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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 Sunday] 허생이 ‘땅콩 회항’을 봤다면 …

최근 모바일과 인터넷에선 2014년판 신작 『허생전(許生傳)』이 인기다. 조선시대가 아닌 요즘 상황에 맞춘 인물 설정이 특징. 2014년판의 허생은 서울 노량진의 조그만 원룸에 사는 ‘고시 낭인’이다. 최신판 허생전은 원작의 이야기 흐름을 따라간다. 생활고에 힘겨워하는 여자 친구의 불평을 이기지 못해 공부를 접고 나가는 게 그 시작이다.

허름한 후드티와 야상 차림으로 면접 보듯 대기업 회장을 만나 1조원을 구하고, 그 돈을 종잣돈으로 태양광과 2차 전지, 반기문 테마주 등을 매집해 돈을 번다(원작의 허생은 과일과 말총을 매점매석해 돈을 불린다).

신랄한 현실 비판도 빠지지 않는다. 연암 박지원이 원작에서 당시 양반들의 허례허식과 보수성을 강하게 비난한 것과 마찬가지다. 2014년판에서 화살은 재계와 정치권으로 향한다. 대기업에 대해 “주는 만큼 부려먹고, 연줄이 없으면 살아남기 힘드니 돈도 ‘백’도 없는 사람은 금방 밀려나기 마련”이란다. 정치권도 나을 바 없다. “소득 4만 달러 시대를 만든다면서 무상보육은커녕 무상급식 하나를 아끼고 대기업과 땅부자들의 앙앙불락이 두려워 직접세 인상은커녕 애먼 간접세나 들먹인다”고 꼬집었다.

소설을 다 읽은 다음엔 마냥 웃을 수 없는 씁쓸함이 남았다. 요새 말로 ‘웃프다(웃긴데 슬프다)’랄까. 원래 소설이나 풍자는 현실에 기반한다.

2014년판 허생전에선 연줄 없이 사회생활을 하는 이들의 고단함이나, 취업준비생들의 애환이 묻어난다. 사회적 약자 중 하나인 ‘고시 낭인’을 내세워 나보란 듯 돈을 버는 장면은 이들의 고단한 삶을 달래는 작은 위로다.

2014년판 허생전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퍼져나갈 무렵 ‘땅콩 회항’ 논란이 불거져 나왔다. 재계 일부에선 ‘엉뚱한 일로 반(反)기업, 반(反)재벌 정서가 확산되는 것 아닌가’ 하고 걱정하는 이들도 있는 모양이다. 정서라는 건 여러 사람이 비슷하게 느낄 수 있는 일들이 반복해 벌어질 때 생기는 거다. 서민들은 점점 더 팍팍한 삶을 살아가는데 기업 오너 일가는 일반인들의 인식과는 괴리가 큰 그들만의 사고방식으로 살고 있다는 게 이번 땅콩 회항의 가장 큰 원인이다. 그리고 이번 일 이전에도 비슷한 사건들이 반복해 일어났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라는 게 별건가. 선심 쓰듯 연말에 몇백억원씩 기부하는 것보다, 차라리 평소에 일반인들을 이해하려 하고 조금 더 노력하는 게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시작이다. 2014년판 허생이 공감을 얻었던 건 그가 보통 사람들의 시선으로 스타트업 창업자를 돕고, 일하기 좋은 기업을 일궜기 때문이다. 반기업정서의 시작은 ‘돈 많은 이들에 대한 부러움이나 반감’이 아니다. 오히려 ‘난 돈이 많으니까’라고 생각하는 일부 기득권자의 유별난 처신이 더 문제다. 허생이 봤다면 엄하게 꾸짖었을 일이다.


이수기 경제부문 기자 retalia@joongang.co.kr

포함의 아픔을 아직도 그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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