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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0) - 제79회 육사졸업생들(103)| 장창국| 정규7기와 「6·25」

7기 정규는 제주도반란사건, 여순 반란사건 때 토벌작전에 일선 소대장으로 참가한 것을 시발로 6·25발발 때는 전부가 중대장 또는 연대참모로 참전, 휴전당시는 대대장 또는 사단참모들을 맡았다.
따라서 점프식 진급을 한사람은 한 사람도 없고 모두들 소정의 기간을 거쳐 진급했다.
특히 월남전 때 정규 7기생들이 사단장·참모장 등으로 많이 진출해 월남전의 중견을 이루기도 했다.
7기 정규들은 6·25당시 중대장 급이었기 때문에 단독의 작전이나 전과는 있기 힘들다.
사실 당시 전 부대에서 이들이 중대장 급을 거의 맡고 있었기 때문에 어느 전투, 어느 전승에 7기생이 끼지 않은 때가 없었으나 그 공은 윗사람한테 돌아가는 것이 상례였다.
7기(정규)생 가운데 6·25때 사망선고를 받고 살아난 사람이 있다.
50년 8월 국군이 후퇴하면서 동부전선에서 가장 치열한 공방전을 벌인 경북 기오·안강전투에서 당시 백인엽 대령의 수도사단 l7연대(연대장 김희준2기 준장예편)3대대장이었던 전우영씨(63·예천 준장예편)다.
안강전투는 아군으로서는 거의 마지막 보루라는 전략적인 중요성뿐 아니라 그 즈음 유엔군이 속속 내한하고 있는 때여서 국군이 더 이상 후퇴하지 않는다는 인상을 주려는 정치적 요인 때문에 필사적으로 매달린 전투였다.
당시 적은 8월중순 1차공세에서 실패하여 비학산으로 쫓겨 올라갔다. 이를 추격하던 중 17연대에 적이 갑자기 반격을 가하면서 전투가 치열했다.
그때 선두공격부대의 지휘관인 3대대장 전소령이 왼쪽 눈 바로 옆에서 뒤통수를 관통하는 총격을 받았다. 온통 피범벅이 되어 김희준 연대장도 전사로 보고하고 가마니에 싸두었었는데 군의관이 뒤늦게 와 숨이 끊기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 후송해 6개월 동안 치료를 했다.
전씨는 그후 계속 군에 있으면서 부사단장까지 지냈고 5·16때는 혁명재판소 재판장을 맡았으며 1962년 민정이양매 제대해 대법원행정처장으로 임명됐다.
전씨는 당시의 부장으로 아직도 안면의 입부분이 완전치 않은데 동기생들이 모이면 항상 서두에 『나는 입은 비뚤어졌어도 말은 똑바로 한다』는 우스갯소리를 한다고 들었다.
50년 가을 국군이 한창 북진할 무렵 38선을 돌파하고 어느 부대가 제일 먼저 평양에 입성하느냐를 놓고 경쟁이 벌어졌다.
50년 10윌18일부터 20일까지 계속된 평양공격작전에는 미국의「프랭크 밀번」소장이 지휘하는 미1군단예하의 국군 제1사단(사단장 백선엽준장)과 미제1기병사단(사단장 「호바트 게이」소장) 및 유재오소장이 지휘하는 국군 제2군단예하의 제7사단(사단장 신상철준장)이 참전하고 있었다.
1사단병력은 1만 여명, 미1기병사단은 1만5천명이었고 7사단은 1개 연대 3천명 수준이었다.
당시 이승만대통령은 미1기병사단이 평양에 1착으로 입성한다는 얘기를 듣고 『그건 안돼. 한국군이 해야지』했다.
한편 평양출신인 백선엽 장군은 『내 고향은 내가 찾겠다』고 하면서 미군장성들을 설득하고 다퉈가며 작전명령을 바꾸는데 성공하여 1사단이 평양입성부대로 결정됐다.
그러나 국군 2군단이 경쟁에 끼어 들어 신상철 장군의 1사단도 평양으로 향하게 된 것이다.
결과적으로 보면 동평양은 1사단이 먼저 점령했으나 서평양은 7사단이 먼저 도착했다는 것이 통설이다.
1사단 안에서도 각 연대가 서로 선두 다툼을 벌이고 있을 때 7기생인 11연대 11중대장 김봉건대위(56·초산대령예편)가 11필의 기병대를 이끌고 평양비행장을 점령했다.
이 말은 낙동강전투에서 적으로부터 노획한 것인데 김대위가 학창시절 승마를 했기 때문에 11중대가 말을 관리하며 별도의 기병대를 편성, 운영했었던 것이다.
당시 적의 잔류병력이 비행장에 아직 남아 있을 때여서 일대의 접전 끝인 새벽5시30분 비행장을 완전히 점령하고 무전으로 점령보고를 했다.
이때 7사단 8연대(연대장 김용주 중령 준장예편 유네스코사무총장역임)는 밤을 도와 새벽에 서평양과의 모단봉을 점령했다.
당시는 아군 사단이 서로 어느 위치까지 진격했는지를 몰라 평양 모단봉에서 아군끼리 포격을 한 적도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래서 아직도 어느 사단이 먼저 평양에 입성했느냐는 데 결론이 나지 않은 형편이다.
75년 월남패망 때 추월공사로서 끝까지 대사관을 지키고 있다가 포로가 되어 오랜 고생 끝에 귀국한 7기생 이대용 준장(안국화재보험협회 이사장)은 6·25때 제일 먼저 압록강에 도달한 중대장이었다.
임궁택 장군의 7연대 예하의 이대용 중대(1중대)가 선봉부대로 그곳에 남아 중공군개입으로 후퇴할 때까지 53시간동안 국경경비를 하면서 압록강물을 떠서 경무대로 보내기도 했다. 한 때나마 북방국경을 경비한 유일한 국군부대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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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연구원 전력발전연구부ㆍ군비통제센터를 거쳐 1994년 중앙일보에 입사한 국내 첫 군사전문기자다. 국방부를 출입한 뒤 최장수 국방부 대변인(2010~2016년)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군사안보전문기자 겸 논설위원으로 한반도 군사와 안보문제를 깊게 파헤치는 글을 쓰고 있다.

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