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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도면밀 조사로 ‘호랑이 사냥꾼’ 명성 … 시진핑의 오른팔

왕치산(王岐山) 중국 공산당 중앙기율검사위원회 서기가 올 초 한 회의에 참석해 발언하고 있다. [중앙포토]
중국에선 황제가 하사한 검을 상방보검(尙方寶劍)이라 불렀다. 이 검을 하사받은 장수나 신하에겐 선참후주(先斬後奏)란 막강한 권한이 주어졌다. 누구든 명령을 거역하는 자는 황제에게 미리 고하지 않고 이 검으로 처형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오래전 국내에서 인기를 모은 드라마 ‘판관 포청천’에서 포청천이 갖고 다니던 칼이 바로 상방보검이다.

저우융캉 사법처리 주역, 왕치산 중앙기율위 서기

송나라 때 부패 관리들을 벌벌 떨게 했던 포청천처럼 지금 이 시각 중국에도 상방보검을 손에 쥔 실력자가 있다. 중국 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 왕치산(王岐山)이다. 왕치산의 상방보검이란, 시진핑(習近平) 주석의 절대 신임 속에서 그가 전권을 쥐고 지휘하고 있는 중앙기율검사위원회를 말한다. 기율위는 공산당의 방침에 반하거나 비리 혐의가 있는 당원을 조사하는 당내 사정·감찰 조직이다. 경찰이나 검찰 등 정부 기구가 갖고 있는 체포나 기소 권한은 없다. 하지만 당원들에게는 경찰이나 검찰보다 더 무서운 게 기율위다. 왕은 공식적으론 당내 서열 6위이지만 실제 파워로는 서열 2위인 리커창(李克强) 총리를 능가하는 것으로 평가받는다.

왕치산의 막강한 권한은 최근 저우융캉(周永康) 전 상무위원의 비리를 밝혀내고 사법기관에 넘김으로써 입증된 바 있다. 신중국 건국 이래 상무위원을 지낸 사람은 비리 혐의로 처벌하지 않는다는 불문율을 처음으로 깨뜨린 것이다. 저우뿐 아니다. 중국 인민해방군으로서는 최고위직인 중앙군사위 부주석을 지낸 쉬차이허우(徐才厚)도 왕에 의해 당적이 날아갔다. 공산당원의 당적 박탈은 사법처리의 전 단계다. 당원 자격을 유지한 채 피고인을 법정에 세우는 건 당에 누가 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자면 끝이 없다. 가령 베이징 서남쪽의 산시(山西)성이 대표적이다. 부성장 두산쉐(杜善學)와 정협 부주석 링정처(令政策), 인민대표대회 부주임 진다오밍(金道明) 등 고위직 대여섯 명이 불과 한 달 새 줄줄이 낙마했다. 여성 고위직 2명도 같은 날 같은 혐의로 당적이 박탈됐다. 다름 아닌 간통 혐의였다. 중국 형법상으로 간통은 처벌대상이 아니지만 당원에겐 기율 위반에 해당된다. 아무튼 석탄 경기로 호시절을 구가하던 산시성의 정·관가는 기율위의 표적이 되면서 쑥밭이 됐다.

왕이 기율위 서기를 맡고 난 뒤 바빠진 부서는 기율위가 아니라 중앙조직부란 우스개 아닌 우스개도 나돈다. 기율위에서 공직자를 하도 많이 잡아들이니 이를 대치할 인물을 고르고 인사철도 아닌데 수시 인사를 해야 하니 바빠졌다는 것이다.

왕에게 상방보검을 내린 사람은 두말할 나위 없이 시 주석이다. 2012년 11월 제18차 당대회를 통해 공산당 1인자의 권좌에 오른 그는 즉시 부패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호랑이도 파리도 다 때려잡겠다”는 유명한 말과 함께였다. 그러면서 상무위원으로 발탁된 왕치산에게 중앙기율위 서기를 맡겼다. 그전까지 금융 분야에서 명성을 떨쳐온 왕에게 사정 분야를 맡긴 건 이례적인 인선이었다. 하지만 시 주석의 입장에서 볼 땐 능력이 검증된 인물인 데다, 오랜 인연으로 인한 신뢰가 각별하다는 점에서 왕치산 이외엔 선택의 여지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두 사람의 인연은 45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문화혁명 기간 중인 1969년 중국 공산당은 학생들을 대상으로 이른바 ‘상산하향(上山下鄕)’ 운동을 펼쳤다. 산간벽지로 가서 기층 농민들과 생활을 함께하며 그들에게 지식을 전파하고 노동의 가치를 배우라는 취지로 벌인 하방(下放)이었다. 그렇게 내려간 학생들은 지식청년, 줄여서 ‘지청(知靑)’이라 불렸다. 베이징에서 고교를 졸업한 왕도 21세의 나이에 산시성 옌안현 농촌의 인민공사에 배치됐다. 그보다 다섯 살 아래인 시진핑도 왕과 20여㎞ 떨어진 이웃 마을에 배치됐다. 왕은 지청 중에서도 나이가 많고 지식 수준이 높아 이웃 마을에까지 이름이 알려졌는데 어느 날 이 소문을 들은 소년 시진핑이 왕의 숙소를 찾아가 밤새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왕치산의 일생에서 가장 소중한 만남도 이 기간 동안 이뤄졌다. 같은 지청인 야오밍산(姚明珊)을 만나 결혼하게 된 것이다. 야오밍산은 나중에 정치국 상무위원과 부총리에 오른 공산당 원로 야오이린(姚依林)의 딸이다. 평범한 집안 출신의 그가 고위간부의 자제들을 뜻하는 태자당의 일원으로 분류되는 건 이런 혼맥을 통해서다.

