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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역사] 자동차정비 1호 명장 박병일 카123텍 대표

‘한강의 기적’이라 불릴 정도로 한국은 압축 경제성장을 했다. 그 영광 뒤에는 자동차·섬유·선박 등 기술자 땀이 배인 산업현장이 있다. 자동차 산업은 지금 세계 5위 규모지만 불과 60년 전만 해도 한국은 미군이 버린 폐차 부품에 드럼통 펴 만든 본체로 자동차를 겨우 조립하던 나라였다. 고철이 자동차로 탈바꿈한 데는 하루에도 수십 번 나사 조이고 기름칠 하던 정비공들 공이 컸다. 박병일(57) 카123텍 대표도 그런 수리공 중 한 명이었다. 가정형편 때문에 14살에 학교를 그만 두고 버스회사 정비견습공으로 들어간 그는 자동차 정비분야에선 최초로 2002년 기술자 최고 명예라는 ‘명장’ 타이틀을 땄다. (※현재 자동차 명장은 3명) 차량기술사 등 국가기술자격증만 17개, 은탑산업훈장과 대통령산업포장을 수상했으며, 자동차시뮬레이터 등 특허 9개를 갖고 있기도 하다. 월급도 제대로 못 받던 견습공에서 자동차 정비계의 일인자가 된 그의 인생 속엔 가파르게 성장한 한국 자동차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소장도서 5000권, 번역비만 2억 … 소년 견습공 이렇게 ‘차 박사’ 됐다

1990년대 중반 공업사를 운영하던 시절 직원들과.


“아우디 로고의 동그라미가 왜 4개인지 알아요? 합병한 네 회사를 상징하는 거예요.”(※아우디는 1932년 데카베·호르히·반더러·아우디 합병으로 탄생했다.)



40년 넘게 자동차만 보며 살아왔는데 여전히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차 얘기를 꺼내자마자 또 눈이 빛난다. 그의 사무실은 웬만한 교수 연구실 못지 않게 책이 많았다. 혼자 공부하던 시절부터 하나둘씩 사 모은 자동차 관련 책만 5000권이 넘는다. 심지어 국내에 출간도 안 된 독일이나 일본 책 번역하느라 지금까지 쓴 돈만 2억원이 넘는다. 명장, 기능한국인(2006년), 차량기술사(2008년)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건 순전히 이런 노력 덕분이다. 쭉 뻗은 고속도로가 아니라 울퉁불퉁한 자갈길을 걸으면서도 기어이 지금의 성공을 이룬 바로 그 노력 말이다.



 

근대화가 바꿔 놓은 부자의 운명



지금은 공구 다루며 손에 기름때 가실 날이 없지만 사실 그의 어릴적 꿈은 화가였다. 물감이 좋았다.



박병일 명장이 자동차정비기능사 1급을 딴 직후인 21살 때 구입한 마이크로미터(세밀한 수치 재는 공구).
 “교실 뒤에는 늘 내 그림이 걸려있었죠. 세검정초등학교 3학년 때 담임선생님은 그림 그리기 대회 나가라고 100원짜리 왕자크레파스도 사줬어요. 그때 10원짜리 싸구려 크레파스 쓰고 있었거든요.”



 나가는 대회마다 상을 탔고, 당연히 화가가 될 거라 믿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땐 물감을 사기 위해 매일 새벽마다 25㎞를 돌며 신문 120부를 배달했다. 팔이 아파 세수도 못할 지경이었지만 물감 사는 상상에 버텼다. 그러던 어느 날 밤 꿈이 날아가는 소리를 들었다.



 “14살 때였어요. 방 두 칸짜리 집이었는데 연탄 아낀다고 온 가족이 한 방에 모여서 잤어요. 얼핏 잠들었다가 깼는데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병일이 미술공부시켜야 하니 집 팔고 시골로 이사가자’고 하더군요.”



