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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문화어 사전] 십상시

[명사] 十常侍. 중국 한나라 영제 때 권세를 장악했던 장양 등 열 명의 환관을 통칭해 부르던 말.



[매거진M]

조선의 내관은 두루 교양을 갖췄다는 점에서 중국과는 달랐다. 영화 ‘역린’(4월 30일 개봉, 이재규 감독)에서 정재영이 연기한 내관 갑수를 통해서 그런 모습을 엿볼 수 있다.
500여 년간 동양 남성의 필독서였던 소설 『삼국지연의』는 ‘천하의 대세란 본래 갈라지면 하나로 합쳐지고, 합쳐지면 또 갈라지는 것(天下大勢, 分久必合, 合久必分)’이란 명문장으로 시작한다. 광무제에 의해 시작된 후한(後漢)의 정세가 어떻게 어지러워지면서 위·오·촉 삼국의 뿌리가 태동했는지를 설명하기 위해서다.



기원후 168년, 13세의 나이로 즉위한 영제(靈帝)는 평생을 환관들의 영향 속에 살았다. 몇몇 신하들이 도전했으나 영제는 매번 결정적인 시기에 환관들의 손을 들어줬다. 선대 환제(桓帝) 때부터 황제를 모신 열 명의 내시들은 한 몸처럼 움직이며 정권을 농단했다. 『삼국지연의』는 이들의 이름을 장양, 조충, 봉서, 단규, 조절, 후람, 건석, 정광, 하휘, 곽승이라 기록하고 있다. 정사인 『후한서』도 장양, 조충 등을 거론하고 있으나 여기에는 그 수가 열두 명이다.



이들의 폐해로 정치가 어지러워졌고, 184년 황건적의 난으로 후한의 통치 체제가 사실상 붕괴됐지만 영제는 주색에만 탐닉하다 189년, 34세로 숨을 거뒀다. 16세인 영제의 장남 유변(劉辯)이 뒤를 이었으나 5개월 만에 십상시의 난을 겪으며 동탁에 의해 쫓겨나 소제(少帝)라 불렸다.



명색이 십상시의 ‘난’이라고는 하나 실상은 십상시가 대장군 하진을 죽이자 하진의 부하들이 십상시와 그 일족들을 몰살시킨 사건이다. 정권 탈취 음모가 아니라는 점에서 ‘난’이라는 이름은 다소 억울할 수 있다. 환관들의 권력이 철저하게 황제의 총애에 기반한 것이고 보면, 환관들이 황제를 해치는 것은 자살 행위인 셈이었다. 하지만 해바라기 권력의 속성상 이들은 군왕의 심기에만 온 정성을 기울였으므로, 대개 국정은 극도로 어지러워졌다.



십상시 외에도 중국 역사에는 악명 높은 환관들이 수없이 등장한다. 지록위마(指鹿爲馬,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고 한다는 뜻으로 거짓된 행동으로 윗사람을 농락하는 것을 가리킴)의 고사를 남긴 진시황 때의 조고를 비롯해 촉한의 황호, 당 현종 때의 고역사, 당 희종 때의 전영자 등 부지기수다. 명 태조 주원장은 그 폐해를 막기 위해 환관의 수를 100명으로 제한하고, 정치 참여를 사형으로 다스리는 등 엄한 관리에 나서기도 했다. 그러나 그가 죽고 고작 37년 뒤인 1435년, 5대 영종 때 다시 환관 왕진이 권력을 잡았다.



반면 한국사에서는 시대를 전횡한 내시의 이야기를 찾아보기 힘들다. 그만치 사대부들의 견제가 엄격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 성종 25년(1494년)에는 임금이 몇몇 환관과 의관에게 가자(加資, 관료들의 품계를 올려 주는 것)를 내리자 조정 백관들이 크게 반발한 기록이 있다. 특히 대사간 윤민은 “한나라 원제가 석현 한 사람을 등용했을 때 뒷날 오후(아래에 자세히 설명하겠다)나 십상시의 권세를 예견했겠느냐”며 2월 28일부터 3월 12일까지 11회나 상소를 올리며 가자를 철회하라고 주장했다. 성종 또한 조치를 취소하지 않았으나 이후로는 훨씬 신중해졌다.



이렇게 치열한 견제 때문에 오히려 조선의 내시들 가운데서는 상당한 수준의 학문과 교양을 갖춘 이들이 나타났다. 중국에서는 환관들이 학식을 갖추면 정치에 관여한다 하여 공부하지 못하게 했지만, 반대로 조선에서는 내시들이 업무 수행에 걸맞은 교양을 쌓는 것을 의무로 삼았기 때문이다. 박상진의 연구서 『내시와 궁녀, 비밀을 묻다』에 따르면 조선시대엔 내시부에 환관들의 교육을 담당하는 3명의 내시고관을 상주시키고 어린 내시들에게 글을 가르쳤다. 그 결과 순조 때 시문집 『노곡만영』을 남긴 이윤묵 같은 문인이 배출되기도 했다.



중국 내시가 조선 내시에 비해 강한 권력을 가진 이유를 황제의 권력과 조선 국왕의 권력에 본질적인 차이가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는 이들도 있다. 조선은 일찍이 사대부의 나라로 자리 잡았고, 어떤 군왕도 중국 황제처럼 전제 정치를 하는 것은 불가능했다는 얘기다. 그런 황제들이 권력의 일부를 양도할 수 있던 두 축은 종실 (또는 외척)과 환관이었다.



환관 권력의 대명사인 십상시는 본래 영제의 전임자 환제의 시대에 태동했다. 환제는 외척 세력 타도를 위해 암암리에 환관들을 활용했고, 이 과정에서 공을 세운 다섯 환관을 제후로 삼았다. 이들이 바로 위에서 말한 오후(五侯)다. 이런 환경에서 성장한 영제는 자연스럽게 환관들을 자신의 진정한 보호자로 여기게 됐지만 불행히도 그런 ‘인의 장막’이 최고 통수권자의 눈과 귀를 가린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영제와 십상시의 시대에서 2000년이 흐른 21세기에도 ‘외척’과 ‘환관’의 권력 암투는 뉴스가 되고 있다. 권력의 본질이란 그때나 지금이나 별반 차이가 없음을 알려주는 교훈일 수도 있겠다.





송원섭 블로그 ‘송원섭의 스핑크스 2호점’ 운영자. 모든 종류의 구경과 참견이 삶의 보람. ‘오지라퍼’라는 말을 만든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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