이유는 분명치 않지만 왕은 극히 이례적으로 2년 만에 하방 생활을 끝내고 시안(西安)에 있는 산시(陝西)성 박물관에서 일하게 됐다. 그뿐 아니라 박물관 직원의 자격으로 시베이(西北) 대학 역사학과에 진학했다. 다른 지청들이 진학의 기회는커녕 마오쩌둥(毛澤東)의 죽음으로 문혁이 막을 내린 76년 이후에야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던 것에 비하면 대단한 행운이었다.

82년 왕은 중앙서기처 농촌정책연구실로 근무지를 옮겼고 88년부터는 금융 분야에서 승승장구하게 된다. 야오이린의 후광과 그 자신의 능력이란 두 가지 요소가 어울린 결과라고 중화권 언론들은 해석한다. 그의 능력을 알아보고 중앙은행인 인민은행 부행장에 발탁한 사람은 장인 야오의 후임 부총리로 중국 경제개혁을 이끈 주룽지(朱鎔基)였다.

왕은 98년 아시아 금융위기가 터진 뒤 광둥성 부성장으로 급파됐다. 금융위기가 홍콩에 이어 광둥으로 확산되는 것을 차단하라는 임무를 그는 훌륭하게 수행했다. 2004년에는 당시 유행하던 사스(SARS·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를 퇴치하라는 특명과 함께 베이징 시장대행으로 긴급 투입돼 한 달 만에 추가 환자의 발생을 차단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래서 얻은 별명이 ‘소방대장’이다.

그는 장인에 이어 중국 경제와 금융을 지휘하는 부총리가 됐다. 대규모 자금투입과 시의적절한 부양책으로 중국이 2008년 세계 금융위기를 헤쳐 나가는 데에도 역량을 발휘했다. 헨리 폴슨 미 재무장관과의 전략경제대화 등을 통해 그는 국제금융계에서도 이름이 알려졌다. 이 때문에 리콴유(李光耀) 전 싱가포르 총리는 “리커창보다 왕치산이 더 총리직에 어울린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그런 왕에게 기율위를 맡긴 건 시 주석이 구사한 회심의 전략이었다. 시 주석이 처음 부패와의 전쟁을 선포할 때만 해도 중국인들은 그리 큰 기대를 걸지 않았다. 역대 위정자치고 부패척결을 외치지 않은 자가 없었지만 부패는 확대재생산을 멈추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번에도 그러려니’ 했던 게 사실이다. 시중엔 ‘부패가 없으면 공산당이 아니다’는 냉소까지 퍼져 있었다.

하지만 상방보검을 손에 쥔 왕치산은 달랐다. 그는 금융계에서 일할 때의 주도면밀함을 기율위에서 그대로 발휘했다. 돈의 흐름을 좔좔 꿰고 있는 것도 부패와의 전쟁에선 큰 무기가 됐다. 왕이 저우융캉이란 호랑이 사냥을 위해 들인 시간은 꼬박 2년. 그 사이 저우의 권력기반인 쓰촨(四川)성과 석유업계, 공안부 인맥들을 차례차례 제거해 나갔다. 마지막 단계에선 저우의 아들과 두 동생(한 동생은 조사를 받고 난 뒤 지병이 악화돼 숨졌다)까지 잡아들였다. 저우융캉에 이르는 과정에 350여 명이 기율위의 조사나 처분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중국 당국의 통계에 따르면 왕치산이 기율위 서기로 취임한 이래 약 2년 동안 모두 58명의 성·부급 간부가 기율위의 처분을 받았다. 한국 관직으로 따지면 대략 차관급 이상에 해당하는 고위간부들이다. 부문별로는 중앙 간부 12명, 지방간부 38명, 군 3명, 국유기업 5명 등이다. 그전까지 한 해 평균 7명 안팎이 낙마한 것과 비교하면 대략 5~6년 동안의 숫자를 합산한 것과 맞먹는다. 이를 보면 기율위의 서슬이 얼마나 퍼런지 알 수 있다. 중앙기율위뿐 아니라 각 지방별 기율위의 조사를 받고 자리가 날아간 하급 관리들까지 합치면 숫자는 수만 명에 이를 것이다.

부패 척결이 예전에 못 보던 성과를 거두고 있다 보니 이를 진두지휘하는 왕치산의 인기도 높다. 네티즌들은 “최강 기율위”라는 찬사를 보내고 있다. 왕치산이 개설한 기율위 사이트에는 제보가 넘쳐나고 있고 이를 관리하는 직원은 24시간 근무체제다.

왕치산에게 이제 남은 시간은 딱 3년이다. 올해 66세인 그는 공산당의 나이 제한 내규에 따라 2017년 11월로 예정된 제19차 당대회를 끝으로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야 한다. 중국의 부패관리들이 숨죽여가며 그날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베이징=예영준 특파원 yyjun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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