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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무게는 나의 사랑입니다

60년 만에 돌아온 푸른 양, 청양(靑羊)의 해다. 아무도 밟지 않은 새하얀 눈밭처럼 어떤 그림이든 그릴 수 있는 순결한 365일이 우리 앞에 있다. 앞으로 밀고 나가야 힘겨운 과거를 떨칠 수 있는 법. 새해에 위로와 희망이 될 만한 명사들의 편지를 3회에 걸쳐 싣는다. 첫 번째 편지는 지난해 미당문학상을 받은 시인 나희덕씨가 보내왔다.


나희덕 시인이 저무는 해의 마지막 날인 지난달 31일 개인 집필실이 있는 광주광역시 양림동의 ‘호랑가시나무창작소’를 찾았다. 차분한 목소리로 새해 소망과 다짐을 전했다. [광주광역시=프리랜서 오종찬]
세상에 참 평화 없어라….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이 노래가 유난히 아프게 들리는 새해 아침입니다. 아이들이 수학여행에서 돌아오지 못했지만, 세월호의 진실은 아직 깊은 바다 속에 갇혀 있습니다. 군대에 갔던 젊은이는 가혹행위를 견디다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쌍용차 평택공장에서는 지금도 해고 노동자들의 복직을 위해 70m나 되는 굴뚝에 올라 농성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회 양극화는 갈수록 심각해지고, 힘이 약한 사람들은 더 막다른 곳으로 내몰리는 세상입니다. 정의와 평등의 정신은 씨가 마른 지 오래고, 자기 이익만 위해 목소리를 높이는 싸움판이 돼버렸습니다. 그래서 여느 해보다 평화를 기원하는 마음이 더 간절합니다.

 오랜만에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을 펼쳤습니다. 책꽂이가 넘칠 때마다 수없이 책을 솎아냈지만, 대학시절부터 30년 세월 동안 자리를 지켜온 책들이 있습니다. 1980년대에 성바오로출판사에서 나온 『고백록』도 그 중 하나입니다. 새로운 번역본들이 나왔음에도 왠지 이 책은 빛바랜 종이 위에 세로쓰기 형식으로 읽어야 제격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님 기림’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데, 한용운의 시에 등장하는 ‘님’처럼 사람마다 극진한 마음으로 기리는 님은 각기 다르겠지요.

 한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면서 왜 이 책을 떠올리게 되었을까요. 이 책은 잘못 살아온 사람의 내면적 고백인 동시에 자신의 잘못을 돌이켜 거룩한 삶으로 향하게 된 회심(回心)의 기록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읽다보면 21세기에 사는 우리의 고민이나 5세기에 살았던 한 사제의 고민이 크게 다르지 않구나 싶습니다. “늦게야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제 안에 당신이 계시거늘 저는 제 밖에서 서성이며 당신을 찾았나이다”고 말하는 순례자처럼, 늦게라도 어떤 돌이킴의 순간이 찾아와 주기를 기다려 봅니다.

 고통으로 가득한 인간의 도성 앞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참다운 안식이란 모든 것이 본래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모든 물체가 스스로의 무게에 의해 움직이듯이, 인간의 영혼도 부단히 움직여 찾아가야 할 인식의 장소가 있다고.

이를 위해 그는 신에 대한 사랑, 곧 자애(caritas)가 필요하다고 여겼습니다. 물론 그 반대편에는 이기적이고 어리석은 사랑인 탐욕(cupiditas)이 존재하지요. “나의 무게는 나의 사랑입니다”라는 그의 말에 비추어 오늘 나의 무게는 얼마나 될까 헤아려 봅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사랑’ 개념으로 박사논문을 썼던 한나 아렌트는 신에 대한 사랑을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까지 확장했습니다. 신학과 철학을 현대정치와 결합시켜 새로운 사랑의 윤리를 제시한 그녀는 ‘희망’이나 ‘욕구’가 아니라 ‘기억’과 ‘감사’를 강조했습니다. 눈앞에 없는 대상을 막연히 바라고 꿈꾸기보다는, 삶이 주어진 것에 감사하고 지나온 기억들을 잘 들여다보자는 것이지요. 개인에게든 집단에게든 기억은 어제와 내일을 잇는 연결고리가 되어주니까요. 그런 점에서 잘 기억한다는 것은 잘 사랑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물론 주어진 현실을 체념하고 무조건 용서하자는 뜻은 아닙니다. 그녀는 오히려 인간 속의 비범한 신성(神性)보다는 악(惡)의 평범성에 주목했습니다. 또한 철학이 추상의 감옥에서 걸어나와 우리가 살아가는 구체적 현실 속으로 발을 디뎌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혼자만의 구원이나 아름다움을 추구하기보다 어떤 방식으로든 현실에 개입하고 선택함으로써 불편한 짐을 나누어 짊어지는 것이 사랑이지요. 제가 시를 쓰면서 늘 부딪치는 문제 역시 문학은 어떤 방식으로 세상을 사랑하는가, 그 사랑을 어떻게 표현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서른을 앞두고 저는 이렇게 쓴 적이 있습니다. “잘 길들여진 발과/어디로 떠나갈지 모르는 발을 함께 달고서/그렇게라도 걷고 걸어서/나 서른이 되면/그것들의 하나됨을 이해하게 될까./두려움에 대하여 통증에 대하여/그러나 사랑에 대하여/무어라 한마디 말할 수 있게 될까./생존을 위해 주검을 끌고 가는 개미들처럼/그 주검으로도/어린것들의 살이 오른다는 걸/나 감사하게 될까, 서른이 되면.”(『나 서른이 되면』) 그러나 서른을 지나 어느새 지천명(知天命)의 나이에 이르렀지만, 이렇다 할 답을 찾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새롭게 펼쳐진 시간 앞에 두근거리며 기원하는 마음을 접어둘 수는 없습니다. 올해는 특히 양 중에서도 성품이 곧고 힘찬 푸른 양의 해라고 하지요. 생각해보니, 아름다울 미(美)를 비롯해 착할 선(善), 옳을 의(義), 상서로울 상(祥), 기를 양(養) 등 복된 뜻을 지닌 한자들에 양(羊)자가 들어 있군요. 이런 가치들이 힘을 얻고 활짝 펼쳐지는 새해가 되면 좋겠습니다. 무엇보다도 함께 모여 오순도순 풀을 뜯는 초식동물의 평화가 유린되지 않고 오롯하게 지켜졌으면 좋겠습니다. 여리디 여린 시간을 향해 싱그러운 풀 한 가닥 내미는 마음으로 새해 아침을 맞습니다.

◆나희덕=1966년 충남 논산 출생. 연세대 국문과 졸업. 8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뿌리에게』 『어두워진다는 것』 『야생사과』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 등. 김수영문학상·현대문학상·미당문학상·임화문학예술상 수상. 조선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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