 전통기와를 만들던 박 명장 아버지는 1970년대 새마을 운동으로 슬레이트 지붕이 대중화하자 일거리가 줄어 힘들어했다. 하지만 6남내의 장남인 박 명장만이라도 제대로 가르치겠다고 마음 먹은 거다.



 “그런데 어머니가 반대하더라고요. 나머지 애들은 어떡하냐고. 부모님 고민도 알았고, 동생들 걱정도 됐지만 난 내 꿈이 더 소중했어요. 그래서 몇 달 동안 모른 척했죠.” 



14살 때 청계천 헌책방을 뒤져 3개월 만에 겨우 손에넣은 『자동차백과사전』. 표지는 떨어져 나가고 책장도 누렇게 바랬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형편은 더 나빠졌다. 결국 스스로 학교를 그만두고 취직자리를 알아봤다. 문득 학교를 오가며 봤던 버스회사가 떠올랐다. 회사 마당 한쪽에 시커먼 기름때를 뒤집어 쓰고 있던 기계들이 어느날 반질반질 깨끗하게 손질돼 있는 모습이 늘 인상적이었다. 또 그 기계들이 조립돼 부르릉 소리 내며 작동하는 걸 보면 마치 죽은 생명이 다시 살아나는 것 같았다. 무작정 일을 달라고 찾아갔다. 처음에는 너무 어리다고 내쫓았지만 결국 월급 없이 기숙사에서 재워주고 하루 점심 한끼만 먹여주는 조건으로 그를 받았다.



 “당장 돈은 못 벌지만 기술을 배우면 돈을 벌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것도 감지덕지였죠. 막상 가보니 정말 열악하더라고요. 말이 기숙사지 폐차된 버스 가운데를 막아 한쪽엔 정비사, 다른 한쪽엔 버스 안내양이 생활했어요. 안내양도 새벽 일찍 나가야 하니 대부분 회사에서 먹고 자고 했어요.”



 매일 밤 10시면 운행을 마친 버스의 정비를 시작해 새벽 5시가 돼야 겨우 끝났다. 다 합쳐도 서울에 버스 600여 대 밖에 없던 시절이지만 늘 고장을 달고 사니 끊임없이 정비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버스 브랜드가 하동환자동차(쌍용자동차의 모체), 고려자동차, 잡자동차 세 종류였어요. 잡자동차는 여러 회사를 합쳐 만든 거라 그렇게 불렀죠. 새 버스가 아니라 폐차된 미군 지프차나 일본 고철을 가져다 조립해 만들었기 때문에 고장이 많았죠. 아, 재밌는 얘기 하나 할까요. 처음으로 자동차 수출한 사람이 누구일까. 하동환씨에요. 그 사람이 1955년 미군이 버린 폐차 엔진에 납작하게 편 드럼통을 붙혀서 차체를 만들기 시작했는데, 10년 뒤인 60년대 후반에 브루나이랑 베트남에 처음으로 수출했어요.”





모르는 건 죄



26살 때 독일의 자동차 전자센서 관련 책을 접한 후 꾸준히 공부한 덕에 3년 뒤 이 분야 전문가가 될 수 있었다.
월급도 없는 견습생에게 기술을 가르쳐주는 사람은 없었다. 체계적인 교육 대신 어깨 너머로 기술을 익히던 시절이라 남에게 기술을 알려주는 일은 드물었다. 그도 요령껏 선배들 하는 걸 봤다가 화장실 가는 척 하며 손목에 급하게 적었다. 그땐 종이에 적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 5개월쯤 됐나. 갑자기 반장이 창고로 데려가더라고요. 엔진오일, 브레이크오일, 미션(변속기)오일 등 오일 종류가 죽~ 있는데 불을 끄더니 냄새를 맡아보고 무슨 오일인지 맞춰보라는 거예요. 알 턱이 있나. 모른다고 했더니 손가락으로 찍어서 맛을 보래요. 그래도 모른다고 했더니 기술자 싹이 하나도 안 보인다나요. 기술자는 눈과 귀, 냄새 등 오감을 이용해야 하는데 눈으로만 본다면서 ‘네가 기술자가 되면 손에 장을 지진다’고까지 하더라고요.”



