부족했던 탓에 공산당에 합류했다. 린뱌오가 갔다면, 앞으로 동북은 편할 날이 없겠구나.”

국민당이 대륙을 통치하던 시절, 황푸군관학교는 24기까지 졸업생들을 배출했다. 5기생까지가 직접 장제스의 교육을 받았다. 4기생 중에 우수한 인재들은 거의 국민당에 참여했지만, 장제스는 린뱌오를 최고의 인재로 쳤다. 훗날 적이 됐지만 “황푸가 배출한 가장 우수한 군사가는 4기생 린뱌오”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문혁 초기의 린뱌오(왼쪽)와 마오쩌둥. 연도 미상.
린뱌오의 장제스에 대한 평가는 냉혹했다. “황푸 시절에 본 장제스는 군벌에 불과했다. 항상 군림하려고만 했지 교관과 학생들을 존중하지 않았다. 화도 잘 내고 변덕도 심했다. 기분 내키면 잔정을 베풀었지만, 가끔 말 같지 않은 소리로 우리를 우롱했다. 그런 사람은 특징이 있다. 큰 일을 이룬 듯하지만 결국은 마지막 문턱을 넘지 못한다.”

린뱌오는 타고난 약골이었다. 황푸군관학교 학생 시절 새벽 구보에서 낙오하는 학생은 린뱌오가 유일했다. 거의 매일, 구보가 끝나면 교관에게 따귀를 한 대 얻어맞고서야 아침을 먹으러 갔다. 체격도 군인과는 거리가 멀었다. 동기생들 사이에서 요즘으로 치면 고문관 취급을 받았다.

체력은 성격에도 영향을 미쳤다. 동기생들 눈치를 보다 보니 학내에 만연하던 좌우투쟁에도 나설 엄두를 내지 못했다. 정치적인 발언도 거의 하지 않았다. 국민당이나 공산당, 그 어느 쪽의 관심도 끌지 못했다. 당시 군관학교 정치부 교관이었던 중공 원수 녜룽전(聶榮臻·섭영진)의 회고록 한 구절을 소개한다. “황푸군관학교에서 린뱌오를 처음 알았다. 말수가 적고 매사에 소극적이었다. 웃거나 찡그리는 법이 없고, 돌출 행동도 하지 않았다. 도대체 뭘 생각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다른 학생들에 비해 뛰어난 구석이라곤 단 한 군데도 없었다.”

‘모든 게 우연’이라는 말이 맞는다면, 장제스가 이름조차 몰랐던 린뱌오를 알게 된 것도 우연이었다. 교장 시절, 학생들을 데리고 후이저우(惠州)전투에서 승리한 장제스는 기분이 좋았다. 학생들에게 승리 원인을 발표해 보라며 자리를 마련했다.

내용은 “보병과 포병의 협조가 성공적이었다” “교장의 탁월한 지휘력” “사기충천” 등 허구한 날 듣던 소리였다. 실망한 장제스는 자리를 떴다. 이날 장제스가 안경만 제대로 챙겼더라면 린뱌오에 대한 미련도 떨쳐버리기 쉬웠다. 놓고 온 안경을 챙기기 위해 다시 자리로 돌아온 장제스는 겁먹은 모양의 왜소한 청년이 연단 위에 서 있는 것을 보자 다시 자리에 앉았다.

청년은 분필을 들고 흑판에 뭔가 그리기 시작했다. 자세히 보니 후이저우의 지형도였다. 장제스는 흑판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산천과 하류, 민간 가옥, 지세(地勢)와 지모(地貌) 등 그렇게 상세할 수가 없었다. 청년은 말을 더듬거렸다. 마지막 말이 장제스의 가슴을 쳤다. “용병(用兵)은 대단한 것 같아도 별게 아니다. 지형을 손바닥 보듯이 파악하고, 계획을 철저히 세운 후에 움직이면 된다. 화려한 언사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그날 밤 장제스는 평소 습관대로 일기에 소감을 적었다. “린뱌오는 내게 전쟁 예술의 정수를 보여줬다. 눈에도 경계의 빛이 가득했다. 대전략가의 자질을 타고났다.”

장제스는 린뱌오가 공산당원인 줄 몰랐다. 졸업과 동시에 사령부에 자리를 마련해 줬다. 측근에서 린뱌오는 공산당원이라며 만류해도 듣지 않았다. “황푸군관학교는 공산당원의 대본영이다. 친척 중에도 공산당원이 많다. 내가 데리고 있으면서 붉은 물을 빼 놓겠다.” 린뱌오가 “교장의 신임과 키워준 은혜에 감사한다”는 편지를 남기고 황푸를 떠날 줄은 상상도 못했다.

린뱌오는 장제스가 국공합작을 파열시키고 정권을 잡자 무장폭동에 가담해 두각을 나타냈다. 1933년 2월, 홍군 섬멸작전에 나선 국민당군 2만5000여 명이 린뱌오의 포로가 되자 장제스는 경악했다. 황푸 출신 심복들에게 편지를 보냈다. “린뱌오는 교장인 나를 실직시키려고 작정을 했다. 황푸 교장 시절 린뱌오에게 관심을 덜 쏟는 바람에 공산당으로 가는 것을 막지 못했다. 너희들에게 관심을 보였지만 너희들은 나를 실망시켰다. 린뱌오는 전쟁의 마귀다. 나도 인연을 끊겠다. 목에 현상금 10만원을 걸겠다.”

장제스는 말뿐이었다. 린뱌오가 부상당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안절부절못했다. (계속)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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