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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New York Times] 하버드대가 아시아계를 차별하지 않는가

야샤 멍크
‘새로운 미국 재단’ 연구원
100년 전 하버드대에는 심각한 고민거리가 있었다. ‘유대인이 너무 많다’는 문제였다. 1900년 신입생의 7%를 차지했던 유대계 학생은 1922년 21.5%까지 불어났다. 예일대·프린스턴대보다 훨씬 높은 비중이었다. 아이비리그 대학에서 하버드보다 유대인 학생 비율이 높은 대학은 컬럼비아대와 펜실베이니아대밖에 없었다.



 당시 A 로런스 로웰 하버드대 총장은 “유대인의 침공이 하버드를 망칠 것”이라고 경고하며 15% 상한선을 도입하려 했다. 그는 입학 절차를 유대인에게 불리하게 바꾸었다. 하버드 입학사정위원회는 ‘인성 및 적합성’이라는 허울 좋은 기준으로 유대인 입학을 제한했다. 사회학자 제롬 카라벨의 책에 따르면 이 관행은 30여 년간 유대인 학생 입학을 통제했다.



 오늘날에도 비슷한 불의가 작동하고 있다. 아시아계 학생의 입학을 저지하기 위해서다. 아시아계 학생이 최고 명문대에 입학하려면 백인 학생보다 SAT(미국 수능시험)가 140점은 더 높아야 한다. 2008년의 경우 SAT 점수가 유난히 높은 하버드 응시생 중 절반은 아시아계였다. 그러나 최종 합격자 중 아시아계는 17%에 불과했다. 지금은 20%다. 아시아계는 미국에서 가장 빨리 인구가 성장하는 인구 집단이지만 하버드대 학부생 중 아시아계 비중은 지난 20년간 제자리걸음이다.



 최근 아시아계 응시자들이 하버드에 소송을 제기했다. ‘신입생 인종 비율 맞추기’가 하버드의 관행이라는 강력한 증거가 제출됐다. 각 인종·민족 집단의 입학생 수가 매해 현저히 비슷한 비율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을 입증하는 자료다. 아시아계 입학생 수가 유난히 높은 해가 드물게라도 있으면 그다음 해부터는 아시아계가 눈에 띄게 줄었다는 통계도 있다.



 ‘아시아계 학생들이 시험 점수는 좋아도 독창성이나 리더십 같은, 점수로 환산되지 않는 자질에서 부족하다’는 게 현 상태를 옹호하는 가장 흔한 주장이다. 88년에도 윌리엄 R 피츠시몬스 하버드대 입학처장은 아시아계 학생들이 “교과 외 활동 기준에서 약간 부족하다”고 말했다.



 유대계 학생을 묘사했던 말과 불편할 정도로 유사하다. 게다가 이런 주장이 사실이라는 증거 또한 없다.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대학(UCLA) 지원생 10만여 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최근 연구는 인종과 과외 활동 성취도 사이에 유의미한 상관관계가 없다는 것을 밝혀냈다.



 아시아계 학생이 백인 학생보다 정말 개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아시아 학생은 특색이 없다’는 오랜 편견이 문제다.



 ‘독창성 없는 출세지상주의자’라는 억울한 비난을 들었던 유대인들이 수십 년간 미국에 많은 기여를 했다. 아시아계가 유대인보다 부족한 업적을 남기란 법은 없다.



 역사적으로 여러 유사점이 있긴 하지만 큰 차이점도 하나 있다. 로웰 총장이 이끌던 시절, 하버드대는 백인 개신교 엘리트 집단이 굳건히 지배하고 있었다. 반유대주의가 팽배했다. 그러나 지금의 하버드는 다양한 민족과 종교 집단으로 구성돼 있다. 집안에서 최초로 대학에 다니는 학생도 전체의 15%다.



 그러면 왜 또 다른 차별을 용인하는 걸까. 우선 아시아계 학생의 비중이 높아지면 흑인 학생의 비중이 낮아진다고 여기는 교수가 많다. 이번에 아시아계 학생 역차별 소송을 지원한 소수민족 우대에 반대하는 세력은 두 이슈를 연결시키지만, 사실 두 사안은 전혀 관계가 없다. 흑인이나 라틴계 학생처럼 재학생 비중이 낮은 집단에 유리한 입학 기준은 정당하다. 그러나 중국이나 한국, 인도계 학생의 입학 가능성이 백인 학생보다 훨씬 낮아야 할 정당한 이유는 없다.



 보수주의자들은 하버드대가 아프리카계(신입생의 12%)나 히스패닉계(13%) 입학을 우선시한다는 사실은 지목한다. 하지만 그들은 동문 자녀(전체 재학생 약 12%)나 운동 특기생(13%) 비율은 간과한다. 진짜 문제는 실력을 중시할 경우 백인이 소수가 될 수도 있는 사실을 하버드가 편안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다.



 명문대 입학은 희소재(scarce good)다. 누구를 입학시킬지 결정하려면 불가피하게 여러 대립하는 가치 중 무언가를 포기해야 한다. 우리는 과연 ‘뛰어난 학생’을 유일한 기준으로 삼고 있는가. 만약 그렇다면 무엇이 뛰어나야 하는가. 입학 후에 가장 많이 성장할 학생을 뽑아야 할까. 아니면 사회에 가장 많이 환원할 학생을 뽑아야 할 것이다.



 정답이 하나만 있는 게 아니다. 그러나 확실히 틀린 답은 분명 존재한다.



 수업 외 활동을 중요 입학기준으로 삼는 건 절대 불공평하지 않다. 그러나 지금처럼 기준이 불투명하면 ‘눈에 보이지 않는 자질’이나 ‘학생 배경의 다양성과 균형’처럼 애매한 기준을 내세워 차별을 은폐하기 쉽다. 이런 기준은 로웰 시대에 성적이 뛰어난 유대인 학생들을 배제하기 위해 사용됐고, 지금도 같은 목적에 악용되고 있다. 단지 아시아인이라는 이유로 특정 학생이 배제돼서는 안 된다. 대학은 보다 투명한 입학기준을 확립할 법적·도덕적 의무가 있다.



야샤 멍크 ‘새로운 미국 재단’ 연구원



◆원문은 중앙일보 전재 계약 뉴욕타임스 신디케이트 11월 25일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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