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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기의 ‘바이오 토크’] 생활 속 장수 열쇠, 과학자들이 꼽은 건 ‘손주 돌보기’

‘할머니의 생신’. 오스트리아 화가인 페르디난트 게오르크 발트뮐러(F. G. Waldmller)의 1856년 작품, 영국 윈저성 소장. 할머니의 손주 돌봄 덕분에 딸은 더 많은 아이를 낳을 수 있다는 것이 ‘할머니 효과(Grandmother Effect)’다.
하루 종일 손자를 보느라 지친 시어머니가 어느 날 꾀를 냈다. 예전 할머니들이 그랬듯이 밥을 입으로 씹어 손자에게 먹인 것이다. 옆에 있던 며느리가 기겁을 하고 아무 말 않고 아이를 데려가더란다. 우스갯소리지만 할머니의 심정이 이해된다. 봐줄 사람이 마땅치 않아 봐주긴 해야 하는데 허리 디스크·우울증이 생기기도 한다니 이거야말로 울며 겨자 먹기다. 최근 과학자들이 내린 결론은 손주를 봐주는 것이 손주와 할머니 모두에게 유익한 최고의 윈윈 전략이란 것이다. 현재의 저출산·고령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묘책이라고도 했다.

<33> 노년의 엔돌핀

단, 적정 시간 돌본다는 전제를 깔았다. 과학자들은 ‘손주 돌봄’이 인간이 다른 동물보다 훨씬 발달된 지능을 갖는 등 진화할 수 있었던 원인이고 미래 인간 장수의 열쇠라고 말한다. 무슨 의미인가?

손주 키우는 조부모, 언어 능력 향상
필자와 가까이 지내는 작가의 숙모 얘기는 놀라웠다. 그는 뇌졸중으로 병원에서 오래 살기 힘들다는 말을 듣고 주변 사람들과 이별 인사까지 나눴다. 그후 손자가 태어났는데 손자를 바라보는 숙모의 눈빛이 조금씩 살아났다. 손자와 같이 지내면서 자주 웃게 되고 건강이 빠르게 호전돼 지금은 10년째 잘 살고 있다. 손자가 할머니의 생명을 살린 ‘최고의 치료제’였던 셈이다.

웃음이 머리 앞부분의 ‘전두엽 피질’ 부위를 자극해 통증 완화 효과가 있는 호르몬인 엔도르핀을 생산한다는 사실은 이미 확인됐다.

2014년 미국 학회지 ‘결혼과 가정’에 보고된 바에 의하면 손주를 돌보는 50∼80세 할머니·할아버지들의 두뇌 중에서 특히 언어 능력이 향상됐다. 종알종알거리는 손주들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언어 관장 두뇌 부분이 활성화된다는 얘기다. 치매의 첫 번째 원인이 뇌를 쓰지 않거나 신체활동이 적은 것이다. 다시 말해 활발한 두뇌 활동은 최고의 ‘치매 예방약’이다. 실제로 1년 이상 손주를 봐준 미국 할머니의 40%, 유럽 할머니의 50% 이상이 치매 예방 효과를 얻었다. 특히 상황을 파악하는 인지능력이 개선됐고, 운동량이 늘어 근육량도 많아졌다. 이는 비단 피가 섞인 손주를 돌본 노인에게만 해당되는 얘기가 아니다. 재잘거리는 초등학생들을 돌봤던 노인들에게도 나타난 현상이다.

아이들이 할머니의 ‘보약’이라면 거꾸로 할머니는 아이의 ‘수호천사’다. 미국 심리과학경향지(2011년)에 따르면 할머니와 같이 지내는 손주들의 15세까지 생존율이 57%나 높았다(할머니와 함께 지내지 않는 아이 대비). 이는 단순히 같이 놀아주는 것이 아니고 위험한 상황에서 아이를 지켜주는 ‘지킴이’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소중한 사이, 할아버지와 손자’. 그리스 화가 게오르기오스 야코비데스(Georgios Jakobides)의 1890년 작품. 할아버지와 손주는 특별한 관계를 맺는다.
또 할머니와 같이 지낸 아이의 발달도가 높다는 연구 결과도 나왔다. 이는 아이들의 인성 발달에 할머니의 역할이 큼을 보여준다.

할머니가 손주가 먹고 자는 것을 주로 돌본다면, 할아버지는 손주의 정신 발달을 돕는다.

