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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은행 오디세이] 너의 정체는? 민간이냐 정부냐, 아니면 괴물이냐

제임스 길레이의 풍자만화 ‘위기에 빠진 영란은행(1797년)’. 나폴레옹과의 전쟁비용 조달을 위해 영란은행에 대출을 요구하는 피트(Pitt) 총리가 여자의 주머니를 터는 치한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러나 경기부양을 위해 오늘날 일본은행에 돈을 풀도록 요구하는 아베 총리는 치한이 아닌 영웅으로 인식된다. 똑같은 일도 여론의 평가는 완전히 달라질 수 있기 때문에 요즘 중앙은행들은 대국민 커뮤니케이션에 많은 공을 들인다.
포츠머스 회담 직후 미국 외교사절단의 일원으로 대한제국을 방문한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의 큰딸 엘리스. 홍릉 명성왕후의 묘역에서 벌어진 연회 도중 돌 조각상에 올라탔다. 당시 미국공사의 기록에 따르면, 고종은 그녀를 ‘공주’라고 부르며 극진히 대접했으나 엘리스는 이를 순전히 일본의 호의라고 생각했다. [사진 코넬대학교 도서관]
“신에게는 아직도 12척의 배가 있습니다.” 한국인들에게 이 말은 아주 특별하다. 일본인들에게도 그런 것이 있다. “오늘 날씨는 청랑하나 파도는 높다”는 도고 헤이하치로(東郷平八郎) 제독의 말이다.

⑤ 중앙은행을 바라보는 시각

영국의 넬슨 제독보다 이순신 장군을 더 존경했다는 도고 제독은 일본의 전쟁 영웅이다. 그는 1905년 쓰시마해협에서 러시아 해군과 한판 붙기 직전, 본국의 대본영(大本營)에 보내는 마지막 전문을 그렇게 끝맺었다. 전력이 훨씬 우세했던 러시아의 발틱 함대를 먼저 발견하고 격파해 조국에 승리를 안기겠다는 결의였다. 군더더기 없는 제독의 간결체 문장에서 일본인들은 비장미를 느낀다.

일본이 러시아 해군을 격퇴한 건 서구 열강이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그 후 미국은 일본에 거액의 차관을 제공했다. 러시아의 동진정책을 효과적으로 차단해 줄 일본의 쓸모를 확인했기 때문이다. 1905년 미국의 중재로 열린 포츠머스 회담에서는 미·일·러 사이에서 일본의 한반도 점령이 공인됐다. 회담 직후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은 사상 최대 규모의 외교사절단을 조선으로 파견했다. 그중에는 대통령의 딸 엘리스도 있었다. 고종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스무 살짜리 미국 처녀의 환심을 사기에 바빴지만 달라질 것은 없었다.

영국인의 금융제도 해설서로 눈뜬 일본
쓰시마 해전의 빛나는 승리가 있기까지 일본은 철저하게 서양을 모방하면서 힘을 키웠다. 이른바 일본의 도광양회(韜光養晦)였다. 모방의 대상에는 화폐제도와 금융제도도 포함됐다. 일본 대장성은 외국은행 요코하마 지점 직원인 샨드(Alexander A. Shand)를 불러 거액의 보수를 주고 고문직을 맡겼다.

28세의 영국인 샨드에게 맡겨진 일은 서양 금융제도 해설서를 집필하는 것이었다. 그가 일본인 부하직원의 도움으로 1872년 발간한 『통화와 금융사무』에는 영란은행이 포함돼 있었다. 일본인들은 총 5권으로 된 그 책을 통해 중앙은행과 ‘금융행동(monetary action)’ 즉, 통화정책이라는 개념을 알았다.

이후 중앙은행 설립 논의가 활발해졌다. 다구치 우키치(田口卯吉)는 당대 최고의 경제전문가였는데, 그는 ‘관금은행(官金銀行)’ 즉, 정부가 100% 출자하고 모든 것을 결정하는 오늘날의 중국인민은행식 중앙은행의 설립을 제안했다. 반면에 이탈리아는 상업은행 성격이 강한 중앙은행을 제안했다. 당시 이탈리아는 통일을 이루기에 바빠 중앙은행이 없었다. 그래서 영국식 중앙은행 즉, 이탈리아와 일본의 민간 주주로부터 80만 파운드를 모아 ‘일본제국은행’을 설립하되 이탈리아 왕실도 일부 투자하는 이 은행에 발권 독점권을 부여해 줄 것을 요청하는 제안서를 제출했다.

