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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재의 시시각각] 조현아가 남긴 것

이정재
논설위원
지난해 ‘라면 상무’ 사태 때만 해도 조현아 대한항공 부사장은 자신이 1년여 뒤 ‘땅콩 부사장’으로 불릴 것이란 생각은 못했을 것이다. 알았다면 당시 사내 게시판에 “승무원 폭행 사건 현장에 있었던 승무원이 겪었을 당혹감과 수치심이 얼마나 컸을지 안타깝다”는 글을 남기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비난한 라면 상무를 포스코는 즉시 해임했다. 갑질의 대가를 혹독히 치른 셈이다.



 ‘땅콩 부사장’의 죄질은 더 나쁘다. 그런데도 그는 애초 보직에서만 해임됐다. 대한항공 부사장 자리도, 칼호텔네트워크 대표이사 자리도 유지했다. ‘무늬만 사퇴’라며 여론이 더 나빠지자 그제서야 부사장 자리를 내려놨다. 아무래도 대한항공과 조현아는 국민이 왜 얼마나 상심·분노했는지 몰랐던 모양이다. 이번에 대한민국 사회가 조현아를 매몰차게 몰아친 이유는 크게 다섯 가지다.



 우선 감정 노동자들의 울분을 다시 자극했다. 단순한 울분이 아니다. 여기엔 무력감까지 얹어진다. 라면 상무에 당한 승무원은 최악의 경우 “미친 X에게 물린 셈” 칠 수도 있다. 하지만 땅콩 부사장은 다르다. 그는 오너일가다. 임직원에겐 무소불위의 권력자요 생사여탈권을 쥐었다. 그에게 혼난 사무장은 당시 뭘 생각했을까. 자존심? 분노? 수치? 아닐 것이다. “제발 잘리지만 않게 해달라” 속으로 빌었을 것이다. 이 한파에 쫓겨났다간 얼어 죽을 수도 있다는 무력감에 사로 잡힌 채. 그렇지 않았다면 그는 언론 접촉을 막는 대한항공 측에 반발해 진작 진실 알리기에 나섰을 것이다.



 둘째, 박근혜 정부의 경제 살리기에 역행했다. 국회는 지난 2일 가업승계공제를 확대한 ‘상속세 및 증여세법’안을 부결시켰다. 여야가 같이 반대했다. 국민 정서상 ‘부의 대물림’으로 비치는 법이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땅콩 부사장 사태를 국회는 자신의 판단이 옳았다는 증거 사례로 삼을 것이다. 당장 대기업 규제 완화 법안들이 줄줄이 제동이 걸릴 수 있다. 한진그룹이 야심 차게 추진 중인 경복궁 근처의 특급 호텔 건립도 물 건너갈 가능성이 크다. 추진 주체인 칼호텔네트워크 대표이사 자리를 조현아 부사장이 계속 맡기로 했으니 정부도 법 개정에 부담스러울 수 있다.



 셋째, 반재벌 정서를 키웠다. 사실은 대기업보다 중소기업 오너들이 더 많은 갑질을 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땅콩 부사장 건 같은 ‘대형사고’가 터지면 비난은 재벌에만 쏠린다. 행동경제학자 대니얼 카너먼의 ‘대표성 휴리스틱 효과’다(어림짐작 효과쯤으로 생각하면 된다). 비행기 사고는 잘 안 나지만 한번 났다 하면 ‘대형 사고’다. 그러니 기억에 훨씬 잘 남는다. 그 바람에 비행기가 자동차보다 더 위험하다고 여기게 되는 식이다. 이제 비행기 이륙이 지연될 때마다 승객들은 기장의 안내방송을 믿지 않고 다른 나쁜 기억들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오너 일가가 탔나, 또 누굴 혼내나.”



 넷째, 오너 리스크를 키웠다. 3세·4세 경영을 보는 시선이 더 따가워질 것이다. 가뜩이나 한국 재벌의 세습 경영에 안팎의 비판이 많다. 사회적 압력이 커지면 다른 재벌까지 기업 의욕이 꺾이고 경영 위축을 가져올 수 있다. 이런 것들이 합해지면 주춤했던 경제 민주화 논쟁이 다시 달아오를 수 있다. 1% 부자들이 베풀지 않는 사회라는 인식이 커지면 99%의 저항도 커질 수밖에 없다.



 다섯째, 자영업자 양산을 더 부추길 것이다. 한국의 자영업 비중은 세계 최고다. 열에 아홉이 3년 내 망한다. 알면서도 퇴직자들이 몰린다. 내면엔 샐러리맨 시절 오너 갑질에 가슴 상한 기억이 자리 잡고 있다. 변변한 일자리도 없지만 그런 갑질에 또 당하느니 망해도 내 일을 해보겠다는 오기 같은 거다.



 그런데도 대한항공의 인식은 국민 의식과 저 멀리 떨어져 있는 듯하다. 직원에 책임을 미룬 해명, 당사자는 등장하지도 않는 사과 같지 않은 사과, 면피와 찔끔찔끔 눈치보기식 인사조치. 그러니 국민 감정이 쉽게 가라앉지 않는 것이다. 거칠게 표현하면 “대한항공 1만8000여 임직원이 조씨 일가의 머슴인가”라는 질문을 우리 사회가 지금 던지고 있는 것이다. 그에 대한 진지한 대답을 대한항공이, 조현아가 제대로 내놓아야 한다.



이정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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