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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선희의 시시각각] '먼저 사과하면 지는 거다'

양선희
논설위원
한 선배의 어린 시절 회고담이다. 당시 동네 사내아이들은 땅바닥에 금을 그어 링을 만들고, 그 안에서 치고 받았단다. 이유는 없었다. 그러나 싸움은 실전이었다. 룰(rule)은 하나. ‘먼저 울면 진다’는 것. 그래서 아무리 맞고 터져도 이를 악물고 참았단다. 사람들은 이렇게 룰이 비합리적이라도 룰이라는 이유만으로 지키려고 애쓴다.



 요즘 ‘높은 분’들을 보면서 이처럼 보통사람과는 다른 그들만의 룰이 있는 건 아닌지 의문이 들었다. ‘먼저 사과하면 진다’는 룰. 그렇지 않고서야 본인 때문에 나라가 발칵 뒤집어져도 어찌 이리 사과에 인색한지 설명이 안 될 지경이다.



 자신에게 땅콩을 봉지째 건넨 죄를 물어 사무장을 내쫓느라 비행기를 돌린 일로 글로벌하게 나라 망신을 시킨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 그가 여론에 밀려 한 사과는 역효과를 냈다. 원래 사과의 기본 요소는 타이밍과 진정성이다. 이 둘이 결여되면 ‘무늬만 사과’라는 논란의 불씨를 남긴다. 그의 사과가 그랬다. 심지어 사과의 매너는 생뚱맞았다. 기자들의 다그침에 피해자에게 직접 사과를 약속한 뒤 사무장 집에 갔다가 사람이 없어 문틈으로 사과 쪽지를 넣고 왔단다. 한데 보통 사람들은 남의 집을 방문할 때 먼저 그쪽 사정을 물어보고 간다. 그게 기본 예의다. 하물며 사과하러 가면서 다짜고짜 찾아가다니. ‘옛다 사과’도 아니고….



 직원들에 대한 막말 논란이 불거진 박현정 서울시향 대표도 못지않다. 직원들의 인권유린 탄원에서 비롯된 서울시향 사태는 박 대표가 시향의 방만 경영과 정명훈 예술감독의 전횡 의혹을 폭로하면서 논점이 산지사방으로 번졌다. 시민 세금으로 운영되는 단체의 방만함은 반드시 시정돼야 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게 사실이라도 박 대표의 행위가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녹취 파일을 통해 본 그의 막말은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마저 짓밟는 수준이었다. 그는 부조리한 조직을 고발한다는 ‘정의감’에 도취돼 이런 막말쯤은 괜찮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독일의 나치도 정의를 앞세워 인명을 짓밟았다. 이런 역사를 통해 우리는 정의감보다 인권과 생명에 대한 존중이 더 높은 가치라는 걸 알게 됐다. 박 대표가 직원들에게 사과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으면 좋겠다.



 요즘 정국의 블랙홀이 된 청와대 정윤회 의혹 문건유출사건에서도 윗분들의 사과 결핍은 상당한 위화감으로 다가온다. 문건에 지목된 정윤회씨. 그는 검찰에 출두해 ‘불장난’을 운운했다. 이런 경우 보통사람들은 수사학으로라도 자신으로 인해 불거진 불미스러운 소문에 대해 미안함을 먼저 표하고 변명을 한다. 한데 ‘불장난’ 같은 말로 위협하니, 보는 사람들은 ‘무협지’에나 나올 법한 강호의 권력투쟁에 대한 상상을 멈출 수 없게 된다.



 실은 이번은 박근혜 대통령이 먼저 사과했어야 하는 사안이다. 의혹이 야당이나 외부 세력의 공격에서 비롯된 것도 아니고, 대통령이 고용했던 청와대 내부의 비서들 간에 벌어진 자중지란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이런 일이 일어나면 리더는 마땅히 먼저 사과하고 내부 기강을 다스리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게 일반인의 상식이다. “이런 일에 흔들리다니 부끄럽다”며 국민을 탓할 일은 아니라는 말이다. 만일 대통령이 선제적으로 사과하고 적절하게 대응했다면 이렇게 논란이 나라를 집어삼킬 지경에 이르렀을까.



 사람은 누구나 불완전하기에 잘못을 저지른다. 사과의 미덕은 잘못을 넘어 앞으로 나갈 길을 열어준다는 것이다. 잘잘못을 따지고 복기하느라 과거에 매달려 있을 것인지, 잘못한 과거를 털고 미래로 나갈 것인지의 기로에 ‘사과’가 있다. 이렇게 좋은 ‘사과’를 왜 그리 홀대할까. 정말 ‘사과하면 진다’는 룰이라도 있는 것일까. 한데 관련 분야 학자들의 책을 뒤지다 보니 이런 말이 나왔다. “사과는 리더의 언어이며, 존경과 신뢰를 받기 위해 갖춰야 할 덕목이다.”(김호·정재승 『쿨하게 사과하라』, 어크로스)



양선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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