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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클립] Special Knowledge <555> 역사 속 '중국'의 의미

신경진 기자
시진핑(習近平·61) 중국 국가주석은 지난달 11일 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에게 “중국의 현재를 이해하고 미래를 예측하려면 중국의 과거를 알아야 한다”며 중국사 공부를 권했다. 중국사의 정확한 이해를 위해 세계적 석학인 이성규 서울대 명예교수가 국가(주권)·영토·문화·민족이란 4차원의 매트릭스로 풀이한 ‘중국’을 소개한다.

신경진 기자

역사상 ‘중국’이란 국호를 가진 국가는 없었다. 현대 중국의 정식 국호도 중화인민공화국이다. 역사 속의 ‘중국’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 국가(주권)·영토·문화·민족으로 분리하는 방법은 유용하다. 이성규 교수는 이를 각각 중국1·2·3·4로 불렀다.

 ‘중국1’은 국가로서의 중국이다. 주권을 가진 나라를 뜻한다. ‘중국2’는 주로 황하 중·하류 유역을 차지했던 지리적 위치(영토)로서의 중국이다. 중원(中原)을 말한다. ‘중국3’은 중화(中華)·하(夏)로 불린 중국이 만들고 향유한 문화이다. ‘중국4’는 오늘날 한족(漢族)을 일컫는 국민을 이룬 민족으로서의 중국이다.

시진핑 “중국사 배워라” 오바마에게 권유

영국 지도제작자 존 탈리스(1817~76)가 출판한 『세계지도』(1851)에 실린 청(淸)제국의 ‘티베트·몽골리아·만주리아’ 지도. [자료 위키피디아]

 이를 종합하면 ‘중국1’(국가)은 ‘중국4’(한족)가 ‘중국2’(중원)에서 ‘중국3’(중화)의 전통을 계승한 나라다. 이 네 층차(層差)의 ‘중국’ 개념은 중첩되어 서로 떨어지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하지만 역사는 원칙을 배반했다. 진(秦) 통일 이후 청말까지 2230년 중 1110년간 한족은 황하 중·하류의 절반 또는 전체를 통치하지 못했다. ‘중국’의 역사상 약 절반은 ‘국가(중국1)’가 ‘영토(중국2)’의 반을 상실하거나 심지어 ‘국가(중국1)’ 자체가 소멸한 상태였다. ‘영토(중국2)’의 절반 또는 전체를 점령한 이민족 제국들은 ‘한족(중국4)’을 효과적으로 다스리기 위해 ‘문화(중국3)’를 보호·이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명분으로 ‘국가(중국1)’를 자처했다. 이민족이 중국 문명을 수용했기에 한족이 계속해서 확대·발전할 수 있었다는 의미다. 네 개 차원의 중국 개념이 뒤섞이면서 혼란과 오해를 불러왔지만 이 혼란은 자신의 일방적인 주장을 정당화하려는 모든 개인·집단·국가에게 편리한 명분도 제공했다.

 특히 ‘중국3(문화)’은 대단히 유용했다. 이민족 왕조가 ‘중국1’로 인정되는 순간, 본래 이민족의 영토는 ‘중국2(중원)’에 추가됐다. 이민족 왕조를 물리친 뒤에도 확장된 영토는 모두 ‘중국2’로 주장할 수 있었다.

 중국의 4층 개념은 지금의 중국 문제를 이해하는 데도 유용하다. 시진핑 주석은 ‘위대한 중화민족의 부흥’이라는 ‘중국의 꿈’을 외친다. 신중화제국·신중화주의의 등장이다. 핵심 키워드는 역시 ‘중국’이다. 이성규 교수는 중화인민공화국의 현재와 미래는 ‘중국’ 개념을 어떻게 현실 정치 속에서 실천하느냐에 달려있다고 말한다. 신장(新疆)위구르, 티베트, 홍콩, 대만 등 중국 문제가 복잡다기한 이유는 국가를 이루는 요소인 영토·국민·문화가 모두 ‘중국’에 묶여 있기 때문이다.

