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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인문학] 차별 피하려 성형하는 사람들 … 내 몸이 내 몸 아닌 세상

일러스트 강일구
“복숭아뼈 빼고 다 바꿔 드립니다.” 강남의 한 지하철 역에서 본 광고 문구다. 물론 성형수술에 대한 것이다. ‘비포&애프터’로 구성된 광고들도 참 엽기적이지만 자주 봐서 그런가, 어느새 식상해졌는데, 그보다 훨씬 과격하고 살벌한 광고가 등장한 것이다. 보톡스에서 양악수술을 넘어 이젠 전신을 다 시술의 대상으로 삼겠다는 뜻이다. 마치 게릴라 잔당들을 남김없이 소탕하고 말겠다는 정규군의 선전포고를 보는 듯했다. 대체 ‘외모’가 뭐길래 저렇듯 온몸을 ‘융단폭격’해대는 것일까.

<6> 생명주권 상실 시대

경쟁이 심한 데다 외모도 스펙의 하나라는 말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21세기 들어 여성들의 약진은 눈부시다. 가히 ‘후천개벽의 시대’라 해도 무방할 정도다. 그럼에도 왜 여성들은 이렇게까지 몸을 괴롭히면서 아름답게(실제로는 ‘섹시하게’) 보여야 하는 걸까. 여전히 잔존하고 있는 성차별 때문이라면 더더욱 이해할 수 없다.

그런 식의 통념은 맞서 싸워야 할 대상이지 이렇게 부화뇌동할 사항은 아니다. 성형수술이 만연할수록 차별은 더더욱 심화될 테니 말이다. 더구나 이젠 비단 여성들에만 국한된 사항도 아니다. 남녀노소 모두 이 ‘환골탈태’의 대열에 합류했기 때문이다. 이런 추세라면 전 국민의 몸이 다 시술의 타깃이 될 판이다. 이미 수십 년 전 ‘병원이 병을 만든다’며 의료권력의 부조리를 설파했던 이반 일리히도 이런 식의 ‘반생명적’ 의료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얼굴은 밖으로 드러난 오장육부
누구나 알고 있듯이 마취를 하고 메스를 대는 수술은 최후의 수단이어야 한다. 그런데 생명이 위험한 것도 아니고 심하게 아픈 것도 아닌데 단지 남들에게 ‘예쁘게’ 보이겠다는 이유만으로 이렇게 온몸을 ‘깎고 자르고’ 하는 것은 의료의 기본을 일탈한 행위다. 당연히 부작용 및 의료사고의 소지가 아주 높다. 이미 수술 부작용으로 외모는 물론 삶을 송두리째 훼손당한 사례도 적지 않다. 그럼에도 도무지 이 ‘광란의 질주’는 멈출 줄을 모른다. 세월호 참사 이후 안전이 사회정치적 화두로 부상했건만 이런 ‘일상적 재난’에 대해서는 어찌 이리도 무감각한 것일까.

『동의보감』에 따르면 얼굴은 밖으로 드러난 오장육부다. 눈은 간, 눈빛은 심장, 코는 폐·대장, 입은 비위, 혀는 심장, 귀는 신장 등등. 그래서 얼굴빛을 보고 병을 진단하는 ‘망진’, 얼굴을 통해 운명의 흐름을 짚어내는 ‘관상’ 등이 얼마든지 가능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얼굴의 꼴을 과격하게 변형하는 건 내부와 외부, 몸과 삶, 얼굴과 운명 사이의 연결고리를 끊어버리는 일에 속한다. 하여 수술 부작용도 부작용이지만 무엇보다 정신적으로 공황상태가 올 수 있다. ‘여긴 어디? 난 누구?’라는 유행어가 그런 징후를 반영하는 셈이다.

