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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07)제79화 육사졸업생들(60)-3기생과「6·25」

6·25가 났을 때 3기생들은 대부분 대위 내지 소령으로 대대장을 맡고 있어 실제 전투에서 크게 활약했다. 53년 휴전될 무렵에는 거의가 대령으로 연대장급들이었다.
초전에서 계속 밀리던 우리 국군에 최초의 승리를 안겨준 충북 음성의「무극리전투」와 두번째의 승전고를 울린 경북상주의「화영장전투」가 모두 3기생의 주도로 치러졌다.
당시 서부전선은 이미 붕괴돼 북괴군이 진주까지 진출, 남해안에 이르렀으나 중·동부 전선에서는 이런 승리로 적의 예봉을 꺾었기 때문에 대구·부산을 사수하여 반격·북진의 교두보가 됐다고 생각된다.
무극리전투의 주인공은 헌 수산청장 김종수소령이었다. 그 전투의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당시 북괴예비사단인 15사단 48연대는 장호원에서 남하하여 7월7일에는 신장리를 거쳐 충주 방면으로 남하하고 있었다.
이때 김소령의 7연대 2대대는 무극∼음성 중간의 644고지에 진을 치고 있었다.
김소령이 산꼭대기에서 사방을 쌍안경으로 관찰하던중 동악국민학교에 적의 연대병력이 집결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적 48연대는 국군이 무극리에서 음성으로 후퇴한 것으로 잘못 판단해 방비 없이 저녁준비를 하고 있었다.
국군이 후퇴할 기미를 보였는지 김재옥이라는 동악국민학교의 여교사가 부대로 찾아와 항의했다. 적이 눈앞에 있는데 왜 싸우지 않고 후퇴하려는가, 우리 국민이 믿는 것은 국군인데 이대로 물러갈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이에 중대장들도 공격을 개시하자고 주장하고 나섰다. 김소령은 상부의 재지시를 받을 시간 여유도 없어 적을 포위, 공격키로 단독 결심하고 7일 하오 5시 정각에 3면 공격을 시작했다.
불의의 기습공격을 받은 적들은 우왕좌왕하면서 대피하기에 바빴고 전투는 어두워질 때까지 계속되었다. 8일 날이 밝자 다시 소탕작전을 개시, 상오8시에는 적연대를 거의 섬멸하는 개가를 올렸다.
당시 전과는 적 8백명 사살, 90명 생포, 각종 차량 60대, 장갑차 3대, 박격포 30문, 기관총 47정, 76mm포 12문, 소총 1천여정을 노획했다.
6·25개전 이래 국군으로서는 최대의 전과를 올렸고 당시 후퇴만을 계속했던 국군에 백배의 사기를 북돋워 주었다.
이때 노획한 무기는 대전에서 시민들에게 전시되었고 각종 무기 1점씩은 유엔본부로 이송하여 소련제 무기의 증거품으로 제출되기도 했다.
이승만대통령이 7연대 전장병에게 1계급 특진의 은전을 내렸고 상금 50만원을 별도로 보냈다. 당시 사단장은 김종오대령, 연대장은 임부택중령(2기·중장) 이었다.
뒤에 들은 얘기지만 전장병이 1개급 특진되자 전쟁중에 어디서 구했는지 흰 페인트 한통을 구해 사병들이 철모에 작대기 하나를 더 그려 넣어 특진된 계급을 표시하느라 법석을 떨었다는 것이다.
당시의 대대장 김종수소령은 사단장을 거쳐 주월군 작전부사령관·3관구사령관·2군단장·2군사령관을 거쳐 중장으로 예편, 오늘에 이르렀다.
그는 60년에『전쟁과 여교사』라는 책을 냈는데 여기서 여교사는 바로 김재옥교사를 말한다. 김교사는 그후 군인과 결혼했는데「고재봉 사건」때 병기대대장으로 있던 남편과 함께 고에게 살해당했다.
참패한 적 15사단은 11일 뒤인 7월18일 화영장전투에서 같은 3기생인 17연대 2대대장인 송호림소령의 공격을 받아 두번째 대패배를 했다.
당시 15사단은 화영장을 돌파, 상주를 점령한 다음 1사단과 합류해 대구로 진격할 계획이었다.
그때 육본 직속이었던 17연대는 진천 방어전에 참가했다가 안동쪽이 위급해 보은을 거쳐 상주 방면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17일 한밤중 상주 산골에서 적 15사단 선봉부대와 국군 17연대가 만나게 되었다.
3기생 이관수소령(59·대령 예편)이 이끄는 1대대와 3대대(대대장 오익경소령)가 선봉부대를 소탕하는 동안 송소령이 이끄는 2대대는 매복하여 적 본대가 오기를 기다렸다.
약1천명의 병력으로 1·5㎞에 달하는 계곡에 매복해 적이 완전히 들어오자 일제히 공격해 2개대대 병력을 섬멸했다.
이때 노획한 무기는 6트럭이었고 사살자는 1천여명이 되었다.
적 15사단은 무극에 이어 두번째 참패를 당해 사단장 박성철소장이 인책됐고 15사단 자체가 아주 없어져버렸다.
패장이 된 박성철은 바로 지금의 북괴정치국원·국가부주석으로70년대 초반의 남북대화때 서울을 다녀간 그 사람이다. 일본 상지대학을 나왔고 올해 72세라고 한다.
승전고를 울린 17연대 2천6백명도 전원 1계급 특진됐다. 대대장 송호림소령은 6·25직후연안에서 육로가 차단되어 포위된 연대병력 1천4백명을 해상으로 고스란히 철수시키는데도 큰 공을 세웠다. 전쟁중 연대장을 세번이나 한「호랑이 장군」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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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연구원 전력발전연구부ㆍ군비통제센터를 거쳐 1994년 중앙일보에 입사한 국내 첫 군사전문기자다. 국방부를 출입한 뒤 최장수 국방부 대변인(2010~2016년)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군사안보전문기자 겸 논설위원으로 한반도 군사와 안보문제를 깊게 파헤치는 글을 쓰고 있다.

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