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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 해방둥이에게 듣는다


문희상 새정치련 비대위원장

노 전 대통령 서거 가장 안타까워
고난당할 때 한 번도 못 가봐 회한


새정치민주연합 문희상 비상대책위원장은 1945년 3월 3일(음력) 경기도 ‘양주군 의정부읍’에서 태어났다. 지금도 살고 있는 곳이다. 태어났을 때 이름은 ‘희상(喜相)’이 아닌 ‘정흥(正興)’이었다. 군대를 제대한 뒤인 1973년 ‘재벌이 될 수 있는 이름’이라며 어머니가 용하다는 작명가에게 받아온 이름 ‘희상’으로 개명했다. 개명 후 돈을 벌었다. “의정부에 ‘숭문당’이란 책방을 내고 새벽 5시 반에 일어나 문을 열고 밤낮없이 일했어. 10년에 10억원 버는 게 목표였는데 7년 만에 10억원을 벌었지.”

 ‘정치 지망생’이었던 그는 박정희 전 대통령 서거 뒤 맞은 ‘서울의 봄’ 시절 김대중(DJ) 전 대통령을 찾아가 정계에 입문했다. 그가 꼽은 ‘70년간 가장 감격적인 순간’은 DJ가 대통령에 당선된 97년 12월 18일이다.

 “4층 건물의 옥탑방에 있던 의정부 지역구 사무실로 새까맣게 많은 사람이 올라왔어요. 처음 보는 사람들도 울면서 나타나고, 골목마다 만세를 부르는 느낌이었지. 난 막상 눈물이 안 나오더라고.”

 그날은 돌아가신 아버지와 화해한 날이기도 했다. “내 마음속 아버지는 영화 ‘국제시장’에 나오는 아버지의 모습이야. 박정희 전 대통령을 존경했고 (유신헌법에 의해 조직된)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이기도 했지. 그래서 아버지와 갈등이 있었거든. 새벽 3시쯤 아버지 산소에 가 큰절을 했어요. ‘아버지 내 말이 맞았죠?’라는 이야기가 하고 싶어서…. 돌아가신 아버지완 그때 화해했어요. 내 마음속에서 화해가 되니 통곡인지 오열인지. 꺼이꺼이 소리를 내면서 울었고….”

 ‘가장 안타까운 순간’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사망한 2009년 5월 23일이었다. “문재인이 나한테 제일 먼저 연락했는데 전화를 받고 털썩 주저앉았다”고 회고했다. 그는 ‘노무현 정부’의 초대 대통령 비서실장을 지냈다. “너무 깊은 회한이 남았어, 가슴속에…. 노 전 대통령이 고난을 당할 때 용기가 없어서 한 번도 못 가봤어. 명색이 초대 비서실장이란 놈이 못 갔어”라며 인터뷰 도중 끝내 눈물을 흘렸다.

 광복 70년을 맞은 대한민국엔 70점을 줬다. “국민은 100점 만점인데 정치 지도자들이 50점”이라 평균해서 70점 정도로 봤다. 대한민국의 과제론 ▶경제 민주화 ▶복지 ▶한반도 평화를 제시했다. “시대 정신에 투철한 지도자가 국민의 힘을 묶어내야 한다”면서다.

서승욱·이지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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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달 크라운해태제과 회장

외환위기, 해태 인수 때 두 번 고비
허니버터칩 히트 “아직 할 일 많아”


올해 고희를 맞는 윤영달(사진) 크라운해태제과 회장에게 2014년은 최고의 해였다. 감자칩에 꿀을 발라 발상의 전환을 꾀한 ‘허니버터칩’으로 대히트를 쳤다. 국내 유통업계는 아직도 허니버터칩 품귀현상을 겪고 있을 정도다.

 하지만 그는 “아직도 해야 할 일이 많다”고 했다. 해방 이후 70년, 먹거리 산업에 일생을 바친 그에게 회사는 바로 그 자신이었다. 회사의 모태인 크라운제과는 많은 굴곡을 겪으며 성장했다. 1998년 1월 크라운제과는 부도를 맞았다. 최악이었다.

 “외환위기와 국제통화기금(IMF) 체제에 대한 대비가 없었던 탓이죠. 아버님께서 만든 회사가 없어질 판이었습니다.”

 하지만 브랜드를 강화하고 시스템을 개선하면서 외환위기를 가까스로 극복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2005년 1월 맞수 해태제과를 전격 인수했다. 불과 10년 남짓한 사이에 깊은 계곡과 높은 산봉우리까지 경험했다. 이 두 가지 굴곡은 윤 회장의 뇌리에 깊이 각인돼 두 가지 경영원칙으로 승화됐다.