이 무렵 메이지유신에 반대하는 내란(서남전쟁)으로 인해 경제는 엉망이 되었다. 오쿠마 시게노부(大隈重信) 대장상이 축출된 뒤 임명된 마쓰가타 마사요시(松方正義)는 중앙은행 설립을 늦출 수 없는 과제라고 판단했다. 연구 끝에 정부와 민간이 50%씩 출자하는 벨기에식 중앙은행을 결정했다.

총리가 총재를 임명하고, 정부가 감독관을 파견하며, 정관의 제정과 변경 시 정부의 승인을 받도록 하는 것 등은 당시 벨기에 국립은행만 갖고 있던 특징이었다. 일본은행의 경우에는 한걸음 더 나아가 주주총회가 임명한 이사를 정부가 다시 승인토록 하고, 정부가 지점 설치까지 간여할 수 있도록 했다. 이런 점에서 중앙은행에 대한 일본 정부의 영향력은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 그런데도 다구치는 마쓰가타의 일본은행 설립 구상을 통렬하게 반대했다. 그가 보기에 정부와 민간이 혼재된 중앙은행이란 ‘괴물’이었기 때문이다. 왕을 보좌하는 산조 사네토미(三条実美, 이토 히로부미 총리의 전임)도 여기에 동조했다. 이로써 중앙은행 문제가 위정자들 사이에서 뜨거운 논쟁거리가 되었다.

러일전쟁 종료를 위해서 영국 포츠머스에서 개최된 평화회담. 일본의 한반도 지배를 인정하는 것으로 끝났으며,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은 그런 ‘국제평화’를 이끈 공로로 1906년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우리나라를 제물로 삼은 국제평화였다. [사진 미국 국립문서보관소]
영란은행 설립 때도 토리당·휘그당 대립
그러나 국내파의 반대는 성공하지 못했다. 볼셰비키 혁명 전까지는 정부가 100% 소유하고 간섭하는 중앙은행이 지구상에 없었기 때문이다. 4회에 걸쳐 일본은행 주주를 모집한 끝에 1주당 200엔, 총 2만5000주의 주식은 580명의 민간 주주에게 발행되고, 나머지 2만5000주는 정부가 출자했다.

이렇게 해서 1882년 설립된 일본은행은 처음 몇 년간 순탄하게 영업하다가 1894년 큰 고비를 맞았다. 청일전쟁이 터지면서 정부 대출이 6개월간 3배로 급증하고, 그래서 민간 대출을 대폭 줄였다. 그런 노력 때문에 태환제도(일본은행권을 은화로 교환하는 약속)는 계속 지켜졌지만, 영업이익이 급감했다.

또 다른 문제는 세금이었다. 다구치의 지적대로 일본은행은 민간도 아니고 정부도 아닌 ‘괴물’이었다. 민간 주주가 있었지만 국고금 수납을 무료로 대행하고, 정부에는 거의 무이자로 대출하며, 임원의 인사권도 주주가 아닌 정부에 있다는 면에서는 분명히 정부 조직에 가까웠다. 그래서 민간 주주들은 일본은행이 과세 대상이라는 점에 동의할 수 없었다. 그들이 보기에는 일본은행의 배당금은 ‘자본금을 징발당한 데 대한 보상금’이었다. 총리가 임명한 일본은행 총재마저도 민간 주주들의 조세저항에 동조했다.

일본은행에 대한 과세 문제는 타협점이 보이지 않다가 1902년에 이르러서야 의회의 중재로 가까스로 타결됐다. 특별법(일본은행 납세에 관한 법률) 제정을 통해 일본은행을 과세기관에 포함하되, 일본은행에는 은행권 발행 한도를 대폭 증액해 편익을 봐주는 것으로 양측이 합의한 것이다. 일본은행이 설립된 지 20년 만의 일이었다.