『백치 아다다』로 유명한 소설가 계용묵은 그의 단편 ‘묘예(苗裔)’에서 “손자, 그것은 인생의 봄싹이다. 그것을 가꾸어 내는 일은 좀 더 뜻있는 일인지 모른다”고 썼다. 아이가 어릴 때는 주로 할머니들이 먹이고 재우고 업고 다닌다. 아이들이 더 커서 유치원생이나 초등학생이 되면 할아버지의 역할이 상당히 중요해진다. 유럽 할아버지 두 명 중 한 명은 손주들과 놀아준다. 이들은 손주들에게 집안의 내력이나 과학 얘기, 그리고 세상 돌아가는 이치 등을 전한다. 특히 아이와 뭔가를 함께 만드는 활동엔 할아버지의 역할이 더 크다. 이는 할머니와는 다른 차원의 두뇌활동을 돕는다. 이문구의 성장소설 ‘관촌수필(冠村隨筆)’에서도 할아버지는 아이의 두뇌에 깊숙이 자리 잡는다. 소설에서 아이 아버지는 하루도 집에 있지 않고 외부로 돌아다닌다. 행여 아이와 함께 있는 날에도 가까이 다가가기 힘든 대상이었다. 아버지가 바쁘긴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요즘은 엄마마저도 바쁘다. 직장에서 살아남아야 하고 친구들과 사회활동을 해야 한다. 아이들을 살갑게 대하기엔 우선 부모들에게 시간이 너무 부족하다.

반면에 할아버지·할머니는 할 일은 적고 시간은 많다. 인생의 노하우도 쌓여 있다. 게다가 2대인 손주들에겐 1대인 자식들에게 느끼는 책임감과 압박감이 적어 한결 여유롭게 대할 수 있다. 조부모와 손주, 이런 2대가 잘만 지낼 수 있다면 더없이 좋은 궁합이다. 과학자들은 이런 궁합을 인간이 진화하고 장수하는 원인으로 꼽는다.

딸이 낳은 아이 돌보는 과정에서 인류 진화
침팬지는 인간처럼 45세께 폐경을 한다. 폐경 이후에도 생존하는 침팬지는 3%도 안 된다. 반면에 인간은 동물 중 거의 유일하게 폐경 이후에도 25∼30년을 더 산다. 도대체 무엇이 침팬지와는 달리 사람을 ‘만물의 영장’으로 만들었을까? 또 침팬지보다 30년을 더 살게 했을까? 그 답엔 ‘할머니’가 있다.

이른바 ‘할머니 효과(Grandmother Effect)’란 학설의 주 내용은 이렇다. 인류가 진화하던 어떤 시점에 폐경 이후에도 건강하게 활동하는 ‘어떤 여성’이 우연히 나타났다. 비록 이 여성이 폐경 이후에 새 자녀를 출산하진 못했지만 자기 딸이 낳은 아이, 즉 손주를 먹이고 돌보게 돼 딸이 더 많은 아이를 가질 수 있었다. 이 ‘여성’의 유전자가 인간의 번식과 진화에 유리해 인간이 침팬지보다 장수하게 됐다는 학설이다.

인간 진화를 설명하는 다른 학설로 ‘사냥설’도 있다. 인간이 사냥을 잘하려면 머리를 써야 하므로 두뇌가 커졌고 이것이 인간 진화의 원인이란 설이다. 하지만 아프리카 부시맨들을 관찰하면 ‘사냥설’보다는 ‘할머니 효과설’이 더 설득력이 있다. 아프리카 부시맨들은 지금도 사냥하고 나무 열매를 먹고 산다. 다시 말해 이들은 야생 침팬지나 야생 원숭이처럼 ‘수렵시대’에 살고 있는 인류의 원형이다. 이 부족에서 나이 든 여성인 할머니들은 젖 뗀 손주들에게 열매를 따 주거나 식물 뿌리를 캐 먹이는 ‘손주 돌봄’을 한다. 부시맨 여성들은 다른 현대 여성들처럼 폐경 이후에도 전체 수명의 3분의 1을 산다. 여성들이 폐경 이후에도 오래 살아서 장수하게 된 시기는 ‘수렵시대’ 이전이므로 ‘사냥설’엔 허점이 있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2012년 미국 유타대 호크스(K. Hawkes) 교수는 ‘할머니 효과’를 컴퓨터 계산으로 증명해 냈다. 하지만 이 어려운 연구논문보다 시골집의 풍경이 할머니가 인간의 장수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더 여실히 보여준다. 3대가 모여 사는 집에서 손주들을 돌보는 일은 대개 할머니 차지다. 할머니들이 바쁜 엄마를 대신해 아이들을 돌보기 때문에 엄마는 부담 없이 아이를 쑥쑥 낳는다. 할머니들은 손주 보느라 부지런히 몸을 움직여 팔순이 돼도 근력이 유지된다. 게다가 한두 녀석을 옆에 끼고 잠이 들면 ‘노년의 외로움’이란 단어는 멀리 사라진다. 이런 이유로 복작복작한 3대 시골집은 어느새 장수촌이 된다.