그러니 “정말로 바꾸고 싶다면 차라리 내장을 성형하시라” 고 농담처럼 말한 적이 있었다. 한데 이 ‘말도 안 되는’ 농담이 현실이 될 줄이야! 위밴드, 위축소술, 위풍선 등 최근 사회적으로 큰 논란을 일으킨 용어들이다. 대체 왜 이런 짓을? 다이어트를 위해서란다. 식탐은 줄이기 어렵고, 살이 찌는 건 싫고…. 그래서 일단 먹고 토하는 여대생이 많다는 이야기는 들은 바 있다. 점심시간에 여대생 화장실에 가면 곳곳에서 웩!웩!거리는 소리들로 가득하다는 괴담과 함께. 참 힘들게들 산다, 싶었는데 그 정도가 아니라 아예 내장까지 ‘들었다 놨다’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문제가 불거진 건 얼마 전 세상을 떠난 가수 신해철씨의 죽음으로 인해서였다.

자기가 자기 부정하는 어리석은 세태
그의 죽음을 둘러싼 미스터리는 여전히 진행형이지만 그걸 파헤치는 과정에서 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분명 ‘장협착’ 때문에 수술을 했는데 그 과정에서 의사가 환자의 동의 없이 담낭을 절제했다는 사실이다. 담낭이 없으면 육식이 안 당겨서 다이어트에 좋다나. 정말 이 대목에서 헉! 하고 비명을 지를 뻔했다. 담낭이 그런 용도였단 말인가? 그 밖에 위밴드 수술을 하면서 맹장을 떼어낸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역시 환자의 동의는 없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위밴드 수술은 보험이 안 되니까 보험료를 청구하기 위해 이런 편법을 쓴 것이다. 맙소사! 결국 문제는 돈이었던 것. 돈을 위해서라면 담낭이나 맹장쯤이야 떼어내도 무방하다 여긴 것이다. 그야말로 ‘복숭아뼈 빼고 다 바꿔 드립니다’가 실제로 구현되고 있는 셈이다.

미적 기준에 맞지 않으면 밀어 버리고, 날씬해지기 위해선 내장도 조였다 풀었다 하고, 별 쓸모가 없어 보이면 가차 없이 제거하고…. 이것이 현대의학, 특히 성형외과가 개척한 ‘신세계’다. 누가 봐도 생명의 존엄성이라는 의학적 전제와 완벽하게 어긋난다. 나아가 이런 배치는 ‘생명주권’에 대한 심각한 손상이나 다름없다.

가장 큰 문제는 이런 상황하에선 환자에게 어떤 결정권도 없다는 사실이다. 미와 추, 질병과 치유, 유용성과 무용성 등을 가르는 기준은 전적으로 의사에게 달려 있다. 따라서 병원에 들어서는 순간 누구든 의사의 프레임에 걸려들고 만다. 검진을 하고 견적을 내고 결국엔 어딘가를 절개해야 한다. 환자 스스로 자기 몸을 탐구하고 돌본다는 설정은 어디에도 없다. 환자가 준비해야 할 것은 오직 돈뿐이다. 그래서 정말 궁금하다. 이러고도 과연 내 몸은 ‘나의 것’인가? 또 내 몸이 ‘나의 것’이 아니라면 과연 나는 내 ‘삶의 주인’이라고 할 수 있을까?

보다시피 신해철씨처럼 유명인도 의료사고에 속수무책이었다. 시술과정도 어이없지만 수술이 끝난 후 여러 차례 복통을 호소했지만 묵살당했다. 고의로 그랬을 리는 없다. 아마도 그럴 여유가 없었을 것이다. 그 큰 병원을 운영하려면 얼마나 바쁘고 분주하겠는가. 그렇다면 앞으로도 의료사고는 빈발할 것이다. 대형병원이라고 예외일 수 없다. 오히려 어떤 점에선 더 많은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법에 호소하면 된다고? 법정싸움은 지루할뿐더러 환자가 이길 확률이 거의 없다. 설령 이겨서 몇 푼의 보상금을 받는다 한들 이미 훼손된 몸과 삶은 어디서 보상받는단 말인가? 소위 민주주의 사회에서 이토록 부조리하고 이렇게 ‘파쇼적인’ 관계가 또 있을까?