 문득 오기가 생겼다. 싹이 없다는데 만약 내가 일인자가 되면 어떨까, 상상만으로 행복했다. 하지만 친한 동기조차 “중학교 중퇴로 작은 버스회사에서 수리나 하면서 1인자를 꿈 꾸는 게 터무니없다”며 비웃었다. 그때 회사 구석에 있던 링컨 전기가 그의 가슴에 불을 지폈다. 평생 가슴에 새긴 ‘꿈은 버리지 않으면 얻을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가능한 건 나에게도 가능합니다’라는 연설문 글귀는 이때 처음 만났다. 링컨 전기를 계기로 그는 책을 읽기 시작했다.



 한 달에 한 번 쉬는 날마다 청계천 2가부터 8가까지 헌책방을 뒤진 끝에 3개월 만에 『자동차대백과사전』을 구했다. 그야말로 신세계였다. 궁금했던 모든 게 다 들어있었다. 한자를 잘 아는 형에게 물어가며 공부했다. 덕분에 18살 되던 해 버스 2대를 전담하는 반장이 됐다. 보통 30대 초반에 반장이 되는 걸 감안하면 초고속 승진이었다.



 77년, 그러니까 20살 되던 해 책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판단에 직업훈련원(현 폴리텍대학)에 지원했다. 하지만 학력이 발목을 잡았다. 최소 중졸은 돼야 지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할 수 없이 학원에 다니기로 했죠. 회사에서 학원 다니는 걸 알면 싫어했기 때문에 다른 직원 대신 당직 서주거나 심부름을 해주며 비밀을 지켜달라고 부탁했어요. 매일 새벽 5시 일 끝나면 잠깐 눈만 붙이고 오전 8시에 학원 가는 생활을 했죠.”



은탑산업훈장.
 잠 안 오는 약을 하루 10알씩 먹어 위장병까지 걸릴 정도로 공부했고, 그해 자동차정비기능사 2급 자격증을 땄다. 1급을 따야하는데 들통이 났다. 틈만 나면 멀리 출장 보내며 학원에 못 가게 했다.



 “그때 소원이 문제집 처음부터 끝까지 다 보고 시험 보는 거였어요. 안 되겠다 싶어 사촌 형에게 편지를 썼죠. 큰아버지는 이미 돌아가셨는데 한 번만 돌아가셨다고 전보 보내달라고요. 며칠만이라도 책만 보고 싶었거든요.”



 그렇게 얻은 금쪽같은 5일을 봉천동의 한 여인숙에서 꼬박 공부하며 썼다. 필기시험은 합격했다. 그런데 실기시험이 문제였다. 버스부품만 다뤄본 그의 앞에 승용차, 그것도 미국산 수입 부품이 떡하니 올려져 있던 거다.



 “버스회사에 다녀 잘 모르겠다고 했더니 책을 던져주며 보고 하라더군요. 그런데 다 영어로 써있는 거예요. 손도 까딱 못해보고 쫓겨났어요.”



무거운 공구통을 들고 시험장인 대방동에서 봉천동까지 울면서 걸어 돌아왔다. 한편으론 서러웠지만 다른 한편으론 모르는 게 죄라는 생각에 더욱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다음해 1급 자격증을 따냈다.



시대를 앞서 공부하다



자동차진단 청진기로 엔진소리를 듣고 있다
22살 군복무 중 자동차검사 1급과 자동차중기정비 1급, 직업훈련교사면허 2급에 합격할 정도로 계속 공부를 열심히 했다. 그러다 83년 운명의 책을 만났다.



 “자동차 관련 자격증 1급 이상 소유자 10여 명이 만든 한밝자동차연구회라는 모임에 나갔어요. 한 친구가 독일 오펠 출장길에 책 한 권을 가져왔어요. 전자화한 차에 관한 거였어요. 한번 훑어봤는데 모르는 게 너무 많더라고요. 충격이었죠.” 



