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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소영의 문화 트렌드] ‘땅콩 부사장’ 덕에 안하무인 재벌 드라마 사라지려나

드라마 ‘꽃보다 남자’(2009)에서 안하무인 재벌 후계자 구준표는 자기 신발에 실수로 아이스크림을 떨어뜨린 같은 학교 여학생에게 이렇게 말한다. “핥아.”

그 장면을 보고 난 TV를 꺼 버렸다. 아, 물론 나는 그가 가난하고 정의로운 여학생 금잔디에게 반격을 당할 것이고, “나에게 이렇게 한 여자는 네가 처음이야!”라며 그녀와 티격태격하다 사랑에 빠질 것이고, 그녀에게 감화를 받아 조금은 착해지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2009년 드라마 ‘꽃보다 남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대 노예제 사회도 아닌 21세기에 그런 짓이 ‘일상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로 그려지는 자체가 불쾌했다. 일본 만화가 원작이라 만화적 과장을 감안해도, 그런 짓이 악역의 질 나쁜 폭력으로서가 아니라 주인공의 거만한 심술궂음 정도로 가볍게 다뤄지는 게 어이없었다.

게다가 구준표나 그의 재벌 친구들은 납치·감금 등 엄연한 범죄행위를 해도 사회적으로 아무 제재를 받지 않는다. 그저 같은 재벌에 의해 제재를 받거나 가난한 여자친구와의 사랑에 의해 좀 교화가 될 뿐. 이런 식으로 오만방자하고 무법자적인 재벌이 등장하는 로맨스드라마가 그 후로도 계속 나오는 걸 보면서 ‘저 드라마 작가들은 시민혁명 이전 앙시앵레짐(구체제) 신분사회로의 회귀를 꿈꾸고 있나?’라고 투덜거렸다. 미남 재벌이 가난한 평범녀와 사랑에 빠진다는 스토리도 꽤나 비현실적이지만, 그에 앞서 그 재벌이 아무런 제재도 받지 않고 이른바 ‘갑질’을 하는 것도 비현실적이라고 느껴서 말이다.

아무리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 많은 게 갑’이라지만 자유시장경제의 근본적 특징은 갑을관계가 일방적일 수 없고 고용주와 피고용인, 판매자와 소비자 등의 관계로 서로서로 물고 물려서 견제와 균형이 이뤄지는 것이다. 그 덕분에 자본주의 사회가 여러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일종의 차선(次善)책으로 굴러가는 것이다. 시장이 제대로 작동할 경우 일방적인 ‘갑질’은 쉽지 않다.

그런데 이런! 최근 그런 드라마 속 비현실적·일방적 ‘갑질’을 현실에서 실현하는 시도가 일어났다. 이른바 ‘땅콩 회항’ 사건 말이다. 이 사건이 별로 반재벌정서가 없던 사람들과 심지어 직장 내 위계질서를 중시하는 사람들까지 분노하게 한 결정적 이유는,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이 소비자인 승객에까지 갑 노릇을 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임원으로서 승무원에게 문제를 지적하고 질책할 수 있다. 물론 그렇다고 그들에게 인간적 모욕을 줄 권리는 전혀 없기 때문에 그런 식의 질책방식도 심각한 문제다. 그러나 거기서 끝났으면 이렇게 전 세계적 이슈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문제는 승객에 대해서는 기업인으로서 자신이 을이고 소비자가 갑이라는 인식이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전혀 그런 인식 없이 함부로 비행기를 돌려 승객의 불편과 시간적 손해를 초래한 것이다. 각 구성원이 갑인 동시에 을도 되는 시장경제적 힘의 견제와 균형을 무시하고, 앙시앵레짐 귀족처럼 일방적 갑 노릇을 하려 한 것이다.

조 전 부사장이 램프 리턴으로 이런 마인드를 드러냈기 때문에, 더구나 그녀가 창업자가 아닌 부모 덕으로 그 자리에 오른 재벌 3세이기 때문에 그녀가 승무원에게 한 행동도 대한항공의 해명처럼 기업 임원으로서 직원에게 질책을 한 것이 아니라 귀족 노릇을 하며 진상을 부린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것이다. 스티브 잡스도 직원들에게 가혹하기로 악명 높았지만 누구도 그의 행동을 조 전 부사장의 행동과 같은 맥락으로 보지 않는다. 그런데 대한항공과 조 전 부사장은 첫 사과문에서 이 점을 전혀 깨닫지 못하는 무지를 드러내 읽는 사람을 아연실색하게 했다.

현실은 안하무인 재벌의 로맨스가 나오는 드라마와 다르고, 또 달라야 한다. 시대착오적 귀족 마인드는 “나에게 이러는 건 네가 처음이야!”라는 대사를 외치게 하는 이성 친구가 아니라 사회적 제재에 의해 고쳐져야 한다. 지금 그것이 작동하고 있어 다행인데, 더 확실하게 작동해 경종을 울렸으면 한다. 더불어 안하무인 재벌 드라마들도 그만 좀 봤으면 좋겠다. 장 보드리야르가 말한 대로 시뮬라크르(가상)는 증식하고 현실이 되는 경향이 있으니까.


문소영 코리아중앙데일리 문화부장 symoon@joongang.co.kr

포함의 아픔을 아직도 그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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