필자의 한 대학 선배는 적어도 자손 번성엔 성공한 모델이다. 딸·아들이 각각 3명·2명의 아이를 낳았다. 부부 한 쌍이 평균 1.19명을 겨우 낳는 지금의 한국의 출산 통계와 비교하면 두 배 이상의 ‘생산성’을 보인 셈이다. 이 배후엔 선배 부부의 적극적인 ‘손주 돌봄 작전’이 있었다. 선배는 딸이 결혼 후 직장을 잡고 임신하자 딸 집을 바로 친정 집과 합쳤다. 태어난 손주는 친정 엄마와 시댁 부모, 그리고 아이 부모가 각각 분담해 돌봤다. 때마침 정년을 맞은 선배도 손주를 싣고 옮기는 운전사 역할을 톡톡히 해 아이 보는 부담을 나눴다.

이 집에선 ‘손주가 올 때 반갑고 갈 때 더 반갑다’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손주가 떠나 있을 때는 얼굴이 어른거려 얼른 데려오고 싶다고 할 만큼 선배 부부에겐 큰 즐거움이 손주였다. 이런 도움 덕에 선배의 딸은 소녀 적 꿈대로 세 명의 아이를 쉽게 가질 수 있었다. 장가 든 아들도 같은 전략을 썼다. 이번엔 아들 집을 선배 집 근처에 구한 뒤 아들·딸의 손주들을 함께 보기 시작했다. 손주 보는 방식은 역시 분담이었다.

탈무드 “노인은 집에 부담, 할머니는 보배”
노동의 분담이 ‘손주 돌봄’의 핵심이다. 할머니 혼자 돌보는 시간이 길어지면 오히려 마이너스 효과가 나타날 수 있다. 손주 돌봄에도 최적의 시간이 있어서다. 너무 길어지면 할머니는 피곤해지고 힘들어하며 우울해진다. 결국 며느리 앞에서 손주에게 밥을 씹어 먹이는 등 다른 꾀를 낸다. 식탁 행주로 아이 입을 무심코 닦아주거나 사투리가 섞인 영어를 가르치는 ‘묘안’을 실행한다. 이런 방법으로라도 손주 돌봄의 긴 중노동에서 벗어나고 싶어 한다. 손주 돌봄의 최적 시간은 각각 처한 상황에 따라 다르다. 미리 보육시간, 보상 금액, 육아 방향 등에 대한 합의가 이뤄져야 손주 돌봄이 서로의 고통이 아닌 쌍방의 윈윈이 된다.

할머니나 할아버지가 여러 손주를 동시에 봐주면 아이들의 사회 적응력이 높아진다는 이론도 솔깃하다. 지난해 미국 진화인류학회지에 보고된 바에 의하면 어린 손주 여러 명을 동시에 볼 경우 아이들은 자신들의 ‘모든 것’을 쥐고 있는 사람에게 잘 보이려고 눈을 계속 맞춘다. 조부모와 좋은 관계를 맺으려고 노력해 사회성이 좋아진다는 것이다.

필자의 어린 시절에도 6남1녀 사이에선 눈에 보이지 않는 경쟁이 치열했다. 형제들과 잘 지냈을 때 부모님으로부터 상으로 과자를 받은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셋째 딸은 선도 안 보고 데려간다’는 옛말은 셋째 딸의 사회성이 높다는 의미로 읽힌다. ‘부잣집 외동딸’을 며느리로 쉽게 맞지 못하는 것은 사회성이 떨어질 것으로 우려해서다. 아이들은 여럿이 커야 사회성이 높아진다.

“노인이 집에 있는 것은 큰 부담이다. 하지만 할머니가 집에 있는 것은 보배다.” 유대인의 철학과 지혜를 담은 책인 『탈무드』에 소개된 내용이다. 이 말 속엔 요즘 우리나라의 최대 현안인 저출산·고령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열쇠가 있다. 열쇠는 출산 장려, 보육 지원 등 두 가지다. 이를 동시에 해결할 방법으로 ‘할머니’가 있다.

저출산 문제로 한국과 동병상련(同病相憐)의 고민을 안고 있는 싱가포르는 손주를 돌보는 할머니에게 연 250만원을 지원한다. 우리나라도 일부 구청만이 아닌 전국적으로 지원을 확대해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손주 돌봄을 적극 도울 필요가 있다. 이는 국내 출산율을 높이는 데 큰 기여를 할 것으로 필자는 믿는다. 현재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최저 출산 국가이고, 최고로 빨리 늙어가는 나라다.



김은기 서울대 화공과 졸업. 미국 조지아텍 공학박사. 한국생물공학회장 역임. 피부소재 국가연구실장(NRL) 역임. 인하대 바이오융합연구소(www.biocnc.com)와 한국과학창의재단에서 바이오 테크놀로지(BT)를 대중에게 알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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