다른 회원들은 “이런 차가 나올 때면 이미 은퇴한 뒤”라며 눈여겨 보지 않았다. 하지만 박 명장은 너무 흥미로워 책을 복사한 뒤 개인돈으로 번역까지 했다. 심지어 전자분야 내용을 이해하려고 전자학원에 등록해 5개월 동안 전자기초 수업까지 들었다. 그래도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많아 끙끙거리자 학원 관계자가 개인 과외를 소개해줬다.



 “월미도에 해군 레이더 고치는 사람이 있다는 거예요. 그 사람한테 한 달에 70만원씩 주고 3개월 과외를 받았죠. 군 제대 뒤 어릴 때 저를 예뻐해 주던 공장장 따라 인천에 내려갔을 때예요.”



 박 명장은 과외가 끝난 뒤에도 센서 사용법 등 전자와 관련한 책을 50권 더 사서 공부했다. 그리고 86년, 몇십 년 뒤에나 나온다던 전자식 자동차가 나왔다. 현대 그랜저와 대우 로얄살롱슈퍼다.



 “차가 시중에 나왔는데 다들 전자 관련 명칭도 모르는 거예요. 그런데 내가 슥 보고 TPS센서(엑셀을 얼마나 밟는지 감지하는 센서)가 고장났네, 이러니까 다들 놀라는 거죠. 물 만난 고기가 따로 없었어요.”



 정비공장에서도 못 고치는 고급차를 인천의 아무개가 고친다는 소문이 나면서 그는 유명해졌다. 일감이 밀려들자 버스회사를 그만두고 89년 왕자카센터를 차렸다. 돈도 물론 많이 벌었지만 강의 요청이 전국에서 빗발쳤다.



 “주변에선 애써 공부한 걸 왜 그냥 알려주냐고들 했죠. 사실 처음엔 나 역시 겨우 알아낸 기술을 알려주는 게 아까웠지만 전국을 다니며 내가 일인자라는 걸 확인하고 싶었어요.”



 가끔 숨은 고수를 만나 자극을 받는 경우도 있었다. 대전에서 만난 한 기술자는 배기가스 나오는 머플러에 손만 대보고는 엔진 문제를 찾아내곤 했다.



 “나중에 책을 보고 원리를 터득하니 다 이유가 있더군요. 연소가 잘되면 약간 촉촉한 느낌이 나요. 마른 느낌이면 문제가 있다는 거죠. 그리고 가스가 나오는 압력이 일정해야 하는데 가끔 손을 톡톡 치는 느낌이 있어요. 이건 엔진밸브에 이상이 있는 거죠.”



 91년 그에게 또 한 번 기회가 왔다. 이번에도 역시 미리 준비한 당연한 결과였다. 당시 한국은 수동으로 기어를 변속하는 차가 90% 이상이었다. 그런데 책을 보니 미국은 오토매틱이 기본이라는 거였다. 한국에도 오토매틱 대중화 시대가 열릴 거라 생각하고 또 공부를 했다.



 “아니나 다를까. 오토가 쏟아져 나오더라고요. 여기저기 강의를 많이 했죠. 학교·기업 등 다 합치면 한 50만 명 정도한테 했을 걸요.”



정비공장 그의 사무실엔 책이 가득하다.


명장의 마지막 꿈은 ‘인간 명장’



“요즘 진정한 명장이 무엇인가 고민을 많이 해요. 최고가 되겠다고 결심한 14살부터 앞만 보고 달려왔는데 이제는 주위를 돌아보려고요. 2006년부터 미용·도배·전기·컴퓨터·보일러·자동차 등 8개 분야 기능인 50여 명이 서해지역 섬을 다니며 봉사활동을 하고 있어요. 1년에 2~4번 정도 가는데 정말 뿌듯해요. 자비 들여 하는 건데도 봉사하겠다는 사람이 늘어 지금은 500명이 넘어요. 목표를 이룬 지금 다시 세운 최종 목표는 인간명장이 되는 거예요.”





 글=심영주기자 사진=김경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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