◆ 영토=청조의 최대 판도는 만주+중원(중국2)+몽골+신장+티베트(지도)를 아울렀다. 청조의 광대한 영토 중 ‘중국2’를 제외한 만주·몽골·신장·티베트는 모두 역사상 ‘중국2(중원)’에 귀속되지 않았다. 청조가 한족에게 변발과 만주 복식을 강요한 것은 사실상 ‘중국3’, 즉 예교(禮敎)의 중요한 핵심을 의도적으로 파괴한 정책이었다. 한족은 “두발을 남기려면 머리를 남길 수 없고, 소매를 남기려면 손을 남길 수 없으며, 치마를 남기려면 다리를 남길 수 없다”며 한탄했다. 청조의 통치는 만주 팔기(八旗)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만한일가(滿漢一家)’는 구호일 뿐 ‘만주근본’이 원칙이었다. 중국에 들어온 모든 이민족이 한화(漢化)되었다는 고정관념은 희망사항일 뿐 ‘만주의 한화’는 극히 제한적이었다. 청조는 오족(五族, 만주·한·몽골·위구르·티베트)으로 구성된 다민족제국이었다. 청은 한족이 아닌 정복자의 정치 시스템으로 발전했다. 만주인의 정체성 확대와 만주화는 계속 추진됐다. 대러시아 외교에서 한문과 한인 배제는 1850년대 초까지 계속됐다. 러시아와의 영토 교섭은 ‘중국2(중원)’와는 무관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청조 전체 구조에서 ‘중국’은 일부에 불과했다. 청조의 황제는 ‘중국1’의 천자(天子) 자격으로 몽골·티베트·신장·만주를 지배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만주의 기반 위에서 ‘중국2(중원)’와 ‘중국4(한족)’를 포함한 나머지 지역과 민족을 정복하고 지배한 최고 통치자였다.

 1911년 신해혁명으로 ‘달로(만주족)가 구제(驅除·축출)’되고 ‘중국4(한족)’가 ‘중국1(국가)’을 재건했다. ‘회복중화(恢復中華)’가 달성됐다.

 ◆ 민족=1924년 국민당은 1차 당대회에서 “중국 국내 각 민족의 자결권을 승인하고 제국주의와 군벌에 반대하는 혁명이 승리한 후 자유롭게 통일된 중화민국을 조직할 것을 성실히 약속하며, 중국 영토 내에 있는 제 민족은 모두 평등하다”고 선언했다. 청제국의 해체를 약속한 것이다. ‘중화회복’은 ‘중국2(중원)’에 ‘중국4(한족)’에 의한 ‘중국1(국가)’의 회복을 의미했다.

한족과 55개 소수민족 묶어 ‘중화민족’

 공산당은 1922년 2차 당대회에서 중국본부·몽골·티베트(西藏·서장)·신장을 통일한 중화연방공화국 조직을 약속했다. 1923년에는 “티베트·몽골·신장·칭하이(靑海) 등과 중국본부의 관계는 해당 제 민족의 자결에 따른다”고 선언했다.

 선언과 실제는 달랐다. 중화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의 영토정책은 청조의 영토를 모두 ‘중화’에 포함시켰다. 연방제·연합국가론을 버리고 모든 독립 요구를 탄압했다. 이들 지역에서 아직도 계속되는 독립운동은 공산당이 처음 강령을 실천하지 않은 결과다.

 원(元)과 청이 ‘중국3(중화)’을 대폭 수용했고, 그 시대 ‘중국2(중원)’에서 ‘중국4(한족)’에 의한 ‘중국3(중화)’이 크게 파괴되지 않고 이어졌다. 그러나 이를 근거로 원과 청을 ‘중국’에 포함시킨다는 것은 원과 청을 ‘중국2(중원)’에 국한된 국가, 그 중심지에 약간의 이민족이 포함된 국가 정도로 오해하는 것이며, 당시 ‘중국2’의 지배집단이 ‘중국4(한족)’가 아니었다는 것을 망각한 판단이다. 원·청을 조선과 비교해 보자. 조선이 아무리 ‘중국3(중화)’의 적통을 주장해도 조선인은 ‘중국4(한족)’가 아니며, 그 영토는 ‘중국2(중원)’가 아니고, 그 국가는 결코 ‘중국1’이 아니다. 몽골의 원, 만주의 청도 마찬가지다.