 무용지용(無用之用·쓸모없어 보이는 것이 실은 유용하다)과 호접지몽(胡蝶之夢·장자가 꿈속에서 나비가 되었던 것에서 유래한 고사)이다. 중국의 사상가 장자(莊子)를 가장 존경한다는 윤 회장은 “지금은 유익한 줄 알았는데 시간이 지나고 보면 무익한 것이 있다”며 “내가 제대로 된 길을 가는 것인지, 꿈속에서 헤매는 것은 아닌지 걱정을 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두 가지 사자성어는 최고경영자(CEO)로서 스스로를 돌아보는 바로미터라고 한다.

 광복 70주년 대한민국의 점수에 대해서는 60~70점이라고 답했다. 그 이유로는 사회에 만연한 불신 풍조를 꼽았다. 그의 회사 역시 불신의 아픔을 겪었다. 2005년 인수한 해태제과는 구조조정에 대한 반발로 당시 영업사원이 중심인 노조가 파업에 나서기도 했다. 이 때문에 당시 20%였던 해태제과 점유율은 14%로 급락했다. 그는 “구성원들이 서로 반목하고 믿지 못하는 사회는 발전을 기대하기 어렵다”면서 “앞으로 사회의 당면과제는 신뢰 회복이 우선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현택 기자


“2003년 평양공연 못 잊어 … 통일한국 국기 그리고 싶다”

가수·화가 조영남
영호남 싸움 지겨워 ‘화개장터’ 작곡
새 노래 ‘통일바보’도 그런 뜻 담겨


“왜 내가 계속 태극기를 그리는지 아나? 통일이 되면 누군가 새 국기를 그려야 할 텐데, ‘조영남이 태극기를 많이 그린다’는 소문을 내놓으면 그때 기회가 오지 않겠나.”

 지난 29일 서울 청담동 자택에서 만난 조영남(70)은 일명 ‘꿈의 깃발’을 펼쳐보였다. 남북통일을 가정하고 그려 본 미래의 국기였다. 가수이자 화가인 조영남은 황해도 남천에서 태어난 해방둥이다. 1951년 1·4 후퇴 때 가족과 함께 남한으로 내려온 이후 다시 고향땅을 밟지 못했다. 그의 숙원은 남과 북이 하나가 되는 것, 통일 한국의 새 국기를 그리는 것이다. 지난 6월, 23년 만에 발표한 자작곡 ‘통일바보’에도 그 염원을 담았다. 광복 70주년을 기념하는 인터뷰에서 그는 왜 ‘통일’이란 메시지를 꺼내들었을까. “젊을 때는 태백산맥을 두고 경상도와 전라도가 싸우는 게 정말 지긋지긋했다. 그래서 ‘화개장터’라는 곡을 쓴 거다. 이제 다음 소원이 뭐냐고 물으면 통일이다. ‘통일바보’는 제2의 화개장터다.”

 전쟁을 겪은 그에게 남북 분단은 70년 인생에서 가장 비극적인 사건이었다. 어린 시절이지만 아수라장이었던 피란길은 지금도 선명한 상처로 남아 있다. 생계를 위해 미8군 쇼단에서 외국 곡을 불러야 했고, 황해도를 두고 서울을 고향이라고 말해야 하는 현실이 늘 안타까웠다. 통일 한국을 몇 년간 경험한 해방둥이로서 그에게 통일은 당위인 셈이다. “2003년 평양에 류경 정주영체육관이 개관했을 때 기념공연을 위해 방북했었다. 정말 감격스러운 순간이었다. 죽기 전에 고향에 꼭 화실을 짓고 싶다.”

 조영남은 광복 70주년을 맞는 오늘의 대한민국에 75점을 매겼다. 25점은 노벨 과학상을 받는 날을 위해 남겨뒀다. 그는 스포츠를 예로 들며 “옛날엔 수영이나 유도에서 중국과 일본을 이긴다는 걸 상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이길 수 있다. 과학 분야도 가능하다”라고 말했다. 무모할 정도로 열정적인 한국인의 국민성이라면 무엇이든 해낼 수 있다고 했다.

 “나는 우리가 지금 제일 잘 산다고 생각한다. 모두 최선을 다해 살고 있지 않은가. 물론 삶은 고통스럽고 힘들다. 그런데도 아침에 눈이 떠진다. 좋은 날을 기다리다 시간을 흘려보내지 말고 긍정적이고 역동적으로 살았으면 좋겠다.”

