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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0년 바둑사의 천재' 우칭위안, 돌을 거두다

1950년대 초의 우칭위안(오른쪽)과 기타니 미노루. 우칭위안은 28년 일본에 건너간 이후 50년대 말까지 머리를 삭발하고 대국에 임했다. [사진 일본기원]


2012년 아흔여덟 때 제자와 대화하는 우칭위안.
‘현대 바둑의 창시자’ ‘20세기의 기성(棋聖)’ ‘2500년 바둑사의 천재’.

[삶과 추억] 100세로 타계한 현대 바둑 창시자
33년 기타니와 함께 '신포석' 발표
"바둑은 조화" 평생 도인처럼 살아



 프로기사 우칭위안(吳淸源) 선생에게 따라다니는 수식어다. “바둑은 조화”라고 갈파했던 그다. 우칭위안 선생이 일본 가나가와(神奈川)현 오다와라(小田原)시 병원에서 지난달 30일 오전 1시11분 노환으로 타계했다. 100세.



 1914년 중국 푸젠(福建)성 푸저우(福州)에서 태어난 우칭위안은 여섯 살 때 아버지 우이(吳毅·?~1926)에게 바둑을 배웠다. 재능은 일본에까지 알려졌고, 27년 하시모토 우타로(橋本宇太朗·1907~94) 4단이 중국에 건너가 그를 시험하기도 했다. 하시모토는 스승 세고에 겐사쿠(瀨越憲作·1889~1972) 7단에게 내용을 알렸고, 감탄한 세고에는 일본기원 부총재 오쿠라 기시치로(大倉喜七朗·1882~1963) 남작을 찾아갔다.



 당시 둘 사이에 이런 대화가 오갔다. “소년을 데려오겠습니다.” “그가 와서 일본 기사를 누르면?” “예도(藝道)엔 국경이 없습니다.” 소년 우칭위안은 28년 가족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갔다. “내가 바둑계에 잘한 게 하나 있는데 우 소년을 일본에 데려온 일이다.” 평소 하시모토가 자랑한 말이다.



 창조자의 재질을 지닌 우칭위안은 일본 바둑의 금기를 깨면서 마침내 33년 기타니 미노루(木谷實·1909~75) 5단과 함께 ‘신포석(新布石)’을 발표했다. 바둑돌을 놓는 착수(着手)의 기준은 ‘집의 많고 적음’보다 ‘효율’이라고 설파했다. 일본 막부 300년의 구포석을 넘어서는 세계관의 혁명을 이뤘다. 현대 바둑의 기틀이었다.



 우칭위안은 일본 바둑계를 압도했다. 39~56년 ‘치수고치기 10번기’에서 기타니, 하시모토, 사카다 에이오(坂田榮男·1920~2010) 등 당대 최강의 기사 7명을 모두 이겨 그들을 한 수 아래로 만들었다. 40~60년대 일본 바둑의 융성은 그가 제시한 관념과 실험에 크게 힘입었다.



 고인은 평생을 도가의 정신으로 살았다. 젊은 시절 중국 도교단체 홍만교(紅卍敎)와 일본 신흥종교 새우교(璽于敎)에서 수행하기도 했다. 바둑의 본질을 압축하는 명언 “바둑은 조화”는 그런 정신세계에서 왔다. 김인(71) 9단은 “우 선생은 현대의 전환기를 이끈 분이다. 20세기 모든 기사는 그분을 철저히 공부해야만 했다. 모두의 스승이셨다”고 고인을 추모했다.



 고인의 문하에는 린하이펑(林海峰·72)·루이나이웨이(芮乃偉·51) 9단이 있고, 한국의 조훈현(61) 9단은 그의 사제다. 영결식은 친족장으로 거행될 예정이다.



문용직 바둑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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