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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들 무자비한 한인보복살인 교민 자유 위해 보안사 설치|김홍일장군 권고따라 천신만고 끝에 귀국

해방된 만주는 무법천지였다. 우리 교민들은 중국인들에 의해 죽창으로 살해되고 가족과 농장은 불탔다. 그들은 한인들을 일본의 하수인·앞잡이로 생각하고 보복한 것이다.
세상이 이렇게 되자 만주의 우리교포와 군인들은 도시로 집결했다. 수도인 신경에 모인 한인들은 예관수(육사1기 중퇴·대령·작고), 장은산(군영·작고)중위 등의 제안으로 동북 대한민단 보안사를 설치했다.
사령관은 정일권대위였고 참모총장은 김성태중위(공군대령·작고), 작전참모 김동하중위(해병사단장·중장·함북 무산), 고급부관 윤태일중위(7기·중장·서울시장), 이규동문관(사무관급·육사2기·준장) 이었다.
보안사는 교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고 귀국동포를 호송하기 위한 무장대로서의 경비대와 귀국 후 건군의 기간요원이 될 간부를 양성키 위한 생도대를 두고 있었다. 생도대엔 50명의 사관후보생이 있어서 정식 군사교육과 훈련을 받았다.
경비대는 최주종중위(군영·소장·전주공사장), 생도대는 강창선중위가 책임을 맡고 있었다. 교관으로는 최창언 (군영·중장·작고), 석주암(2기·소강·함북 무산), 이한림(군영· 중장·함남 안변), 박원석(공군중장·참모총장·전유공사장), 박기병(군영·소장), 장은산 등 중위·소위급들 이었다.
그밖에도 양찬자(3기·소장·경남지사·내무장관역임), 윤수현(군영·준장·영남화학고문), 김동빈(1기·중장·군단장), 이규광 (3기·준장), 오창근(1기·소장), 김필호 (5기·소장·인천제절감사), 허준(3기·준장)장군 등도 보안사 요원이었다.
당시 만주 신경에선 소련군정이 실시되고 있었으나 곧 장개석군이 진주하여 통치한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그래서 보안사는 소련당국의 설립허가를 받았지만 내면적으로는 국부측의 지하조직과 긴밀히 졉촉하고 있었다.
일군의 무기고에서 뻬낸 소총 4백정으로 무장을 갗추어 교포촌과 교민들의 귀환열차에도 2개 분대씩(매칸 앞뒷문에 1명씩) 배치했다. 그후로는 교민학살이나 방화가 없어졌고 귀국열차가 역에 정거할 때마다 습격하던 마적때들의 기습·강탈도 사라졌다. 8개월간 만주교민 60만명을 안동(신의주대안)까지 안전수송했다.
그러나 궁금한 것은 역시 고국 소식이었다. 그래서 丁ㅡ권·김석범·최창언장군 등이 서울을 다녀오기로 하고 9월말께 귀국해보니 당시는 여운형씨의 「인민공화국」(건준)판이었다.
이들은 여운형씨와 몇몇 민족진영 인사들도 만났다. 그들은 앞으로 경험있는 군사요원이 필요하다면서 가서 부대를 인솔해 오라는 것이었다.
이들이 다시 만주에 갔으나 정일권대위는 1주일후 소련군에 소환된 후 둘아오지 않았다. 남아있던 대원들은 최고참인 김석범대위(해범대사령관·중장)를 후임 사령관으로 추대했다.
정세는 나날이 험악해지고 온다던 장개석군이 오지 않자 김석범사령관이 중국어에 능통하고 정보와 섭외를 맡고있던 이규동·석주암씨를 대동하고 금주로 갔다. 거기엔 만주로 진주하려다 소련의 거부로 정지된 국부군 3개 사단이 머물러 있었다.
보안사대표들은 중국군사령관 두율명대장을 면담하고 한국교민들의 장래 문제를 내놓았다. 두잠군은 왕일서라는 고급참모를 소개했다. 그가 바로 광북군 참모장으로 있다가 다시 중국군으로 돌아가 한교사무처장이 된 김홍일소장이었다.
김장군은 앞으로 만주는 국부군과 중공군의 일대 혈전장이 될 것이라면서 거기에 휘말려 군사경력을 쌓은 인재들을 희생시키지 말고 속히 귀국하라고 권고했다.
당시 남은 사람은 군인들과 그 가족 등 4백명정도였다. 이한림·최창언·최주종·장은산·예관수 등 요원들은 이미 보안사를 떠나 귀국했고 김석범·이규동·김동하·석주암·윤태일·이규광·정순민 (4기·소장·맹호사단장)장군 등이 계속 남아 조직을 지키고 있었다.
4백여명의 단체이동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규동장군이 만 사흘간이나 신경역장을 만나 호소했지만 막무가내였다. 결국은 일면 협박, 일면 매수작전으로 특별열차를 배정받는데 성공했다. 소련당국에는 안동을 거쳐 평양으로 간다고 하여 발차허가를 받았다. 그러나 억류될 위험이 있는 북한을 피하기 위해 안동으로 가지않고 대연으로 빠졌다. 거기서 해로로 남한을 가기 위해서였다. 도중에 기관차만 바꿔 달고 방향을 바꾼 것이다. 이 일은 매수된 신경역장이 동승하여 해주었다.
46년3월초순 대련에 와보니 배가 없었다. 석주암장군을 미리 보내 기선을 확보케 했었으나 남한항임이 밝혀져 소련군이 억류해 버린 것이다.
약 20일간 머무르면서 백방으로 수소문하여 90t급 목조 범선 한척을 7만원(당시 사무관급월급60원)에 계약했다. 그동안 여비가 떨어져 젊은 남녀들은 부두노동까지 해야했다.
군정당국엔 진남포로 간다고 속여 출항허가를 받고는 인천으로 향뱄다. 월미도에는 벚꽃이 만발해 있었다. 46년4월 중순께였다.
이 귀국선에는 당시 7세였던 이순자여사도 타고 있었다. 이규동장군은 노부모와 경비대원으로 교포보호임무를 맡고 있던 이규승·이규광씨 등 동생들을 포함한 가족들을 인솔하고 있었다.
귀국일행 4백여명은 미군들에 의한 1주일간의 입국수속을 마치고 귀국 난민들의 집결소였던 서울 장충분에 갔다가 거기서 해산했다.
그러나 수십년간 이민했다가 돌아온 이들울 맞아줄 터전은 없었다. 이들은 다시 고국에 이민온 기분으로 새 출발을 해야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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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석 소장 : kimseok@joongang.co.kr (02-751-5511)
국방연구원 전력발전연구부ㆍ군비통제센터를 거쳐 1994년 중앙일보에 입사한 국내 첫 군사전문기자다. 국방부를 출입한 뒤 최장수 국방부 대변인(2010~2016년)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군사안보전문기자 겸 논설위원으로 한반도 군사와 안보문제를 깊게 파헤치는 글을 쓰고 있다.

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