그러나 과세 문제보다 더 큰 문제가 있었다. 청일전쟁 중에도 태환제도를 유지했던 일본은행의 자율성이 점차 정치인과 관료들의 힘에 밀린 것이다. 다카하시 고레키요(高橋是清)는 그 옛날 『통화와 금융사무』가 발간될 때 일본어 번역을 담당했던 샨드의 부하직원이었다. 그는 러일전쟁 때 미국 차관을 도입하는 데 기여한 공로로 일본은행 총재가 됐다가 대장상을 거쳐 총리에까지 올랐다. 그가 다섯 번째 대장상에 올랐을 때 마침 대공황이 닥쳤다. 그러자 재빨리 태환제도(1931년)를 포기하고 전례 없이 파격적인 재정정책과 통화정책을 밀어붙였다. 그래서 오늘날 ‘아베노믹스의 아버지’라고 불린다. 일본은행은 노회한 아베노믹스의 아버지 앞에서 한마디도 못했다.

최악의 위기는 태평양전쟁이었다. 오늘날 야스쿠니 신사에 묻혀 있는 1급 전범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총리는 일본은행에 대한 기존의 지배력에 만족하지 않았다. 이 은행을 정부의 완벽한 시녀로 만들기 위해 태평양전쟁 개전과 함께 일본은행법을 개정했다. 1942년 개정된 법에는 “일본은행은 국가경제 총력이 적절히 발휘되도록(제1조)”하면서 “오로지 국가 목적의 달성을 사명으로 운영돼야 한다(제2조)”는 조항이 신설됐다. 1917년 볼셰비키 혁명 직후 제정된 소비에트국가은행법과 1939년 히틀러가 고친 라이히스방크법을 모방한 것이다.

일본은행이 세워질 때 유신정부 안에서 싸움이 벌어진 것은, 많은 나라가 흔히 겪는 성장통이다. 명예혁명 이후 영국 정부가 1694년 영란은행을 세울 때도 토리당과 휘그당이 대립했고, 건국 직후 미국 정부가 1791년 최초의 중앙은행을 세울 때도 해밀턴 재무장관과 제퍼슨 국무장관이 심하게 다퉜다. 오늘날 민주당과 공화당의 뿌리는 건국의 아버지인 두 사람이 중앙은행 문제를 두고 반목한 데서 출발한다. 두 정당은 1913년 연방준비제도(Fed)를 세울 때도 6년 동안이나 충돌했다. 중앙은행을 두고 이 정도까지 싸우게 되는 이유는, 그것이 국가 운영에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중앙은행은 정부도 아니고 민간도 아니어서 ‘괴물’로 오해받기 쉽다. 당대 최고의 경제전문가 다구치가 그렇게 오해했다. 20년간 지속한 일본은행 과세 논쟁도 중앙은행의 애매한 정체성에 그 원인이 있다. 과세 문제는 오늘날에도 정해진 해답이 없어 나라마다 처리 방식이 다르다(한국은행도 처음에는 비과세 기관이었으나 전두환 정부 시절 과세 대상이 됐다).

아베, “오늘 날씨는 청랑하나 파도는 높다”
하지만 중앙은행을 바라보는 일치된 견해도 있다. 바로 자율성을 존중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일본은행은 설립될 때부터 정부에 대해 ‘을(乙)’의 위치에 있었다. 그나마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때까지는 괜찮았다. 하지만 대공황과 태평양전쟁을 거치면서 일본은행의 자율성은 완전히 뭉개졌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에도 아베노믹스라는 이름으로 다시 한 번 시험을 받고 있다. 최근에는 아베노믹스의 피로감이 커지면서 아베 총리가 역공을 받고 있지만, 그는 의회 해산을 통해 반전을 노린다.

의회 해산을 발표하던 날 아베 총리는 비장한 어조로 “오늘 날씨는 청랑하나 파도는 높다”고 말했다. 쓰시마 해전을 앞둔 도고 제독의 결연한 이미지에 자신을 대입한 것이다. 그러나 일본은행에는 아베노믹스가 높은 파도다. 높은 파도 앞에 놓인 일본은행의 운명은 오늘 뚜껑이 열리는 중의원 선거 결과에 달려 있다.



차현진 서울대 사회과학대학과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경영대학원을 졸업했다. 올해로 30년째 한국은행에서 근무 중이다. 『애고니스트의 중앙은행론』『숫자 없는 경제학』 『금융 오디세이』 등 금융 관련 다수 저서가 있다.

포함의 아픔을 아직도 그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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