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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노버에서 온 음악 편지] 마음에 살짝 기름칠해 주는 크라우스

동유럽 혈통의 영국 피아니스트 릴리 크라우스(1908~86). 시몬 골드베르크와의 모차르트 바이올린 소나타 연주로 세계적 명성을 얻었다.
릴리 크라우스의 ‘미친’ 연주에 빠져 나처럼 허우적대는 사람들에게는 그녀가 바이올리니스트 시몬 골드베르크와 함께 작업한 모차르트의 바이올린 소나타 음반을 추천한다. 1930년대부터 유럽 투어를 함께한 이 커플이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 만든 모차르트와 베토벤의 바이올린 소나타 음반은 LP 특유의 음질의 한계가 싫은 사람들에게는 아쉬울 수도 있다. 그래도 연주만큼은 다시 없을 세기의 명작이다. 내가 특별히 손꼽는 소나타는 두 악장짜리인 k379, G장조다.

내 곁의 음악 ②

2악장의 중간 부분까지는 조금 평이한 연주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느닷없는 마술이 펼쳐지는 것은 단조 변주 부분. 갑자기 다른 목소리를 내는 크라우스의 피아노와 이에 그대로 화답하는 골드베르크의 바이올린. 이어지는 아다지오 변주의 단아하면서도 기품 있고, 또 순수하고도 청초한 이런 음악성. 요새는 참 찾기가 힘들다. 2014년의 우리에겐 아무래도 단단히 빗어 넘겨 한 올도 흘러내리지 않을 듯한 올백 머리 스타일 같은 바이올리니스트들이나 마늘·양파·생강·고추를 아낌없이 털어넣은 해물찜처럼 자극적인 피아니스트들이 더 익숙한 게 사실이라.

그러고 보면 피아니스트가 아닌 인간 손열음의 음악 취향은 꽤나 담백한 것도 같다. 누군가 나에게 제일 사랑하는 노래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단연 슈베르트의 가곡 ‘봄에’를 꼽겠다. A-B-A 형식의 지극히 단순한 이 곡. 가사가 되어주는 에른스트 슐체의 시는 대략 이렇다.

“조용히 나는 언덕 비탈에 앉았지. 하늘이 정말 맑아. 산들바람은 초록빛 골짜기로 불어. 내가 처음 봄의 첫 번째 햇살을 받은 그곳, 아, 나는 정말 행복했지.” 가곡이라는 것은 당연히 가사를 모르고 듣는 것과 알고 듣는 것이 천양지차다. 하지만 난 슈베르트의 가곡들이라면 가사를 모르고 듣는 것도 죽을 죄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종종 대단치 않은 시들마저 천상의 음악으로 바꾸어 놓은 것이 슈베르트니까.

이 곡의 가사 역시 더 궁금하지 않다면 찾아보지 않아도 좋다. 단지 나의 아쉬움은 이 곡 연주의 이상향을 아직 못 찾았다는 데 있다. 남자보다는 여자가 부르는 것을 더 좋아해서 주로 소프라노의 음반을 찾곤 하는데, 리사 델라 카사는 엄청나게 예쁘지만 좀 달착지근해서 자주 듣게 되지는 않고, 엘리 아멜링의 노래가 황홀하기는 한데 외르크 데무스가 피아노가 아닌 포르테피아노를 연주하는 것이 조금 아쉽고, 귀에 대고 속삭이는 듯한 피아노가 황홀한 에드빈 피셔를 듣자니 엘리자베트 슈바르츠코프는 별로 좋아하는 성악가가 아니라…. 언젠가는 이 곡의 이상향을 만나는 순간이 올까. 하긴 그랬다 심장마비라도 걸리면 어쩌나 좀 걱정도 된다.