김효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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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순용 전 검찰총장

태어난 날 아버지는 징용 훈련
만주로 끌려가기 직전 일제 망해


“이제 ‘빨리빨리’ 대신 ‘반듯하게’가 돼야 합니다.”

 박순용(70·사진) 전 검찰총장은 29일 해방 70년을 맞은 대한민국의 과제를 ‘기본’으로 꼽았다. 박 전 총장은 “우리나라는 어느 정도 성장을 이뤘다”며 “이젠 기본을 반듯이 하는 데 주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 전 총장은 1945년 5월 29일, 경북 선산군(현 구미시)의 한 농촌 마을에서 태어났다. 당시 그의 아버지는 스물두 살에 일제에 징용돼 서울 용산에서 훈련받고 있었다. 박 전 총장은 “패색이 짙어진 일제가 병력과 물자를 남김없이 끌어 모으며 ‘발악’하던 시기였다”며 “조그마한 시골마을에 피할 데가 없어 아버지도 결국 끌려가야 했다”고 말했다.

 “아버지가 남태평양으로 갈지, 만주로 갈지 기로에 섰을 때 일제가 항복을 선언했어요. 조금만 늦게 해방됐다면 아버지를 평생 뵙지 못할 뻔했습니다.”

 박 전 총장의 아버지는 고향으로 돌아온 뒤 은사의 추천으로 평생 교직에 몸담았다. 박 전 총장은 “넉넉하지 않은 형편에 6남매 중 장남이라는 부담감이 있었다”며 “그래도 교직에 계셨던 아버지 덕택에 밥은 굶지 않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군 법무관 시절까지 포함해 31년간 검찰에 몸담았던 박 전 총장은 1988년 서울 올림픽을 잊지 못한다. 그는 “77년 독일에 연수 갔을 때만 해도 (독일인들이) 한국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몰랐는데 불과 11년 뒤 국제대회를 개최하는 걸 보며 감회에 젖었다”고 했다.

 박 전 총장은 이후 법무부 검찰국장, 대검 중앙수사부장, 서울지검장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검찰총장 임기제 도입 후 취임한 18명 가운데 김기춘 청와대 비서실장을 포함해 임기를 채운 6명의 총장 중 한 명이다. 퇴임 후 여야에서 영입 제안이 숱하게 들어왔지만 모두 거절했고, 대형 로펌행도 마다했다. “검찰총장은 다음이 있는 자리가 아니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는 지난해 4월 16일 세월호 참사를 예로 들며 다시 기본을 이야기했다.

 “우리나라가 성장 곡선을 그릴 때면 꼭 큰 인명사고가 터져 국민을 절망시켰습니다. 이제라도 속도보다는 내실을 다져야 질적으로 더 높은 성장을 이뤄낼 수 있다고 봅니다.”

노진호 기자


 이한구 새누리당 의원
"현재 대한민국은 50점 미만, 생존전략 찾아야"


새누리당 이한구 의원은 1945년 12월12일(양력) 경북 경주시 양동마을에서 태어났다. 지금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곳이다.

‘해방둥이’인 그는 철도공무원인 아버지를 따라 부산·대전 등으로 이사를 자주 다녔다. 생활도 넉넉지 않아 장학금을 받기 위해 악착같이 공부했다고 한다.

1969년 제7회 행정고시에 합격한 뒤 그는 줄곧 재무부에 근무하면서 엘리트 관료의 길을 걸었다. 그러던 중 1980년 신군부가 집권하면서 그는 출세가 빠르다는 이유로 축출 대상이 됐다. 그는 “당시 인사 질서를 어지럽혔다는 황당한 이유로 신군부에게 찍혀서 공무원을 그만두게 됐다. 이후 혈혈단신으로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며 회고했다.

유학을 마치고 대우경제연구소 소장으로 일하던 그는 2000년 이회창 당시 한나라당 총재의 권유로 정치권에 입문했다. 이후 당 정책위의장과 원내대표 등을 거치면서 당내 정책통으로 자리를 잡았다. 한때는 박근혜 대통령의 ‘경제교사’로 불리기도 했다.

이 의원은 ‘해방 이후 가장 감격스런 순간’으로 1996년 12월 12일 우리나라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했을 때를 꼽았다. 공교롭게도 이 의원의 생일과 날짜가 같다. 그는 “우리나라가 OECD에 가입한 건 김영삼 정부 때지만, 그 기반은 우리가 닦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경제관료 출신으로 보람을 많이 느꼈다”고 말했다.

