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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67)제79화 육사졸업생들(20)|장창국|광복군

여러 가지 우여곡절을 겪은 뒤 광복군이 창설된 것은 1940년 9월17일이었다. 그러나 편제만 갖추어졌을 뿐 실제의 부대는 없었다.
외국 땅에서, 그것도 정권이 안정되지 못한 채 대외전쟁을 치르고 있던 신생 중국에서 군대를 조직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중국정부나 국민당은 광복군을 임정 산하의 군사조직으로 인정하려 했으나 군부가 말을 듣지 않았다. 국부 군은 우리 광복군을 중국 군에 편입, 예속시켜 작전 권·인사권·운영권을 장악하려 했다. 이것은 통수권의 행사이고 따라서 광복군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이런 여건 속에서 광복군은 여러 차례의 타율적 개편을 거쳐 42년 9월에야 겨우 그 체제를 일단 정착시킬 수 있었다. 당시 총 사령은 종전대로 이청천 장군이었고 황포 군관학교 3기생 김원봉이 부 사령·군무부장·제1지대 장을 겸한 실력자로 부상했다.
참모장이었던 이범석 장군(중국 군 소장)은 제2지대 장이 되고 제3지대 장은 신흥무관학교 출신인 김학규 선생이었다.
제1지대는 장개석 정부의 임시피난 수도인 중경을 근거지로 하여 의열단의 후신인 조선 의용대로 구성됐다.
김야산 이라는 가명을 사용하던 김원봉 지대 장은 테러를 항일전술로 채택하여 의열단을 조직, 폭파·암살사건을 벌여 왔다. 이 의열단은 이봉창·윤봉길 의사가 소속돼 있던 김구선생의 애국단과 쌍벽을 이루었던 폭력투쟁단체였다.
김원봉은 의열단을 조선 의용대로 확대·개편하여 그 총대장이 됐다가 대원 1백50명을 그대로 가지고 광복군에 들어와 제1지대를 구성한 것이다.
당초 그는 조선 의용 대가 있으니 광복군을 새로 만들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다가 명분에 밀려 광복군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그는 원래 우익민족주의자였으나 김두봉과 의열단을 같이 하고 일본 유학 중 좌경한 조선인 여자와 결혼한 후 점점 좌경화 됐다고 한다.
그와 함께 광복군에 들어온 김두봉은 42년 3월 1지대 원 1백20명을 이끌고 중공지역인 연안으로 가 버렸다.
경남태생으로 보성고보를 졸업하고 중앙·보성·휘문고보에서 교원을 역임한 한글학자 김두봉은 연안의 조선인 공산주의자들과 연합하여 조선독립동맹이라는 정치단체를 결성하여 그 주석에 취임했다.
조선독립동맹의 행동대(군사단체)로는 조선의용군이 결성되어 팔로군에서 잔뼈가 굵었다는 김무정이 그 사령관이 됐다. 김두봉은 평양에서 최고회의 상임위원장(국회의장 격)까지 올라갔다가 58년 연안파의 반 김일성 쿠데타 음모에 관련된 혐의로 숙청됐다.
함북태생으로 모택동의 만리장정에도 참가했다는 김무정은 6·25때 군단장이었는데 패전 책임을 쓰고 숙청됐다가 중공에 망명해 병사했다고 한다.
연안의 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에는 중공 계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이 총집결하여 이른바 연안파가 그때 형성됐다. 평양에서 내무상·체신 상을 지내다가 남로당을 동정한 혐의로 박헌영과 함께 숙청된 박일우, 재정상·부수상을 지낸 최창익·허정숙 부부, 중동중학을 졸업하고 부수상까지 지낸 김창만, 그리고 박효삼·한 빈·김민산·하앙천 등 후에 북괴의 쟁쟁한 인사들이 된 자들도 거기 있었다.
김원봉은 당시 중국의 권력층을 형성하고 있던 가보군관학교 선후배들의 지원으로 광복군에 들어와 실력자가 됐고 예하 부대의 집단이탈·집단 전향에도 책임을 지지 않고 계속 2년 동안이나 1지대 장으로 머물러 있다가 44년 3월에야 해임됐다. 후임은 이범석 장군의 제2지대에 있던 송호성 장군(육사 2기)이었다.
경남 밀양태생인 김원봉은 해방 후 서울로 귀국하여 민족혁명 당·인민공화당 등 좌익정당 및 군사단체들을 조직했다가 48년 남북협상 때 월북하여 노동 상·최고회의 상임위 부위원장(국회부의장 격)을 지내다가 제거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서안을 중심으로 한 이범석 장군의 제2지대는 제1지대와는 달리 우익민족주의 세력으로 결속된 광복군의 최 정예 부대였다.
제2지대에서는 노백린 장군의 아들로서 35년에 낙양 군관학교 한국인반 제1기생으로 졸업한 노태준 선생과 그 동기생들인 안춘생(8특·독립기념관 건립추진위원장), 김동수(특임·준장·작고), 고시복(2기·준장·작고)장군, 그리고 이범석 장군의 운남 강무당 후배인 이준식 장군(8특·중장·작고)과 황용 15기인 유해준 장군(군영·소장·삼성중공업고문)등 이 크게 활약했다.
이청천 총 사령의 부관으로도 있었던 유 장군은 친일 몽고 군을 가장하고 일본군 점령구역에 들어가 일본군으로 와 있는 조선인들을 상대로 초모 공작을 벌이다 체포되어 3년간의 형기를 마치고 해방 석 달 전에 석방됐다.
김학규 선생의 제3지대는 부양을 근거로 하여 일본군 안의 조선인에 대한 귀순공작을 주로 벌였다.
만군의 박정희·이주일 중위 등을 끌어내고, 학병들의 집단탈출을 도와주고, 이들을 광복군 간부요원으로 끌어들인 것은 바로 김학규 지대였다. 박영준(8특·소장), 김국주(7특·소장)장군도 3지대의 중요간부였다.
당시 남경대학에 유학 중이던 문예진흥원장 송지영 선생(민정당 의원·전국구)도 3지대 공작요원으로 초모 공작을 벌이다 일경에 검거되어 3년형을 선고받았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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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연구원 전력발전연구부ㆍ군비통제센터를 거쳐 1994년 중앙일보에 입사한 국내 첫 군사전문기자다. 국방부를 출입한 뒤 최장수 국방부 대변인(2010~2016년)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군사안보전문기자 겸 논설위원으로 한반도 군사와 안보문제를 깊게 파헤치는 글을 쓰고 있다.

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