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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인택의 미시 세계사] 십상시는 사라지지 않는다

『삼국지연의』에서나 봤던 ‘십상시(十常侍)’라는 단어가 21세기 한국에서 새삼 화제다. 시각은 다양하겠지만 진실은 하나다. 국정은 공식 집단에 의해 체계적으로 수행돼야지 지도자와의 개인적 인연과 친분이 바탕인 비선이 움직여선 안 된다는 점이다. 역사는 비선 발호를 국정 문란의 신호탄이라고 가르친다. 민주체제나 왕조체제나 마찬가지다. 왕조시대의 대표적인 비선으로 외척과 함께 환관이 있다. 동아시아에서 환관은 원래 공직자가 아니라 군주의 개인 노예였다. 그러던 것이 군주의 총애를 바탕으로 국정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중국 후한 말기에 발호했던 십상시는 그 상징의 하나다.

후한 중기 10세에 즉위한 화제가 외척 간섭에서 벗어나려고 환관을 활용한 것이 국정 개입의 빌미를 줬다. 그 후손인 환제 시절 관료·선비들이 청류당(淸流黨)을 만들어 환관 세력에 저항했다. 환제의 후임인 영제 시절 환관들은 청류당을 공격해 ‘1, 2차 당고의 옥’이라는 사화를 일으켰다. 유교국가의 근본이 황제의 문고리 권력을 장악한 환관들에 의해 무너졌다.

바로 이 영제 시절 정권을 주무른 10여 명의 환관이 십상시다. 영제는 우두머리인 장양을 아버지로, 조충을 어머니로 불렀다. 이들은 영제 사후 불안해하다 외척인 하진을 암살했지만 그의 부하인 원소·조조의 반격을 받았다. 십상시는 어린 황제인 소제를 인질로 삼아 저항했다. 권력을 잃으면 곧 죽음이라는 권력 잔혹사를 잘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 와중에 2000명 가까운 환관이 학살당했다. 삼국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십상시의 난’이다.

하지만 중국의 후대 왕조는 별로 배운 게 없어 보인다. 특히 명나라는 세 명의 환관에 의해 무너졌다는 소리까지 듣는다.

왕진(?~1449)은 1449년 영종을 부추겨 북방 오이라트 부족에 대한 원정에 나서게 했다. 군사를 잘 모르는 왕진은 장군들을 무시하고 직접 작전 지시를 내렸다. 그 결과 원정군은 토목보에서 대패하고 황제는 포로로 잡혔다. 이른바 ‘토목의 변’이다. 왕진은 이 와중에 분노한 장군의 철퇴를 맞아 숨졌다고 전해진다. 7년 뒤 복위한 황제는 왕진의 사당을 세워 추모했다. 황실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다.

환관의 발호 뒤에는 반드시 어리석은 군주가 있었다. 온 백성이 알고 역사가 아는 일을 황제만 몰랐던 셈이다. 나라나 백성의 운명보다 자신의 편리와 권력을 우선시한 무능 군주의 특징이다.

유근(1451~1510)은 궁녀 공급으로 무종 정덕제의 총애를 받으면서 뇌물을 받고 인사에 개입했다. 7명의 수하와 함께 팔호(八虎)로 불린 비선조직을 만들어 국정을 농단했다. 숙청 위기에 처하자 제위 찬탈을 시도하다 체포돼 능지처사됐다. 유근의 재산을 몰수했더니 황금 250만 냥, 은 5000만 냥 등 10년치 세입에 해당했다고 한다.

명 말기 희종 천계제 시절 위충현(1569~1627)이 다시 국정을 농단했다. 그는 자신을 구천세로 부르게 했다. 만세는 황제만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살아 있는 자신의 동상과 사당을 세우기도 했다. 마지막 황제 숭정제가 즉위하면서 좌천되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명나라도 곧 무너졌다. ‘국가의 자살’이다.

권력이 좋은 말만 하는 비공식 조직에 의존해 잘된 경우는 아직 찾지 못했다. 문제는 일부 ‘탁한’ 선비의 결탁이다. 심지어 어떤 선비는 연하의 환관을 아버지로 모시겠다며 “나이보다 효성이 중요하다”는 허언을 남겼다. 이런 도도한 탁류가 흐르는 세태에선 십상시가 사라질 수 없다.


채인택 중앙일보 논설위원 ciimccp@joongang.co.kr

포함의 아픔을 아직도 그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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