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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3604) 제79화 육사졸업생들(57) 3기생

장교로 임관되어 일선 소대장에서 출발, 중대장·대대장등 군의 정통코스를 제대로 밟아 올라간 육사졸업생들은 3기부터가 아닌가 생각된다. 군영과 l.2기만 해도 틀이 제대로 잡히기 전이어서 초급지휘관을 잠깐씩 거쳤기 때문이다.
3기는 47년11월13일 입교하여 95일간의 과정을 마치고 4월19일 임관됐는데 이때는 좌익이 테러전술을 시작한 때이기도 하다.
46년10월16일엔 경무부장 조병옥 11월13일엔 경무총감 장택상등 우익의 실권자들이 잇달아 피격을 당했고 47년3·1절에는 전국 각지에서 좌·우익 시위군중이 충돌하는 불상사까지 일어났다.
그런 와중에서 3기생들은 각 연대에서 추천해온 5백여명 가운데 3백38명이 합격·임교하여 그중 2백96명이 임관됐다.
3기엔 특별반, 이른바 「특3」 이 있다. 장교경력이 있는 사람들을 따로 교육시키기 위한것으로 박시창(황포5기·중국군대령) ,최덕신 (황포10기·중국군소령), 그리고 5·16후 수도경비사령관을 지낸 김진장장군(소장)등이 「특3」 들이다.
이들은 일반3기보다 교육기간이 짧았고 임관계급도 높았다. 그러나 오늘날엔 일반·특별의 구별없이 그냥「3기」 로 통칭되고 있다.
3기중에는 장군이 60명 가까이 나왔다. 최고계급으로는 육군참모총장·합참의장·국방장관을 지낸 노재현(한국종합화학사장), 3군사령관을 역임한 박희동(남해화학사장), 1군사령관을 한 최세인등의 대장이 있다.
그밖에도 6·25때 전공이많은 송호림중장을 비롯하여 전서울시장 김현옥준장, 내무장관을 지낸 양찬우소장, 남북적십자회담사무총장을 지낸 장우주소장 (한라건설사장), 5·16때 혁재재판장을 지낸 최영규소장등은 사회에 나와서도 활동이 컸던 3기생들이다.
이들이 입교당시는 이치업대위가 교장대리로 있다가 47년1월23일 정일권소령이 3대교장으로 부임했다.
그밑에 참모장및 재정부장에 이영순소령, 생도대장에 오일균대위, 교수부장에 조병건대위,연구부장에 최경록대위, 행정부장에 고시복소위, 보급부장에 엄핫섭소위, 교도대장에 김기임중위등이 있었다.
구대장들이 갓 임관한 2기생들이어서 팔팔한 젊은 기분에 기합이 든 훈련을 시켰다.
사관학교의 일과는 아침6시 점호부터 시작되는데 당시는 겨울이었기 때문에 6시라도 캄캄한 밤이나 같았다.
어둠을 뚫고 약 1km넘는 태능역주변 냇가로 나가 얼음을 깨고 세수를 한뒤 내무반및 교실에 땔 장작을 태릉역에서 날라왔다. 낮에는 정규교과과정과 훈련을 받았는데 특히 구보를 많이 시켰다. 저녁에는 비상소집이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고 있었다.
당시 학교교육시설이 미흡한데다 급식도 나빠 어려웠던 점이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식사는 밀가루 수제비인 경우가 많았고 그나마 양이 부족해 후보생들이 항상 배를 곯았다.
너무 배가 고파 한번은 후보생하나가 식사당번때 하루분 쌀을 몽땅 털어 한끼에 다 해먹어 버려 전체기합을 받은 일까지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2기생때부터 숙소와 교실 마루의 광을 내기 위해 맥주병을 사용했는데 3기생때도 계속되어 후보생마다 병1개씩은 다 가지고 있었다. 마루를 문지릍 때는 주로 독립군가와 3기생가를 합참하여 그 율동에 맞춰 작업을 했다. 당시만해도 특정된 교가나 군가가 없었기 때문이다.
사관학교교육중 후보생들에게 가장인기있었던것은 행군과 숙영이었다. 막사에 갇혀 생활하는 청년들의 당연한 욕구였다.
3기생들은 사관학교에서 이대까지의 왕복행군을 했다. 행렬이 도착할때 여대생들이 마중나와 박수로 맞아주었다.
생도들은 이대생들 앞에서 제식훈련 시범을 보이고 그들로부터 점심대접과 위문공연을 받기도 했는데 이것은 새로 부임한 정일권교장의 아이디어였다. 3기생들은 아직도 그때의 기분을 후일담으로 즐기고 있을 정도다.
당시는 일반사회의 상황에 못지않게 군내에서도 좌익들의 준동이 심했다. 3기생을 가르치고있던 오일균과 조병건은 모두 나의 일본육사 후배인데 좌익에 물들어 3기생들을 세뇌시키고 있었다.
그래서 3기생들은 제주도 폭동이나 여순사건에 많이 관련되게 됐고 그때문에 후에 있은 순군때에 피해가 컸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당시 군내 좌익계 숙청작업을 해낸 김창용이나 반란을 진압한 유공자들이 또한 3기생들이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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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연구원 전력발전연구부ㆍ군비통제센터를 거쳐 1994년 중앙일보에 입사한 국내 첫 군사전문기자다. 국방부를 출입한 뒤 최장수 국방부 대변인(2010~2016년)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군사안보전문기자 겸 논설위원으로 한반도 군사와 안보문제를 깊게 파헤치는 글을 쓰고 있다.

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