 청조는 ‘다민족국가’가 아니었다. ‘만주족이 여러 민족을 정복, 격리 지배한 제국’이었다. 청조의 논리로 중화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의 민족·영토 문제를 정당화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이는 신중국이 ‘다민족’을 단순한 ‘여러 민족의 병존’이 아닌 불가분한 단일체라는 논리로 껴맞춘 이유다. 역사상 ‘중국2(중원)’ 안에도 ‘중국4(한족)’ 외에 많은 민족이 존재해 왔다. 자결권을 부여하기도 어렵고 현실적인 독립 요구도 없는 ‘중국2’ 안의 소수민족들과 자결권을 요구하고 부여할 수도 있는 ‘중국2’ 밖 ‘비중국(몽골·만주·위구르·티베트족)’을 모두 소수민족으로 묶었다. 1980년 55개 소수민족을 확정하고 한족과 55개 소수민족은 분리될 수 없는 일체라며 ‘중화민족’을 만들어냈다. 1982년 헌법에는 이 ‘중화민족’의 단결을 유지·보호하기 위해 대한족주의와 지방 민족주의를 동시에 투쟁 대상으로 명시했다. ‘중화’가 만이융적(蠻夷戎狄·동서남북의 이민족)의 대칭 개념이었다는 역사 상식을 망각한 조치다. 시진핑 주석의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은 역사 속의 ‘중화’와 완전히 다른 새로운 개념이다.

 ◆ 문명=중국 문명을 의미하는 ‘중국3’은 복잡한 문제다. 모든 정복왕조도 ‘중국3(문화)’을 계승·발전시켰다. 19세기 중반 이후 변화가 시작됐다. 전통문명 옹호론과 전반서화론 사이의 공방이 이어졌다. 반제국주의, 반서구주의 논객들은 전통과 사회주의의 결합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아시아적 가치가 서구의 대안으로 강조됐다. 권위적 비민주주의를 호도하는 수단에 불과하다는 비판도 나왔다. 문화대혁명 기간 반(反)전통이 권력투쟁과 결합하면서 공자와 유교를 철저히 파괴했다. 개혁·개방 이후 ‘중국식 사회주의’가 추진되자 ‘중국식’이 다시 조명됐다. 공자와 유교가 복권됐다.

“인권·민주주의 없기에” 유교 재조명

 유교가 재조명된 주된 이유는 개성이라는 자아, 인권과 민주주의가 없어서였다. 유교가 ‘국교’였던 사회는 황제와 그 관리들이 백성을 지배하는 전제 사회였다. 유교는 전제적인 황제 지배체제의 정당성을 부여하는 이데올로기였다. 유교에서 민주주의 정신을 찾을 이유도, 또 찾을 수도 없다. 유교의 민본과 위민 사상을 ‘소박한 민주주의 사상’으로 보고, 민치(by the people)와 충(忠)과 효(孝)를 분리해 가부장적 전제를 제거하는 것을 ‘유교 전통의 계승과 발전’이라는 주장도 나온다. 민치와 가부장질서가 사라진 유교는 이미 유교가 아니다. 유교는 ‘소박한 민주주의 사상’이 아니다. 전제주의 사상이다.

 현대 중국은 ‘중화민족’의 문명 기조를 고대 ‘중국3(문화)’으로 삼고자 한다. 중국은 하부구조가 상부구조를 결정한다고 믿는 사회주의 국가다. 그럼에도 현대·후현대 공업 사회의 상부구조를 고대의 상부구조인 유교로 건설할 수 있다는 모순에 빠져있다.

 ※ 참고 : 이성규 ‘왜 아직도 중국인가’, 김광억·양일모 편저 『중국 문명의 다원성과 보편성』, 아카넷,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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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