반면 가장 안타까운 순간으로는 1979년 박정희 전 대통령이 서거한 10ㆍ26 사태를 떠올렸다. 당시 재무부 관료였던 그는 박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을 접하고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그는 “우리나라가 경제 발전의 틀을 갖추고 한 단계 더 도약할 수 있었던 시기였기 때문에 더 안타까웠다”고 술회했다.

평소 쓴소리를 아끼지 않는 그는 지금의 대한민국에 대해 “50점 미만”이라는 박한 평가를 내렸다. 미래에 대한 준비가 돼있지 않다는 이유다. 그는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을 닮아가지 않도록 하는 게 우리의 현실적인 과제”라며 “과거처럼 열심히 일만 하는 나라에서 벗어나 국민들이 자아실현을 할 수 있는 기회를 갖고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춰야 한다”고 강조했다. “조만간 일본을 방문해 우리나라가 일본식의 잃어버린 20년에서 탈피할 수 있는 길을 찾아보겠다”고도 했다. 다음은 인터뷰 요지.

-대한민국이 70년 새 몰라보게 발전한 원동력과 계기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대한민국의 발전은 절묘하게 조합을 잘 이룬 케이스라고 본다. ‘가난에서 탈출하자’는 국민의 염원과 ‘잘 살아보세’라는 국가의 비전, 이걸 중심으로 국민이 잘 단합했다. 경제 제일주의의 발전전략과 함께 시대가 변하는데 맞춰 전략을 업그레이드하는 정부의 능력에다 인재를 육성해야 한다는 특유의 뛰어난 교육열이 잘 뒷받침되기도 했다.”

-해방 이후 가장 큰 위기의 순간을 꼽는다면?

“6ㆍ25 전쟁 때가 가장 큰 위기였다. 당시는 공산주의 국가가 되느냐 안되냐의 중요한 갈림길이었다. 경제 부문에서 가장 큰 위기의 순간은 1970년대 말에 터진 오일쇼크였다. 어느 정도로 심각했느냐면 당시 재무부 장관이 돈을 빌리려고 외국계 은행의 지점장실에서 몇 시간 동안 기다렸다. 대통령까지도 중동에 있는 오일을 확보하기 위해서 현지에 가서 왕자들한테 사정할 정도였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경제인은?

“경제관료 중에선 김용환 전 재무부 장관을 가장 높이 평가하고 있다. 1960~70년대 당시에 돈을 벌어봤자 소용없던 시절이 있었다. 장사를 해서 돈을 벌어도 사채금리가 워낙 높아서 사채업자만 배부르게 지낼 때였다. 그때 김 장관이 8.3조치를 통해 빚을 장기상환할 수 있도록 하면서 많은 기업이 살아났다. 또 일본보다 앞서서 부가가치세를 도입했다. 이를 통해 재정이 건전할 수 있었다. 기업인으로선 유일한 유한양행 창립자가 기억에 남는다. 누구보다 기술과 자연을 중시했고, 생각 자체가 다른 기업인들보다 앞서 있었다. 제지회사를 하면서 나무를 베고 나면 반드시 나무를 심었을 정도였다.”

-대한민국은 현재 100점 만점에 몇 점인가?

“과거의 성공을 기준으로 하면 만점에 가깝다고 볼 수 있지만, 미래를 준비하는 관점에선 50점도 안 된다. 바깥에선 우리나라가 잘 산다고 부러워하지만, 막상 내부에선 못 산다고 생각하고 갈등도 심하다. 갈등 해소를 어떻게 하느냐에 대한 비전이 뚜렷하게 없고, 각자 자기가 할 일에 대해서도 책임감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이 당면한 과제와 앞으로 해야 할 일은?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을 닮아가지 않도록 하는 게 우리의 현실적 과제다. 과거에는 일본을 닮아서 성공했지만 실패한 것까지 닮아가고 있기 때문에 이것을 어떻게 탈피할 거냐를 고민해야 한다. 우리가 지향해야 될 이념이나 제도의 골간도 다시 한 번 정립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성숙한 자본주의 이념 체제를 갖고 있어야 한다. 국민이 주인의식을 갖는 민주주의가 돼야 하고, 지속가능한 복지국가를 만들어야 한다. 또 창조적인 지식국가를 만들어야 한다. 경공업과 중화학공업, 정보산업의 다음은 창조경제이기 때문에 창조경제에서 성공하지 못하면 우리가 선진국 되는 길이 그만큼 멀어진다.”

천권필 기자 feeli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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