물론 나도 이런 음악 말고 좀 더 느끼한 음악을 찾을 때가 있다. 우울할 땐 아예 슬픈 영화를 보면서 펑펑 울고 싶은 심리가 있다던데 나는 그런 심리로 영화 대신 음악을 찾는다. 심지어 그럴 때 듣는 음악들을 컴퓨터 속 폴더 하나에 모두 모아 놓기까지 했다.

그 목록을 살짝 공개해보자면… 라흐마니노프의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모음곡 제1번 g단조 작품번호 5 중의 첫 번째 악장 ‘뱃노래’, 브람스의 바이올린 소나타 제2번 A장조 작품번호 100의 2악장, 그리그의 바이올린 소나타 제3번 c단조 작품번호 45의 2악장, 보로딘의 현악 사중주 제2번 중 3악장 ‘노투르노’, 브루흐의 ‘스코틀랜드 환상곡’, 드뷔시의 ‘렌토보다 느리게’, 쇼팽의 유작 왈츠(제18번) E플랫장조 등. 내가 정한 이 폴더의 이름은 ‘Schmaltzy(몹시 감상적인)’다. 물론 이 단어의 부정적 뉘앙스는 모두 무시한 처사다. 단지 이 음악들이 내 마음에 살짝 ‘기름칠’을 해준다는 뜻으로 사용할 뿐.

류보프 브룩과 마크 타이마노프 부부가 연주하는 라흐마니노프의 모음곡 1번은 아무래도 아침보다는 밤의 음악이지 싶다. 제1피아노의 선율을 받쳐주는 제2피아노의 빠른 페시지워크는 까만 밤하늘에 수십 개의 별들이 흩뿌려지는 광경 같다. 눈이 저절로 감기는 진풍경.

브람스의 바이올린 소나타 2번은 ‘사랑스럽게’라고 지시한 1악장만 해도 브람스 특유의 고고함이 살아 있다. 느린 2악장의 시작 부분까지도 그런 것만 같다. 하지만 곧이어 등장하는 비바체 부분부터는 완전히 한 편의 멜로드라마다. 바이올린과 피아노가 서로 대화하는 것 같기도, 맞잡고 춤을 추는 것 같기도 한 이 음악은 클라이맥스를 맞이하는 대신 아까의 느린 시작 부분으로 돌아가며 한 발짝 물러선다. 이대로 끝인가 싶던 음악이 또 한번 비바체 부분으로 돌아와 더욱 애틋한 바이올린과 피아노의 ‘밀당’을 이어간다. 한 악장 속에서 두 악장이 서로 밀고 당기던 이 음악은 결국엔 해피엔딩을 맞이한다.

그러고 보니 이 폴더의 다른 음악들도 다소 비슷하다. 게르하르트 타슈너가 연주하는 그리그 소나타 2악장은 이게 클래식 음악이 맞기는 한가 싶을 정도로 감정에 호소한다. 아득한 전설을 반추하는 듯한 에디트 파르나디의 피아노를 뒤로하고 타슈너가 똑같은 노래를 너무나도 담담하게 시작하는 그 순간부터 이건 더 이상 남 얘기가 아닌 지금 이 순간 나의, 최루탄이다.

보로딘 현악 사중주단이 연주하는 ‘노투르노’는 아예 첼로의 첫 음부터 배길 장사가 없다. 그런데 결국은 ‘잘은 몰라도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을 걸?’ 하며 끝이 난다. 그 스토리를 다 듣고 나면 마치 동화책을 읽은 어린 아이처럼 마음이 말랑말랑해지는 것이다. 눈가가 촉촉히 젖을 때도 있다. 그런데 이게 흔히들 말하는 음악이 주는 ‘감동’ 같은, 형이상학적인 그런 무엇인가? 그보다는 훨씬 더 원초적인 그 무엇 같은데. 그것이 뭐든 사실 아무 상관도 없다. 어쨌든 지치고 다친 마음을 완전히 무장해제시켜 버리는 음악의 마력임은 틀림없으니까.


손열음 피아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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