아울러 의료가 이렇게 공격적으로 마케팅을 해대면,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끊임없이 결핍을 양산해 낸다. 성형중독에 빠져든 것도 그 때문이 아닌가. ‘눈이 작아, 코가 납작해, 입이 삐뚤어졌어’ 등등. 어떻게 생겼든 그 모든 걸 긍정해야 하는 건 다름 아닌 자신이다. 내가 나를 부정하는데 어떻게 타인이 나를 인정해 주겠는가. 게다가 그렇게 스스로 결핍을 생산한 다음엔 모든 문제를 다 그 ‘덜 떨어진’ 외모 탓이라 여긴다. ‘눈이 작아서 실패했어’ ‘뚱뚱해서 차인 거야’ ‘턱이 넓적해서 취직이 안 됐어’ 등등. 결론은 뻔하다. 더 큰 병원, 더 유명한 의사를 찾아가서 ‘환골탈태’ 하는 것.

몸을 부속처럼 여기는 게 만병의 근원
문제는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자신에 대해 이렇게 불만이 많은 이들이 과연 타인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럴 리가 없다. 제도와 서비스에 중독되면 자기도 모르게 ‘인정욕망의 화신’이 되어 버린다. 목숨 걸고 성형을 하는 이유도, 죽으라고 카톡을 해대는 이유도 다 타인의 시선을 끌기 위해서다. 타자는 나를 인정해 주는 대상일 뿐이다. 예쁘다고 칭찬해 주고, 나의 상처를 위로해 주고, 나에게 서비스를 제공해 주는 존재. 그게 아니면 다 나의 적이거나 경쟁자다. 이런 전제하에서 어떻게 친교와 소통이 가능하겠는가. 특히 사랑과 연애는 더더욱 불가능하다. 사랑은 에로스에 토대하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관계에 대한 열망이다. 타자와 온전히 연결되고자 하는 욕망. 하여 몸 전체가 동의해야만 한다. 몸을 조각조각 나누고 기계의 부속처럼 여기는 사고방식으로는 결코 가능하지 않다. 결과는 고립과 불통! 거기에서 또 만병이 싹튼다. 그러면 또다시 병원과 전문가를 찾아 헤매고…. 이 ‘마의 사슬’에서 내 몸의 권리, 생명주권은 들어설 자리가 없다!

언급했다시피 얼굴과 오장육부, 오장육부와 칠정(희노우사비경공), 생리와 심리는 하나로 어우러져 있다. 어디 그뿐인가. 우리의 몸에는 꿈, 성음, 충 등 정체불명의 타자들도 득시글거린다. 무의식과 자율신경은 또 어떤가. 이것들은 거의 대부분 나의 통제 밖에 있다. 거기에 더해 ‘오운육기’라는 외부의 기운과도 끊임없이 교감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몸이야말로 타자들의 향연이자 무상하게 흘러가는 ‘유동성의 바다’다. 외부와 끊임없이 소통해야 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예쁜 이목구비를 다 모아놓는다고 미인이 되는 것이 아니듯 핵심 장기만 있다고 해서 오장육부가 원활하게 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심장이나 폐처럼 생명 유지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장기도 있고 반대로 담낭이나 맹장처럼 별다른 역할이 없어 보이는 장기도 있는 법이다. 중요한 건 이들 사이의 네트워크지 개별 장기들의 기계적 결합이 아니다. 강한 것과 부드러운 것, 큰 것과 작은 것, 꽉 찬 것과 텅 빈 것, 이 낯설고 이질적인 것들 사이의 ‘어울림과 맞섬’, 그것이 곧 생명의 자율성이다. 또 그것이 창조와 순환의 원동력이다. 그러므로 그 이치를 체득하여 자기 몸의 결정권을 회복하는 것이 생명주권의 출발점이다. 삶과 운명의 주체가 되는 길도 거기서부터 가능하리라. 하지만 성형열풍과 의료권력의 진군 앞에서 ‘생명주권’의 복원은 요원하기만 하다. 생각할수록 우울하고 또 우울하다.



고미숙 40대 이후 지식인 공동체 활동을 해왔고, 현재는 남산강학원&감이당에서 ‘공부와 밥과 우정’을 동시에 해결하고 있다. 저서로는 『열하일기 3종세트』 『달인 3종세트』 『동의보감 3종세트』 등.

포함의 아픔을 아직도 그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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